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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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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15. 16:46 횃불/1993년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조 성 훈

아주 오래 전, 지금부터 16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제 아내가 된 자매와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는 인천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저는 오산에서 가까운 사후동에 있었는데 우리는 종종 주말에 만나서 서로 교세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사후동에 계시던 한 자매님이 심자매님이 ㅇㅇ시에 버스로 오다가 정류장까지 마중 나오셨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시래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앞두고 교제하던터라 일주일이 한달만큼이나 멀리 느껴지던 때였는데 자매가 온다는 소식은 제게 반가웠고, 그 소식을 전해준 자매님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그때에는 버스가 어찌다 한 번씩 들어왔고 사후동에서는 제일 가까운 정류소가 3km나 나가야 했습니다. 저는 그날 아침부터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니는 시골 버스라 빨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저는 한 시간 가까이 여유를 두고 정류장에 나가 이제나 저제나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버스가 오는 길목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다가 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나타나자 마음은 더 설레이기 시작했고 이제 곧 자매를 만난다는 기쁨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 일어섰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눈앞에 와서 멎었고 저는 미쳐 버스의 문이 얼리기도 전에 버스 안부터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매는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곧 사람 속에 섞여 내리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 지켜보았는데 자매는 내리지 않고 버스는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와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올텐데.’

그 차로 오지 않으면 그날 온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멀어져가는 버스의 뒷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다가 힘없는 발걸음을 사후동으로 향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래,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긴거야. 그래도 그렇지 못 오게 되면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가는 중에 사후동에 거의 다 다 달아서야 그날이 만우절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아무리 만우절이라도 그리스도인이, 더구나 자매가 그런 거짓말을 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사건(?)은 결국 만우절로 인한 거짓 정보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때 말에 대한 것을 새롭게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은 그저 만우절을 즐기기 위한 재미로 슬쩍 내뱉은 말이었지만 저는 하루를 거의 망쳐버린 날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루였으니까 다행이지 만일 저의 실없는 말 한마디가 어떤 사람의 일생을 망치게 만든다면 이는 참으로 비극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아주 큽니다.

다윗은 자기 입 앞에 파숫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같이 기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족을 면할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런 생각없이 내뱉는 말들에 의하여 상처받고 괴로움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혀를 배의 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배는 크기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키는 배의 크기에 비해 아주 작습니다. 오래 전에 울산에서 수리를 위해 정박해 둔 유조선을 본 적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꼭 산만큼이나 큰 배였습니다. 그렇게 큰 배가 그 적은 키에 의해 방향을 잡아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선장이 그 큰 유조선을 작은 키로 조종하여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들여보낸다는 것은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때로 그 키를 잘못 조정하여 좌초되거나 고생하는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께서 우리의 혀를 배의 키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합당합니다. 우리의 몸에 비하면 아주 작은 지체인 혀가 몸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키를 잘못 사용하여 인생의 행로에서 좌초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키를 잘못 사용하여 자신만 좌초되는 것이 아니라 잘 가고 있는 다른 배까지 충돌해서 좌초시키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우리의 혀를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께서 혀를 불로 표현한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불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이 불로 인하여 사람들이 누리는 유익은 많습니다만 불이 잘못 사용되어졌을 때 그 끼치는 피해도 아주 큽니다. 얼마 전 제가 미국에서 훈련받고 있을 때 오클랜드에서 큰 불이 났는데 무려 5천채가 넘는 집과 건물들을 불살라버렸습니다. 정말 불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버린 조그마한 담배 불 또는 성냥불이 그렇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꼭 혀와 같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말에 발이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만 요즈음에는 시대가 발전하여 말이 제트엔진을 달고 있어서 전국 아니 온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에 못을 박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혀도 유익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야고보께서는 혀는 불과 같아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을 불사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이 이 조그만 혀로 인하여 불타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다음 맨처음 나타나는 외적 변화는 아마도 언어생활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에 있는 것을 입술을 통하여 나타내기 때문에 마음에 변화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언어생활부터 달라져야 정상일 것입니다( 6:45).

다윗은 자기 입 앞에 파숫군을 두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으로 보아 말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기야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혀를 완전하게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의 내뱉은 말로 인하여 후회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입 앞에 파숫군을 두어서 어떤 말들이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할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해서는 안될 말이 있고 하나마나한 말이 있으며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러운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29).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일상 생활에서 더러운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도 한 때는 그 가운데서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며 그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가운데서 나온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그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말끔하게 차려 입고 앉아 말할 때마다 그 입에서 악취를 풍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악담해서는 안됩니다. 악담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질투와 복수심을 언어에 실어 남이 못되도록 저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없는 것 같지만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많이 애용(?)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낮출 때, 서로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쟁할 때, 나만 알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그들의 입에는 전혀 보초가 서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혀는 곧 분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상대방에게 불을 많이 내뿜는지 상대방이 미처 조그만 거처도 지을 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불로 서로 상대방의 피처를 마구 태워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을 가진 이유가 서로의 집에 따뜻한 보일러가 되어주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장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2:18). 물론 우리는 때로 본의 아니게 과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장도 지나칠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동안 저는 대통령 선거를 몇 번 치렀습니다만 모인 군중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각 후보들의 집계와 경찰의 집계가 다른 것을 봅니다. 그들은 백만명이 모였다고 하면 경찰은 60~70만 정도 모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소문으로 들으면 어느 곳엔 전도집회로 수십 명이 주님께 돌아오고 또 어떤 설교자는 가는 곳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난 것 같은데 막상 그 교회들은 별로 감격해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나으며 빨리 부흥되고 있다는 것,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크게 쓰임받고 있다는 것, 내가 더 큰 그릇이며 더 크게 한국교회들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의 말들은 상당히 과장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 보고나 외국방문 보고 때도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도 모두가 다 주님을 위한 여행이요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는 주님의 발자국 대로이며 마치 기록된 대로(?) 여행을 마치고 큰 성과와 함께 돌아온 것처럼 말할 때도 있습니다. 적은 풍선에 바람을 넣어 크게 불어서 높이 메달아 자기의 이름을 선전하게 하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와 자매 사이에 어떤 사실을 들은 대로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나 짐작을 넣어서 부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들은 한입 한입을 거치면서 풍선처럼 커져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입을 차라리 뻥튀기 입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확인도 안 해보고 그러한 말들에 상당히 큰 상처들을 받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다 드러날 아무 쓸데없는 일인데도 아직까지 이러한 과장에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간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4:17). 형제 자매님들에 대해 또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좋게 말해준다는 것, 또는 장점을 말해 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보다는 누구와 누가 더 친밀하게 지낼 때, 한 교회가 평안히 생활하는 것을 볼 때, 간교한 뱀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듯 형제와 자매 사이 또는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여 서로 시기하고 싸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체 중에서 아주 작은 이 혀를 사용하여 형제자매들로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며 원수를 맺도록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아첨하는 말입니다(살전 2:5). 성경에 있는 대로 우리는 마땅히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귀히 여길 자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아첨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사악한 아첨은 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한 아첨(?)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아첨이라는 말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비위를 맞추어 알랑거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입이 마르도록 상대방을 높이고 칭찬하며 자신만이 오직 상대방을 진실로 생각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 이것을 아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엔 지위가 높고 지식이 많으며 재물이 많은 자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찾아가는 사람도 많으며 그들을 사귀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무지하며 힘없는 자들은 병원에서 홀로 죽어가도 그들을 찾아가서 아첨(?)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게실 때 가난한 자들, 불구자들, 죄인들, 다시 말해 장래성이 없고 사귀어봐야 얻을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었고 그들을 친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먼저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부하고 지식이 있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잘 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도 우리는 주님이 평가하시는 것처럼 대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성도들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목회하는 자들 가운데에도 이러한 아첨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좀더 잘 보이기 위하여 비위를 맞추는 것, 그것은 아마도 주님의 보시기에는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이 분야에 양심이 깨끗치 못하며 조심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눈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향하려고 바울 사도께서 하셨던 탄식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익한 말입니다(딤후 2:16). 이것은 알맹이 없는 빈말, 헛된 변론, 그리고 가치없는 말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헛된 말, 헛된 변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변론하는 것, 그리고 목적이 없는 변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성도들 가운데는 이런 무익한 변론으로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물론 영적인 성숙도에 따라 그 대화 또는 변론의 주제가 다르겠습니다만 주님을 믿은지 수십년이나 된 분들이 지극히 초보적인 것들을 가지고 수년동안 변론해 오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덕이 되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것이나, 하나님 말씀이나 신앙을 이용하여 농담하는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사실 많은 무익한 말들과 변론들이 주님과의 교제 부족이나 자존심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방에게 지기 싫기 때문에 끝까지 논쟁하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외적 경건주의자가 되어 얼굴을 꾸미고 엄숙하게 경건한 말만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익한 말로 그리스도의 품위를 떨어뜨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말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말,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며 유익한 말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말한다고 하는 것은 마땅히 형제 자매들에게 해주어야 할 말을 해 주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며 무조건 상대방이 듣기에 좋은 말만을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의 관점,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 진실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을 세워줄 수 있고 그들에게 덕이 되는 말을 한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와같이 할 수 있을까요? 이는 단순히 마음 속의 각오와 맹세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헛되고 무익한 말은 하지 않겠다고 작정해서 그 입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혀도 마치 야생마를 재갈 먹여 길들이는 것처럼 오랫동안 길들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길들이는 우리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우리의 입을 지켜서 나오는 말마다 점검을 해 유익하지 않은 것들은 나오지 못하도록 훈련한다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평강을 누리며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며 사단과 싸우는 일에만 힘을 모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많은 힘과 자원을 사단과의 싸움에 쓰는 게 아니라 작은 지체()의 불을 끄는데 쏟아 붙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복음전하고 성도들을 세우는 일에 힘을 모아 보지도 못하고 서로의 불을 끄는데 녹초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불과 키를 서로를 불태우고 파선하는데 쓸 것이 아니라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고 길을 안내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기도합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141:3).

 

(1993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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