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3. 8. 2. 09:46 횃불/1993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사사기 6:13)

 

며칠 전 어느 자매님이 주님 곁으로 가셔서 그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기드온과 같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으로 인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하루 하루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죽어가는 것을 볼 때, 그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홀로 고통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기드온처럼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라는 원망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인들이 많고 또 믿노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기의 사욕에 사로잡혀 세상 돌아가는 줄 모르고 사는 이들이 많은데 왜 그들을 놔두고 신실한 사람들이 먼저 가야 하는지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좁은 생각에는 사고가 나도 악인들만 죽고, 병이 나도 악인들이 우선순위를 가지며, 망해도 악인들이 망해야 된다고 보는데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상황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시편에 보면 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은 왜 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환란 때에 숨으시나이까?”( 10:1).

이 시편 기자는 악인들이 가련한 자들을 군박하고 탐욕을 채우며,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마음껏 그 원하는 대로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 왜 못본채 하십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22:1,43:2).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40:23).

어찌하여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74:11).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88:14).

그 중에서도 시편 73편에 있는 기자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많이 와 닿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하나님께서 정결한 자 즉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선을 행하신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신에게는 재앙이 많은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평안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행하며 육체의 정욕대로 행하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했고, 계시더라도 눈여겨보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그 앞에서 따분하게 살 것이 무엇이냐고 말했습니다.

사사기를 보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그 악한 중에 오래 산 왕들이 있는가 하면 그 선한 중에서 얼마 살지 못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죽을 때도 고통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죽을 때 편안히 죽기를 원합니다. 끔찍하게 교통사고로 죽고 암이 걸려 고통가운데서 죽는 것보다 가만히 잠자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히 섬긴다는 자들의 죽음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들보다 낫지 않았습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섬겼던 많은 사람들이 더러는 바다에 빠져 죽고, 더러는 암으로, 더러는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가다 죽고, 전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제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도 주님을 신실히 섬겼던 자들이 일찍 죽었는가 하면 두 주먹을 쥐고 하나님을 저주하던 자가 80~90까지 살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한번도 직장이라고는 잡아보지 않고 술로만 세월을 보내며 아내와 자식들에게 기생충과 같은 생을 산 사람은 살아있고 착실하게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은 일찍 암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7:15,16)라고 한 것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또한 말하기를 그들은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으며 살찜으로 저희 눈은 솟아나서 기름기가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고, 아니 그들이 바라는 것보다 더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려는 사람들보다는 양심을 전당포에다 맡기고 사는 사람들이 돈도 더 잘 모아 떵떵거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다 나름대로 타협하면서 잘 살아가는데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미련둥이라는 말을 들어가면서 그 마음과 손을 깨끗게 하려는 자들은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만 혼자 괜히 손해 보는 삶을 살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이를 알까 하여 심히 고민했다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기드온이 지금까지 듣고 배워온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하나님이요 공급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적들이 와서 곡식 밭을 짓밟아 버리고 또 그들에게 약탈을 당해 백성들이 굶주렸습니다 그래서 그도 적들 몰래 그나마 남은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바로 기드온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기드온의 말은 내가 볼 때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을 보면 도저히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일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으며 그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계십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얻는 것이 진실로 얻는 것이 아니며 잃는 것이 잃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눈으로 본 행복과 부가 진정한 행복과 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자기의 삶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일들을 만날 때 실망하게 될까요?

이는 첫째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수명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수명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900살이 넘게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만 그들의 삶 모두가 다 가치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명으로만 삶을 평가한다면 아마 므두셀라가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자일 것입니다. 우리는 수명만으로 인생이 평가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이 30이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스데반도 젊어서 죽었으며 주님 자신 또한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구도 요한이나 스데반의 삶이 단순히 짧았다는 것으로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짧은 기간이 아니라 질로 평가된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부로도 평가되지 않습니다. 사실 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부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돈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라면 부한 사람들은 신령한 사람들이요 가난한 자들은 육신적인 사람들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의 가르침과 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를 싫어하고 가난 가운데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부로 인하여, 아니 부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자들이 많이 있고 또 가난 가운데서 주를 영화롭게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 자신이 가난하셨고 바울 그리고 많은 신실한 자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로 평가된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죽을 때의 모습이나 환경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죽을 때의 모습이나 환경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여러가지입니다. 잠을 자듯 고요히 죽는 사람이 있고,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암이나 질병으로 오랜 세월 동안 고통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든 다 평안히 주님께 가고 싶고 늙어서 평안히 네 조상에게 돌아가리라는 말씀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만, 그러한 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예로 우리는 성경에서 몇 사람들의 죽음을 보게 되는데 세례 요한은 목 잘려 죽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으며,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난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죽을 때의 모습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도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을 봅니다. 상대적으로 어떤 사람들에 비해 좋은 환경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환경이 다른 사람에 비해 낫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그에게 맞는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을 보더라도 어떤 짐승은 살기 위해 물이 필요한 짐승이 있는가 하면 나무가 필요한 짐승이 있고 짚이나 굴이 필요한 짐승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기도했지만 주님은 지금 내가 네게 만들어준 환경이 나를 위해서 네게 가장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새나 강아지를 사와도 그것들을 위한 거처를(환경) 마련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우리 각자에게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환경에 따라 평가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이제 그의 많을 은퇴하는 것이 좋다고 보셔서 그의 삶을 정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삶을 연장함으로 그의 삶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유명한 운동 선수나 연예인들은 자신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은퇴해야 하는지를 고려해서 인기가 없을 때에 은퇴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삶은 아무도 없는 산 위에서 마치게 하시고, 세례 요한의 삶은 감옥에서 목 베이는 것으로 마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감독이신 주님은 우리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을 마쳐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실 때 그분을 위하여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마치게 하십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죄악과 불평등이 난무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시편기자처럼 어찌하면 이를 알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침울해할지 모르지만 휴거의 나팔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이 수명이나 부, 환경, 그리고 죽을 때의 모습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동행하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질로 평가된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을 정히 하며 손을 씻어 무죄하다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993 1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