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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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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7. 07:58 횃불/1994년

더 나은 본향

계 경 자

 

올해로 8.15 광복 49주년이란다. 내년이면 50주년. 결국 분단 된지 반세기가 지나는 셈이다.

엊그제 신문에서 대한 적십자사 총재가 북측에 아무런 조건없이 이산가족 재회를 위해 회담 재개를 제의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는 근간에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는 고상문씨 송환을 위한 회담재개 제의임을 알면서도 나는 다시금 혹시 일이 잘되면 이산 가족 전체에 어떤 희망적인 얘기라도 있을까 싶어 기사 내용을 샅샅이 출어 보았지만, 역시 남쪽의 제안에 북측의 반응이 주목될 뿐이란다.

 

나의 친정 아버지는 실향민이셨다. 20대 초반에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을 떠나 남한에 오셨다가 전라남도 완도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다. 물론 결혼 당시 곧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셨으나, 교통은 물론 서신왕래마저도 두절된 상태에서 급기야 6. 25를 겪으셔야 했다. 전쟁 중에 큰딸인 나의 언니를 낳으셨고, 둘째인 나, 그리고도 넷을 더 두셔서 1 5녀를 키우셨다. 육남매를 키우시면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발령지를 따라온 식구들을 데리고 남한의 이곳 저곳을 다니시며 생활하셨다. 전라남도 완도, 어청도, 경상북도 울릉군, 울진군 죽변, 그리고 서울 등등.

이미 정든 고향을 떠난 실향민으로서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음 붙이고 정착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잘 나타낸 것이었을까? 서울로 오시기전 아버지의 근무지는 크고 작은 섬이나 해변에 위치한 등대였다. 조용히 한가롭게 등대지기 일을 보시면서 바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까지 비춰지는 불빛을 따라 아버지의 마음은 그리운 고향으로 미끄러지듯 달려가지 않으셨을까?

가끔, 아버지와는 나이 차가 없어서 친남매처럼 지내셨다던 대고모님께서 우리 형제들에게 전해 주신 고향 얘기나, 평소에는 별 말씀이 없으시다가 약주 잔을 비우실 때면 눈시울을 적시면서 들려주신 작은 아버지의 말씀들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아버지께서 자라오신 고향을 간간이 그려보곤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우린 실향민 2세이건만 아버지의 아픔을 잘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식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육남매는 장성했고 하나 둘 결혼하여 부모님 곁을 떠났다. 그 무렵 다섯째도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마저 1984 60세 때 신장암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시한부 생을 살아가고 계실 때였다

시간시간마다 잦아드는 아픔 속에서 여러 날들을 여러 달들을 괴로워하고 계실 즈음, 남북 적십자 회담이 한창 진전되고 있었다. 1차 고향 방문단의 왕래가 있게 되어 곧 노부모님들의 고향 방문은 물론 이산가족들의 소식을 자유로이 전해 듣는 것과 가족간 왕래까지도 허락될 듯 했으나, 아버지의 병세는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더욱 악화되었고, 회담 진전은 성과 없이 자꾸 늦어지는 것을 보신 아버지는 어느 날 연필과 종이를 가져오라셨다. 그리고 생각에 잠기시더니 떨리는 손으로 지면을 달리기 시작하셨다. 식구들 중 그 누구도 감히 무엇을 쓰시느냐 여쭙지 못한 채 잠잠히 기다렸다. 아버지께서는 한자 한자 글을 적어내려 가시면서 연신 돋보기너머로 두 눈을 껌벅이고 계셨고 얼마 후 두장 가득히 채워진 편지지를 내게 건네 주실 때에는 두손으로 눈물을 닦고 계셨다. 그러시면서 그 글을 식구들에게 읽어 들려 주라셨다.

 

 

서두를 읽으면서 벌써 눈앞이 흐려졌다. 한단락 한단락 읽어내려 갈 때마다 그동안 말 못하신 아버지의 아픔의 응어리가 우리 온 가족들의 가슴으로 밀려드는 듯 했다. 곧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40여 년을 한결같이 보고 싶은 어머니와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그리며 한 맺힌 평생을 사셨으면서도 자녀들의 어린 마음에 어려움이 될까봐였을까, 혹은 사랑하는 아내의 마음에 조차 해결할 수 없는 큰 짐을 지워서는 안되겠다는 굳은 의지에서였을까, 아니면 당신의 감정을 스스로 추스리시기가 더 힘겹다고 느끼신 때문이셨을까? 평소에 말이 없으셨던 것도 맺힌 아픔을 다 털어 놓으실 수 없으셨던 탓은 아니셨을까? 그 설움은 끝내 편지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마쳐지고 말았으니····.

식구들의 설움에 벅찬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아버지는 유언처럼 조용히 이르셨다. “훗날 통일이 된다든지 남북간왕래가 자유롭게 될 때 꼭 이 편지를 가지고 고향에 가서 원사 작은 아버지를 찾으렴. 나야 이제 틀린 것 같애. 그래도 너희들 대에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니? 글쎄, 그 때가 언제쯤 을런지····

몇해 전, KBS 정문에 이산 가족을 찾는 안내문이 한 두장 나붙기 시작하면서 곧 건물 전체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알림판들이 마치 벽면을 도배하듯 써 붙여졌던 그때, 재회의 기쁨을, 한맺힌 눈물을 온 국민이 지켜보며 오열했던 그때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TV화면만 주시 하셨었는데····.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1:13~16).

아버님은 평생 주님을 믿지 않고 계셨으나 임종 한달을 앞두고 주님의 크신 은혜로 가족들과 방문하는 성도들의 기도와 전도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시기를 그치고, 분명히 돌아갈 수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며 여생을 마치실 수 있으셨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이제, 실향의 아픔을 뒤늦게 조금이나 이해하게 된 나는 실향민 2세로서 하루 빨리 남북간의 교류가 원만하여져서 나의 육친들을 만나는 기쁨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에게도 더 나은 본향 있음을 전하는 기회가 속히 오기를 기다리면서 오늘도 남북 관계의 흐름을 예의 주시해 보게 된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2).

 

(1994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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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