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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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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1. 17:03 횃불/1994년

승리의 삶의 비결

허드슨 테일러

 

주 예수님을 영접함은

거룩함의 시작이요,

주 예수님을 간직함은

거룩함의 진보요,

주 예수님을 의지함(항상 함께 하시는 주로 의지함)

거룩함의 완성이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주님이 완성하신 일을 기뻐하는 만큼

거룩함에 이른다.

절뚝거리며 넘어짐은

믿음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누이의 긴 편지에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중국에 다시 온 후 누이가 이처럼 긴 편지를 한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누이의 경우에도 제 경우처럼 바쁠 줄 믿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일정 수준 이상의 과로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의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로 말한다면 저의 일은 과도할 정도로 많고 책임도 무겁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한 압박감이나 긴장감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지난 달 이후 저는 제 생애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관해 누이에게 조금 언급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일이지만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새롭고 데 신기하며 더 놀라운 일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옛날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의 마음은 지난 6~8개월 동안 심히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선교 본부의 일을 위해서도 저는 거룩함과 생명력과 능력을 몹시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부의 일도 일이지만 개인적인 필요가 앞섰습니다. 또한 더 컸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대한 배은과 하나님께 가까이 살지 못하는 죄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고민하고, 금식하고, 노력하고, 결심하고, 성경 말씀을 더욱 부지런히 읽고 묵상할 시간을 더욱 많이 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소용없었습니다. 매일 거의 매시간 죄책감이 저를 억눌렸습니다.

저는 제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였고 일순간도 주님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힘든 일이나 밀리는 업무로, 아니면 계속되는 방해물들로 인하여 주님을 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저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졌으며, 화를 내도록 유혹을 당했고, 원망을 하거나 불쾌한 언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그것을 성취할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갈등과 너무 빈번한 패배의 경험이 계속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경험에서도 그렇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즉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고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강건해지기보다는 점차 연약해지는 것 같았고, 죄를 대적하는 일에 더 적은 권능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믿음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망까지도 점차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저는 죄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이길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역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특권을 가진 자이면서도 입으로 부르고 있을 뿐 전혀 능력이 없었습니다.

저는 실제적인 거룩이란 많은 은총을 받아 살면서 점차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갈망하고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라도 이루어지기는커녕 그것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제 손을 피해 버렸고, 마침내 소망마저 사라져 갔습니다. 그때 나는, 아마 천국을 더욱 달콤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곳 지상에서는 거룩함을 주지 않으시려나 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거룩함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보려고 노력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저는 제가 무능력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도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도움과 힘을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붙드시고 떠받치고 있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녁이 되어 하루를 반성해 보면, 죄와 실패를 고백하면서 애통해 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긴 세월 동안 이러한 실패만을 경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실패의 생활이 너무 빈번히 있는 일이었고, 그러한 경향으로 결국은 대개 실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께서 더욱 귀하게 느껴졌으며, 나 같은 죄인을 구할 수 있고 또 구하기를 원하시는 구주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주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슬픈 것은 능력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자하셔서 나의 이러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주셨습니다.

항상 저는 제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제 것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실로 부유하시지만 저는 가난하였습니다. 주님은 강하시나 저는 연약하였습니다.

뿌리에 분명히 튼튼한 나무 줄기가 있고 풍성한 영양분이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영양분을 어떻게 하여 나의 미약한 가지까지 끌어오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점차 깨달음의 빛이 떠오르자 저는 믿음만이 유일한 요구사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님의 풍요하심에 대한 열쇠는 곧 믿음이며, 이를 통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저는 믿음을 위해 힘쓰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발휘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주의 풍요함을 보면 볼수록 나의 죄책감과 무력함은 늘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생활에서 범한 죄들은 이 죄들의 근원이 되 불신앙의 죄에 비하면 하잖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불신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 불신앙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믿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영혼의 고뇌가 극도에 달했을 때 맥카피 형제로부터 온 편지의 한 문장이 제 눈의 껍질을 벗겨 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제게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라는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전에 아는 것과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동일한 실패감에서 고민하고 있던 맥카피 형제는 저보다 먼저 이 사실을 깨닫고 제게 편지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은 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고 미쁘신 분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라고 편지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저는 답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딤후 2:13).

저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13:5)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기쁨은 한량없었습니다.

, 여기에 안식이 있구나. 나는 이제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으리라. 주께서 친히 나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해 주시지 않았던가. 정녕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고, 또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던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누이여, 주님은 약속대로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반도 안될 것입니다. 제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생각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제 영혼에 빛을 부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으로부터 충만함을 얻으려고 원한 것이 나의 큰 실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주님의 몸의 일부이며 그의 살과 그이 뼈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포도나무는 뿌리만이 아니고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잔가지, 잎사귀와 꽃 그리고 과일 등 모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뿐이 아니십니다. 그는 흙이시고 햇빛이시며 공기이시고 비이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의 수만배나 되십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기쁨이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누이도 눈이 뜨여 이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풍요함을 알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누이여, 부활 승천하신 구주와 참으로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내포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부자이고 나는 가난할 수 있습니까? 오른손은 부자이고 왼손은 가난할 수 있겠습니까? 또 머리는 잘 먹는데 몸둥이는 굶주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깨달음이 기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십시오. 은행 직원이 고객에게 그 수표를 작성한 것은 당신 손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저는 이 금액을 당신 손에 지불해야지 당신에게는 지불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의 지체라는 것을 근거로 하고 또 그리스도의 신용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의 청구를 하면 이 기도는 결코 부도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이 아닌 것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자신도 그것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경험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함이 가져다 주는 안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이상 이제 저는 어떤 것에 대해 염려나 근심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이루실 줄을 알며, 주의 뜻은 곧 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어디에 또 어떻게 놓아 두시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것은 저의 할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각하실 일입니다. 가장 좋은 환경에 처해 있다 해도 주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해서도 주님의 은총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저에게 하인이 있을 경우 하인을 시켜 몇 푼 안되는 물건을 사오라고 하든 값비싼 물건을 사오라고 하든 하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 하인은 돈에 대해서는 주인만을 의지하고 주인이 시키는 것을 사오기만 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만일 저를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하시면 주님께서 또한 피할 길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곤경의 정도에 알맞은 은총을 주시고, 압박과 시련 가운데서도 힘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원이 이를 감당하기에 부족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무궁한 자원은 곧 저의 것입니다. 주님은 곧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와 함께 계시며 제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제 안에 계시기 때문에 저는 그 동안 얼마나 기쁜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편지로 설명하는 대신 누이를 직접 만나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비해 본질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 또한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셔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 2:20)입니다.

이제 그만 줄일까 합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절반도 채 못한 기분입니다. 시간이 없어 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복된 진리를 누이에게도 깨닫게 해 주시기를 법니다. 우리는 이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6)와 같은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맙시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저 멀리 하늘에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살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와 하나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만 얻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타고난 진리입니다. 이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러한 특권을 주신 주님께 욕을 돌리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받고 참된 봉사를 하기 위한 유일한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1994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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