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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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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1. 17:04 횃불/1994년

속죄제(1)

도날드 노비

이 글은 1994년 서울북부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지면에 옮긴 것입니다.

 

오늘은 레위기 4장의 속죄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또 그 속죄제물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취할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하되 화목제 희생의 소에게서 취함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 불사를 것이며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지니라”( 4:1~12)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0: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10:11~18).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에 이 속죄제에 대한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그와 같은 예물이 오늘날 사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느냐, 어떻게 우리에게 이것이 적절한 의미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 주님께서 행하신 핀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완전한 제물로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지적하는 예물입니다.

이 제사는 거듭해서 계속 드려져야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소와 염소의 피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도 이 짐승이 내 죄를 없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염소나 양이 우리의 죄의 값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물들은 앞으로 오실 우리 주님의 제물을 나타내준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될 제물의 일면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임하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 제사들 가운데 속죄 제사에 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예물은 고의적이 아닌 범죄를 범했을 때 드리도록 되어 있었던 제사입니다. 어떤 번역을 보면 사람이 그릇 죄를 범했을 때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고의적으로 범한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는 이 죄를 범하고 말거야라고 하고서 범한 죄가 아닙니다. 이 죄는 우리 인간의 연약을 나타내는 죄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5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인간의 성품 속에 연약이 있음을 이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이 죄는 우리 성품의 연약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도 이것을 의식하고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잉태했다고 얘기했습니다. 내가 잉태가 될 때부터 나는 죄에 물들어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7 17,18절 말씀을 읽어 보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7:24).

사도 바울은 자기의 육신 속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죄의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금하신 잘못된 일을 행할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 때문에 마음에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본성을 말씀할 때내 본성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증거했습니다. 내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 내게 연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절망 중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고 절규했습니다.

그래서 이 속죄제물은 우리 속에 죄의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성품이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고범죄에 대한 제물은 없었습니다.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끓쳐지리라”( 15:30,31).

이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짐짓 무엇을 범하면 거기에는 용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간음하면 이것은 고의적인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이와같은 죄에 대해서는 속죄 제물이 없습니다. 그를 영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상고하고자 하는 속죄제는 의도적이 아닌 과실로 잘못했을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저 악한 성품으로부터 흘러나온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저는 고양이를 길렀는데 그 고양이는 종종 그가 잡은 새를 입에 물고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그 고양이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새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양이가 새를 잡지 못하도록 훈련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고양이는 죽은 새를 입에 물고 자랑스럽게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일을 저한테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종이로 회초리를 만들어서 그 고양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는 네가 하는 짓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새를 죽이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고양이의 성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사냥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새를 보면 즉각 따라가서 그것을 잡고 마는 것입니다. 그의 목표는 새를 잡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양이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본성을 변경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시인하기를 원치 않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타고난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릇 죄를 범했을 경우를 본문은 말씀했습니다. 죄를 범하려고 고의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연약 때문에 죄를 범한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자네는 성경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했다고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그렇게 안해야 되는데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범죄한 죄라 할지라도 처리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해서 예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제사장이 범죄하면이라고 했는데 제사장도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죄에 대한 속죄 제물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민수기를 통해서 반역적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율법 하에서는 그러했지만 오늘날은 우리가 어떠한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주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데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가 및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구약 율법 하에서는 이 고범죄에 대한 죄를 용서할 제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희생의 제물은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가장 악한 죄라 할지라도 주님의 피를 통해서 속죄가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사람이 제물을 가져올 때는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28:13).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숨기면 용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는 처리되어야 되고 죄는 반드시 고백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속제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은 자기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짐승을 성막 앞으로 끌고 올 때는 모든 사람이 저 사람이 무슨 죄를 범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는 것은 자기의 죄에 대한 것을 공공연히 자백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제물을 가져올 때는 건강한 제물을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병든 것을 가져오면 안되었고 아주 건강한 짐승을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흠이 없는 짐승을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또한 짐승을 잡았을 때는 내장까지도 다 검사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로 사용하는 짐승은 안팎으로 다 건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 주님은 완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실패나 연약이 없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주님은 죄를 행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완전한 하나성의 어린 양이 계십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의 머리 위에 안수를 해야 했습니다.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4), 이렇게 할 때 그는 자기를 이 제물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저를 위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짐승이 저를 대신해서 죽어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죽으심의 예물에 관해서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생애를 논하고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많이 알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 안에는 영접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짐승에게 안수하는 문제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범죄한 사람 자신이 이 짐승 앞에 와서 이 짐승의 머리 위에 친히 안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선택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 앞에 나와서 그분을 여러분 개인의 구주로,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 예수님! 주께서 저를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주님을 제 생애 속에, 제 마음 속에 영접합니다.”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은 그 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 안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이 예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내가 이러한 일을 한 적이 있는가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 제물에 언제, 어느 날 손을 얹어 안수했었지?” 이렇게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를 회상하면서 여러분이 주 예수님의 머리 위에 안수하던 때를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이 주 예수님! 제가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누가복음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접기 위해서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이 나무아래 오셨을 때 그 나무 위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삭개오는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우리 집에 모실는지 안 모실는지 아직 결정이 안되었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자기 가정으로 모셔 들여 주님을 대접하고 그 후에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를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남의 돈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도로 갚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그의 생애 전체가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제물을 내 것으로 삼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제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이 사실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1994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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