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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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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제3) 의미

소제란 말은 ‘음식 제사’4)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곡식가루를 가지고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곡식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인데 아주 고운가루로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a meat offering 2:1

4) 일본 성경에는 ‘곡물 제사‘로 영어성결에는 ‘음식 제사’로 번역됐다고 합니다. 우리성경에는 소제라 번역했는데 여기에서 소는 바탕 소이기도 하고 ‘부드럽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습니다.

첫 번째, 번제와 비교하면 번제는 드리는 사람이 예물 중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제물 드림을 돕는 제사장은 가죽을 가지고 갑니다. 여기에 반해 소제는 돕는 제사장이 소제의 예물에서 한 줌을 먼저 유향과 소금을 넣고 제물을 드린 다음 나머지는 전부 다 제사장이 가지고 갑니다. 이 제사에 관여하는 제사장들은 몫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줌 불에 타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나머지는 사람의 몫입니다.

두 번째, 다른 제사에 비해 피가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안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제사에서 잘못은 피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사항은 하나님께서 곡식을 받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소제는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단독으로 드리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제는 항상 번제에 첨부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에 관한 것을 성경에 최초에 나오는 것을 통해서 이해하게 되면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번제와 함께 나옵니다. 소제를 단독으로 드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번제와 함께 드리면 소제에 피가 없어도 소제는 번제의 피에 의지해서 속죄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소제 자체만으로는 속죄가 안 됩니다. 하지만 번제와 함께 들어가게 되면 속죄와 연관이 됩니다. 이처럼 번제와 더불어 드릴 때에 번제가 드려지는 제물의 피에 소제가 물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속죄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곡식을 드리는 것이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곡식 이전에 번제에 해당하는 제물이 있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벨은 양으로 드렸기 때문에 번제도 되고 속죄제도 되고 속건제도 화목제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반해 가인은 곡식만 드렸기 때문에 성립이 안 됐던 것입니다.

1장은 (번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2장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음보다도 죽음에 이르는 전 생애를 중점적으로 그려 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1장과 2장이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1장과 2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주님의 십자가만 있고 삶이 없는 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삶이 있고 십자가가 있어야 되는 것처럼 2장과 1장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2. 소제의 가지 영역과 다섯 가지

1장에서 제물이 다섯 가지인데 세 가지 영역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소제 물도 세 가지 영역에서 다섯 가지 종류의 제물이 나옵니다. 첫 번째 영역은 불로 가공하지 않고 바로 가져오는 소제 하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영역은 화덕에 구운 것, 번철에 붙인 것, 솥에 삶은 것으로 가공해서 가져오는 영역이 하나가 있습니다. 세 번째 영역은 처음 익은 곡식을 가져오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곡식은 처음 익은 곡식이 아니고 일반 곡식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는 처음 익은 곡식을 가지고 오는데 가공해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가공 하지 않고 빻아서 가져오는 것, 불로 가공해서 가져오는 것 (화덕. 번철. ), 처음 익은 곡식을 가공해서 가져오는 것 즉, 세 가지 영역에서 다섯 가지 것이 나오는 것은 전부다 주님의 생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3. 고운 가루5) -

2:1-2절에 고운가루라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아름다운 품성을 말합니다. 특히 주님의 모든 도덕적인 품성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좀처럼 화를 내는 경우가 없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부드러우셨습니다. 고운가루가 부드럽듯이 주님은 정말로 부드러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정말로 모든 덕을 다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품성들이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5) fine flour 2:1

사람들은 잘 알지를 못했습니다. 주님의 부드럽고 온화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품성들을 사람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것들을 고운 가루가 나타내는 것처럼 완전히 다 갖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화를 내시더라도 지나친 법이 없었습니다. 항상 균형 잡힌 아름다운 덕을 세우셨습니다.

성전에서 사람을 쫓아내실 때도 채찍을 만드셨지만 보통사람들이 화를 내실 때와는 질이 달랐습니다. 고운가루의 한 면은 바로 이러한 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프라이 ) 삶은 6)

(화덕에 번철에 솥에) 가공한 것이 있는데 이 세 가지가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릅니다. 솥에 삶을 때는 뚜껑을 덮어 버리면 그 안에 조리되는 곡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악으로부터 때로는 시련을 당할 때 아무도 볼 수 없는 가운데 당하는 주님의 시련 (고난)을 의미합니다. ( 4:1-11 사이에 주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부분과 연결됩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것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기록 됐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됐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지 못했어도 주님께서는 마귀로부터 세 가지 영역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육체의 필요한 것) (영에 필요한 것) (혼의 필요한 것으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소제는 특히 주님의 인성을 나타내는 부분이 강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으로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아무도 보거나 듣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뜨거운 시험이었습니다. 사십 일 금식하신 가운데 받으신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에게는 시험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돌이 떡 덩이가 될 수 있도록 만드시는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 사람에게는 장난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5. 번철() 부친 7)

2:5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출생하시고 공생에 들어가시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번철에서 준비되는 주님의 시련은 공생애 동안의 시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생애 동안에는 사람들에게 공개됐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번철에서 준비되는 소제처럼 약 삼년 동안에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에게 집요하게 시달림을 당하셨습니다. 장로들에게 집요하게 시달리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혜롯 당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6) a meat offering baked in the frying pan 2:7

7) a meat offering baked in a pan 2:5

 

마치 주님의 성품이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기에서도 절대로 균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경계하셨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께서는 이 시험을 견디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동안에 주님의 슬픔은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주님을 동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가운데 나타나는 시험을 받으신 모습 중에 하나로 예를 들면 요 11: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즉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을 불신하기 때문에 주님은 시험을 받은 셈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통분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11: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주님의 고통을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까요? 7:34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주님께서 탄식 하셨습니다. 8:12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이처럼 주님께서는 공개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시험을 받으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6. 화덕(오븐) 구운 8)

2:4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책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아궁이인데 아궁이는 그냥 있으면 안 보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고 들여다 보면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면 화덕에서 준비되는 소제는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겟세마네 기도 같은 일에 해당합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모든 제자가 다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만이 봤습니다. 일부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주님의 고난을 봤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부는 보고 일부 에게는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8) a meat offering baked in the oven 2:4

 

7. 이삭의 소제9)

2:14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다른 나라 번역에는 첫 이삭인데 아직도 완전히 익지 않은 이삭을 뽑아서 볶으라고 되어 있답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주님의 공생애는 삼십 세에서 공생애가 시작돼서 삼십 삼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삭으로 치면 완전히 익었다. 하기보다도 익을 즈음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번역에는 곡식이 거의 익을 즈음에 라고 번역된 성경도 있답니다. 특히 킹 제임스 성경이 그와 가깝습니다. 우리성경에는 너희는 첫 이삭이기 때문에 첫 이삭은 완전히 익기 전인데도 가장 먼저 익는 데를 말한 것으로 봅니다.

9) a meat offering of thy firstfruits 2:14

주님께서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이후에 사람으로서 활동하신 장면이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이 부분이 첫 이삭을 볶아드리는 것이요 주님께서 고난을 통과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이후에도 제자들은 주님을 안 믿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주님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지요! 이것이 바로 처음 익은 곡식을 드리는 것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즉 불로 볶은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삼십 삼년 동안에 젊은 나이에 십자가 위에서 사람의 손에 의해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고전 15: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것이 실제로 실행된 것은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묶은 곡식을 빨아 드린 소제로서의 주님의 모습이 역력해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소제는 주님의 출생부터 부활해서 인자로서 마치 곡식의 특성을 가진 인자로서 낮아진 가운데 사람과 관련되는 주님의 전 생애의 모습이 소제에서 그려진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섯 가지 소제의 성질과 개요를 보았습니다. 소제는 다섯 가지고 세 가지 영역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8. 고운 가루 -

처음에 고운 가루는 불에 가공되지 않았습니다. 즉 공적인 생애에 들어갈 때 사람들은 주님을 시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공적인 생애를 시작 할 때 마귀가 시험을 먼저 했고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주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에도 사람들과 제자들도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셔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고운 가루를 다시 보겠습니다. 이 가루는 여러 가지 재료로 쓰입니다. 특히 떡을 만드는데 쓰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6:3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그 떡의 재료가 되는 것이 고운 가루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운 가루이신 생명의 떡이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6: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6: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6: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6:58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양식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운 가루는 이와 같이 우리의 양식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고운 가루를 소제를 드리는 사람이 갖고 오면 제사장은 어떻게 하는지 보시겠습니다. 2:2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제물을 제사장이 제단에 드릴 때 한줌을 드립니다. 한 줌은 제사장마다 손으로 쥐는 크기가 각각 다릅니다. 고운 가루를 드리는 분이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줌을 손에 쥡니다. 한 줌을 쥐면 그 제사장 손에서 가루의 감촉이 있습니다. 왜 이 가루를 드릴 때 제사장의 손으로 잡으라고 했을까요? 실제로 고운 가루를 잡으면 얼마나 부드러운지 제사장은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다 파악 안하고 한 줌만 주님의 생애를 파악해 보십시오. 주님의 생애가 얼마나 부드럽고 얼마나 고운지 말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고운 가루는 이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즉 이것을 만지는 자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귀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일장에서 요일 1: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접촉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영적 손으로 촉감을 느껴 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운 가루 일 것입니다. 만져도 알갱이가 없습니다. 정말로 고운 가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운 가루에서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공적인 생애로 드러나기 전의 모습이 특히 이러합니다. 이 고운 가루는 어느 한 알갱이가 뛰어나지 않습니다.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만지면 알갱이가 전혀 만져지지 않습니다. 딱딱한 것이 만져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9. 고운 가루 -

성경 전체를 보면 위대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인물들과 주님을 비교해보면 고운 가루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두드러지는 분이었습니다. 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연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모세의 특징은 온유함 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굉장히 엄할 것 같은데 모세는 참으로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성경에 기록 돼 있습니다. 모세가 살던 당시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승했단 말은 나았다는 말입니다. 뛰어났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열왕기상 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4 30절쯤을 보시면 솔로몬의 특징이 나타나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 사람입니다. 솔로몬 하면 지혜가 떠오릅니다. 참으로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 모세는 온유함의 사람, 모세는 완고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참으로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 요한복음 21장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1:7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에 뛰어 내리더라”, 베드로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생각하기 전에 몸부터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인격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3: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사도 요한은 자기를 표현할 때 주님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요한은 누구보다도 사랑을 많이 말한 분이 되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말한 분이죠. 그래 서 사도요한 하면 사랑의 사도 이렇게 인식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분이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의 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행동하는 분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사랑함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로써 바울이 받은 은사가 주님 앞에 쓰인 사도의 직분을 변호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자기도 이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말하는데 무엇을 읽어 낼 수 있습니까? 6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바울은 지식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다 좋은 것들이 많지만 바울에게 두드러진 것은 지식이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고 모세는 온유함의 사람이고,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고 베드로는 행동함의 사람이고. 사도요한은 사랑의 사람이고, 베드로는 지식의 사람이고 이분들은 다 한 가지가 두드러집니다. 바울을 만지면 지식이라는 덩어리가 만져집니다. 베드로를 만지면 행동이라는 덩어리가 만져집니다. 요한을 접근하면 사랑이라는 덩어리가 만져집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라는 덩어리가 만져집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모세는 온유가….

그러나 주님은 이 모두가 다 골고루 들어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지 않고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에게는 이 모두가 전부 다 균형 잡혀서 붙잡을 때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운 고운가루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 9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주님에 생애와 연결시켜 보면 주님은 이 아홉 가지 중에 어느 것이 특별하게 두드러진 것이 없습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두드러진 것이 없다는 것은 이것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부다 아주 고운 가루처럼 균형질 잡힌 덕목이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운가루가 말하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도 그 사람의 특징이 금방 잡힙니다. 아브라함 모세 솔로몬 베드로 요한 이 사람들 전부 다 잡히지만 주님은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한 줌을 붙잡으면 그 속에 정말로 고운 가루로서의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고운 가루입니다.

 

10. 소제에 기름을 섞는

소제에서 기름이 사용되는 방법(요소)? 2:4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 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2:6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지니 이는 소제니라자세히 보면 기름을 쓰는 방식이 세 가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름을 섞는 것이고 하나는 기름을 붙는 것이고 하나는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소제에 기름을 섞었다는 것은? 주님께는 성령이 역사하셔서 인성과” “신성이섞여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비밀 가운데 비밀입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 중에 눅 1:31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결혼 전인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아들을 나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1:3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려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이처럼 성령이 사람인 마리아에게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 되게끔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성령이 또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섞여 있는 모습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녀출생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설명이 아닙니다 깊은 지식인들이 이 부분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거의 많은 분들이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녀에게서 아들이 탄생되는 것을 사람의 지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소제에서 기름을 섞은 것을 알지 못함으로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해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처녀 출생은 과학이 이해를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연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자연 법칙이 과학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학이 있도록 한 근본이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그것을 제공합니다. 과학에 부딪히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로 가야만 해결되는가요?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만 합니다.

소제는 우리들에게 이 기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알립니다. 기름을 섞어서 소제를 만드는 영적인 의미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녀 출생 하도록 만드신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설명이 안 됩니다. 설명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해도 우리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안 된다는 말은 설명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는 있습니다.

 

11. 소제에 기름을 붙는

그 다음에 소제에 기름을 붙는 것입니다. 1:29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32요한이 또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소제에 기름을 붙는 것은 곧 주님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처녀출생 할 때만 기름을 섞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은 역사 가운데 딱 한 번 있는 일입니다. 영원 가운데 단 한 번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제에서 그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혼자 읽을 때는 아무도 읽어 낼 수가 없습니다. 신약을 자세히 읽어 보고 소제가 주님임을 알 때 기름을 섞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다음에 기름을 붙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름을 붙는 것은 주님의 공생애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부어서 주님께서 알려지심으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주님의 출생이 이미 역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 기름을 붓는 것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12. 소제에 기름을 바르는

기름을 바르는 것의 의미는 주님에게 이미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성령이 부음 바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에게서 성령이 스며 나왔습니다. 기름을 바르면 그 대상물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성령으로 행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낳게 하는 일이나 모든 일이 성령이 스며 나오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제에 기름을 바르는 의미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기름을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에서, 하나는 주님의 잉태와 (섞는 것), 하나는 주님의 공생애 시작과 (붙는 것), 하나는 주님의 활동에서 성령의 역사를 본 것입니다(바르는 것).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사실은 주님의 모든 기적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기름을 발랐는데 그 기름이 스며들었고 주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서른 여섯 번의 기적이 나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기름을 섞어라’ ‘부어라’ ‘바르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5: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이것이 돌아보는 자의 자세입니다.

 

13. 소제에 유향이 사용

소제에 유향이 사용되는 방법(요소)? 유향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하면 유향은 제사장이 가져갈 수 없습니다. 유향은 전부다 드려야만 했습니다. 2:16제사장은 찧은 곡식 얼마와 기름의 얼마와 모든 유향을 기념물로 불사를지니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2:1-2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유향을 연구하는 형제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향은 색깔이 희다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 희다는 말 속에는 순수하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아주 순전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우 향기롭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귀합니다. 그리고 유향을 넣을 때 한 줌의 소제를 드리면서 유향을 섞는데 한 줌이라는 것은 소제를 가져와서 그 소제에서 제사장이 한 줌을 가지고 제단에 불사르게 돼 있습니다.

이 한 줌은 만찬 예배 때 형제들이 감사 할 때와 관련됩니다. 주님에 대해서 전부 다 감사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전부 다 감사 할 수도 없습니다. 얼마만큼 가져오게 되느냐 하면 한 줌만 가져오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커도 자기 손의 능력 이상으로는 못 가지고 옵니다. 이걸 위반하면 위선이 됩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고귀한 형제들도 자기의 손의 사이즈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손에 자지도 온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들이 만찬 때 감사 기도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글로 써서 준비하는 것은 안 되는 원리가 이러한 것입니다.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매들도 주님 앞에 한 움큼을 가져 올 때 자기 손의 사이즈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이즈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사이즈에 맞아야만 됩니다.

그래서 젊은 형제들, 즉 구원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들은 영적으로 손의 사이즈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아기들이 손의 사이즈가 작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감사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분은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영적으로 약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분량에 맞게끔 한 줌을 가져오는 것을 절대 다른 분들이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의미가 있게 됩니다.

유향을 생각할 때 또 하나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소제에 들어가는 첨가물이 기름을 빼면 유향과 소금이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첨가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첨가하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2:11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 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누룩과 꿀입니다.

여기에서 유향과 꿀이 짝이 되고, 소금과 누룩이 짝이 되는데 한 쪽은 넣어야 되고 한 쪽은 넣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향과 꿀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유향을 언제 알 수가 있는가 하면 불사를 때 유향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유향은 불에 넣으면 향기(진가)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소제에서 유향은 다 넣으라고 했는가? 하면 불을 통과 시킬 때 향기를 내는 육체를 가진 사람은 주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품이 좋은 사람도 그 사람을 화나게 만들면 그 사람은 독종이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릅니다. 그것이 유향입니다. 그래서 유향은 소제에 다 써야 합니다. 그래서 유향은 제사장 몫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제사장은 사람이고 유향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져가도 그 사람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십자가를 통과할 때 주님께서 불평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유향입니다.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향을 반드시 넣어야만 합니다. 즉 불을 통과 할 때 향기를 낼 수 있는 유향을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 인류 가운데 주님 외에는 유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14. 꿀을 넣지 말라

그러면 꿀은 왜 넣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꿀은 인간이 갖고 태어난 아름다운 도덕적인 품성입니다. 꿀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갖고 난 아름다운 도덕적인 품성도 주님을 빼고 고난을 통과하면 거기에는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시커먼 결과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아름다운 도덕적인 품성과 예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볼 때에는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불(고난)을 통과시키면 그때는 시커매져서 못 먹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께 드릴 때 꿀을 넣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서는 모임 안에 꿀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이것은 세상적으로 성품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나 모임 안에 와서 주님을 섬길 때 모임에 문제를 발생시키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유향을 드린 사람은 향기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육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도덕적인 품성은 그 때 쉰 맛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원래가 전부 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표가 안 났습니다. 주님께서 출생할 때 동방박사가 드리는 예물 중에 유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그 유향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유향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고난을 통과해서 아름다운 향기를 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그 불 속을 통과 할 때 유향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섬길 때 성도들이 조심해야 될 것이 이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꿀이 부드럽고 친절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불을 통과 하게 되면 꿀의 특징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를 드릴 때 향기가 안 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진가가 발휘 될 때는 평화로울 때가 아닙니다. 고난이 닥칠 때입니다. 성도님들은 고난을 맞을 준비를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평화로울 때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늘 십자가를 염두에 두셨듯이 빌 1: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난을 받는 것이 믿음의 진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진보와 믿음의 진보는 항상 짝으로 같이 와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게 되면 주님의 품성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유향은 허락 되지만 꿀은 허락되지 않음을 염두에 두십시오.

 

15. 소제에 소금이 사용

소금과 누룩에 대한 것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소제의 모든 예물에는 소금이 들어갑니다. 2:13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2:11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 지니라

이처럼 누룩과 꿀은 넣지 말라고 돼 있습니다. 소금은 그 성질을 지키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언약의 소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변치 않는 능력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생애에서 소제로서의 소금을 넣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인성을 가지셨지만 절대 불평하시질 않습니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소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서 증거할 때 바울은 세 가지를 증거합니다. 주님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 주님은 죄가 없다. 주님은 죄를 알지도 못했다고 세 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금입니다. 사람들은 인성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은 죄를 범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을 사용하면 해결 되는 것입니다.

 

16. 누룩을 넣지 말라

누룩은 말할 것도 없이 악을 말합니다. 누룩은 대부분 경계를 잘 합니다. 주님께서 경계하신 세 가지의 누룩은?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입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말씀에 더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의 누룩은? 말씀에서 빼는 것입니다. 이해되는 것은 제하고 이해되는 것만 갖는 것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죽이는 것입니다. 주께서 출생할 때 죽이려는 사람은 헤롯이었으며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는데 공헌한 사람도 헤롯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자를 죽인 사람이 헤롯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은 함께 주님을 죽이는데 동참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즉 왕의 대사를 죽였으니까 왕을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왕의 사자를 죽이고 그 다음에 주님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헤롯이 주님을 불렀습니다. 빌라도는 주님이 갈릴리 출신인 것으로 알고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헤롯이 주님을 보고 기적을 볼까 해서 주님의 기적을 기대 했습니다.

주께서는 아무 일도 행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대변자로서, 대사로서 일한 침례 요한의 목을 쳐서 죽인 사람에게 주님께서 무슨 맡을 하시겠습니까? 대사의 말을 들어야 왕의 말을 듣습니다. 왕의 대사를 죽여 놓고 그 다음에 왕에게서 기적을 보겠다니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헤롯의 누룩은 주님을 처음부터 대적하는 무리였습니다.

소제에는 누룩을 넣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누룩은 부패를 시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유혹 되지도 않고, 유혹하는 분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누룩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반드시 영적인 소금을 치고 누룩을 배제하는 언급을 해야 합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어 보면 바울은 철저하게 소금을 넣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누룩을 배제합니다. 말씀에서뿐 아니라 삶에서도 철저하게 소금을 넣고, 철저히 누룩을 배제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배우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변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삶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알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룩이 있고, 우리에게는 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유향이 있고, 주님께는 소금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꿀이, 우리의 누룩이 주님의 소유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2:14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처음 익은 곡식을 볶지 않고 드리는 초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 날 드리는 초실이었습니다. 23:10-11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 납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7. 소제의 곡식은 볶을

오순절 날의 첫 이삭은 볶지 않고 흔들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소제에서는 곡식을 볶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처음 익은 곡식의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볶지 않고 드리는 것, 하나는 볶아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 만난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때 주님은 이미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인데 볶여진 곡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제의 다섯 가지가 십자가를 뺀 주님의 전 생애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제에서 한 줌을 드리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념할 때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 줌이면 됩니다. 놀라운 것은 제사장의 손의 크기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 앞에 나올 때 한 줌을 갖고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 아름다운 향기가 됩니다.

한 줌을 드리고 남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제사장과 가족들이 먹습니다. 소제는 드리는 사람의 몫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몫이 있고, 제사장을 위한 몫이 있습니다. 한 줌만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다 갖습니다. 단 유향은 절대 안 됩니다. 기름은 가져가도 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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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