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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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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목제의 순서

3:1-17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레 7:11-34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 희생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1장에서 5장까지는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6 7장은 특별히 제사장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순서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인데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순서를 바꾸셨습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이와 같이 화목제를 맨 뒤에 두셨습니다.

먼저 1장에서 5장에서의 화목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번제와 소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몫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소제에는 사람의 몫도 있지만 하나님의 몫을 먼저 다룹니다. 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인간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있는 제사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바로 화목제입니다. 그리고 순서가 바뀐 이유입니다. 6 7장에서는 화목제가 맨 마지막 에 나오는가? 그것은 화목제를 누리려면 6 7장에서 앞에 있는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가 먼저 충족이 돼야 화목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를 맨 나중에 넣은 것입니다.

 

2. 화목의 의미

그리고, 화목이라는 말이 일본어 성경에서는 화해라고 번역했고, 영어 성경에서는 화평 내지는 평화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히브리 말에 샬롬 이라는 인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화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지금도 만날 때나, 헤어질 때에, 전화 할 때, 편지 쓸 때 항상 샬롬 이라는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화목제에 나오는 화평은 샬롬과는 조금 다릅니다. 샬롬과 유사한 말 가운데 살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살렘입니다.

살렘이라는 말에 약간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샬롬과 유사한 말이지만 살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언어학자들은 다루고 있습니다. 원래 평화를 원어에서는 복수라고 합니다. 화목제는 하나일 텐데 하나님께서는 복수로 쓰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복수로 썼을까 성경에서 복수를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위 권위 복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하는 권위를 나타내는 의미로 복수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히브리어에서 강조할 때는 복수로 씁니다.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원어에서는 이 묘실이라는 말 속에 죽음이라는 용어가 쓰여 있습니다. 영어로는 [death] 이것이 히브리어는 복수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한 번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수로 쓰셨습니다. 그런데 화목제의 화목이 복수로 쓰였습니다. 왜 복수로 쓰였는가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히브리말로 복수는 주님의 죽으심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제의 복수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강조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목제라고 하는 화목의 말에 샬롬이 아니고 살렘이라는 복수로 쓰는 이유 중에 하나 는 강조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화목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3. 주님의 평안

신약성경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이 말씀도 관련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이 말씀 속에도 주님의 평안이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평안이나 화평을 생각할 때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안과 화평 가운데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4:27절에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나의 평안과 보통 평안은 다릅니다. 주님의 나의 평안은 어떤 평안인가? 주님의 행적을 보면 주님은 가야바의 뜰에 가서도 평안 하셨습니다.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도 평안했습니다. 주님은 송사를 받으실 때도 평안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의 평안을 가지면 어떤 공격이 와도 어떤 위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평안을 가진 베드로가 그 겁 많은 베드로가 행동주의자처럼 보이는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부터는 그렇게 늠름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다름 아닌 나의 평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화목에서 평안이라는 말 속에 바로 그러한 평안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등에 채찍에 맞아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주님은 평안하셨습니다. 전혀 흔들림 없는 주님의 모습을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조용하게 아무리 사람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주님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갖고 계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이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야 말로 평강의 왕이십니다. 이 세상의 평강은 타협입니다. 주님의 평강은 타협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은 평강을 갖고 계셨습니다.

 

4. 수직적인 화목과 수평적인 화목

6:15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평안을 생각 할 때 다른 나라 성경을 보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는 수직적인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평화가 있어야 됩니다.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으면 반드시 수평적인 평화가 수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점에 실패합니다. 나는 성도들은 뭐라고 해도 관계가 없다. 주님과만 평화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분이 계십니다. 사실은 그것은 위선입니다. 주님과 정말 평화한 사람은 수직적인 평화를 가진 사람은 수평적인 평안을 갖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다 가졌습니다. 주님과의 평안을 가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공격을 해 와도 적대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대적한 적이 없습니다. 딱 한번 빼고 말입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그 입을 치라고 할 때 [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이때 한 번 빼고 바울은 적대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주님의 평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수직적인 평안, 즉 화목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수평적인 화목을 갖는 것입니다. 지역모임 안에서도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화목을 가진 성도, 즉 수직적인 화목을 가진 사람은 수평적인 화목을 가집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화평, 즉 화목으로 가지면 수평적인 화목도 가지는 것입니다.

 

5. 화목제의 목적 가지

그러면 화목제를 드리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화목제는 무엇 때문에 드릴까요? 레위기 7장에서 세 가지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7: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감사가 있습니다 두 번째, 7:16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서원이 있을 때 드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자원할 때 하나님을 향해서 무언가를 드리는 것입니다. 절대 강제적이지 않습니다. 감사는 강제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감사는 자원에서 나옵니다. 서원도 자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속죄제는 싫어도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안 드리는 그 사람은 끊어집니다. 감사제는 자원하여 드리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가 자각이 되고 실제적으로 죄를 범했으면 반드시 제물을 드려야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화목제는 번제와 소제와 닮았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를 드릴 때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과 서원으로 드리는 것 그리고 자원함으로 드리는 것을 생각 할 때 이것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를 드리는 세 가지, 즉 감사, 서원, 자원하는 것을 왜 받을까요?

 

6. 화목제로 드릴까요?

번제를 생각하면 이왕이면 번제를 드리지 왜 화목제를 드리는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감사를 드릴 바에야 더 수준 높은 번제를 드리지 왜 화목제를 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목제를 왜 드리겠습니까? 번제는 드려도 몫이 없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드리면 하나님의 몫도 있고 사람 몫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화목제를 드리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은 데 단 하나님께 드리는 가운데 나는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나누고 싶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가지고 라는 목적을 가졌을 때 번제와는 달리 화목제로서의 감사의 목적이 있는 것이고 서원이 있는 것이고 자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 완전히 다 드려버리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뭔가가 남겨져 가지고 나는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다. 나의 친구와 나누고 싶다. 나의 가족과 나누고 싶다고 할 때는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제가 필요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화목제를 드리면 하나님도 몫이 있고 나도 몫이 있고 내 친구도 몫이 있고 내 가족도 몫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필요가 있을 때는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를 드리지 않고 화목제를 드린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받아드릴 때 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번제로서 받아드리겠다고 할 때는 나에게 몫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받아드릴 때 나도 몫을 갖고 싶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몫을 주고 싶다. 라고 할 때는 화목제로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강도가 목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7. 흔든 가슴과 뒷다리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은 무엇을 얻겠습니까? 화목제를 드릴 때 화목제의 드리는 것을 나누어서 제단 위에 올리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름이 있고 피가 있습니다. 기름과 피는 사람이 못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가져갑니다.

7:31-2 “그 기름은 단 위에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돌릴 것이며 또 너희는 그 화목제 희생의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그러면 왜 흔들고 왜 드는가? 단순히 사람이 그냥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 분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흔든다는 것은? 드는 것과 같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은 흔들고 어떤 것을 드느냐 하면 가벼운 것은 흔들고 무거운 것은 듭니다. 이것은 위에서 보시는 분에게 표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소유한 이 소유물은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과 그 제사장이 몫이 같습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몫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식물로 가져갑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쓰면서 고린도 성도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 구원의 확신을 확인 시킨 것이 아닙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 성도들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바울은 묻는 것입니다. 능력은 힘인데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성경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힘은 두 가지에서 나옵니다. 힘이 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명에 양식이 공급되면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은 논리적으로 ‘받았다’고 입으로 말해 버리면 됩니다. 바울은 그런 대답을 요구 하지 않았습니다. 힘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힘을 확인하려면 두 가지가 점검이 돼야만 합니다. 생명이 점검돼야 되고, 음식이 점검되어야 됩니다. 생명이 있어도 안 먹으면 힘이 안 납니다. 먹어서 힘이 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구원받은 생명이 있는 것을 아무리 확인해도 그 사람들이 영적으로 양식이 공급 안 되면 힘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문제를 수정 하는데 출발점을 힘으로 삼은 것입니다. 힘을 점검하기 위해서 두 가지가 점검이 돼야 합니다.

하나는 생명의 여부인데 생명이 없는 자에게 아무리 양식을 공급해 줘도 그 사람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양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 양식을 공급하면 반드시 힘이 생깁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한 끼 안 먹으면 일어서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식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는 가슴이고 하나는 우편 뒷다리입니다. 뒷다리는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슴은 사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화내면서 먹으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먹는 것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다들 기도하게 돼 있습니다. 기도했으면 불평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기도를 한 이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혹시 음식을 맛없게 했을지라도 감사 했으면 불평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가슴은 애정을 나타내고 감정을 나타내고 동정을 나타내고 연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충분히 동정하십니다. 그래서 화목제를 드리는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의 몫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슴은 흔든 가슴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취한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화목제의 몫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수직적인 화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 화목제를 드리는 목적이 하나님의 몫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수직적인 것을 생각 할 뿐 아니라 수평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번제는 수직적인 것만 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를 드리는 분은 반드시 수평적인 연합과 수평적인 평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화목제의 희생을 십자가를 통해서 나누게 되면 거기에는 정말로 화평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화평이 있으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하나님의 화평이 그 사람을 지킬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견디셨던 것처럼 온갖 거짓된 송사를 주님께서 견디셨던 것처럼 이것이 가슴과 든 뒷다리와 관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어깨

그리고 가슴을 생각 할 때 또 하나 염두에 둘 것은 출애굽기 28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가슴에 다는 흉패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제사장을 통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가슴에 안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어깨에 제사장의 견대가 있습니다. 그 견대에 보면 한 쪽에 여섯 지파 씩 열두 지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뒷다리가 영어에서는 [shoulder] 어깨로 번역돼 있습니다. 제사장의 어깨는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오는 것을 연상 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를 드리게 되면 이와 같이 하나는 주님의 사랑을 하나는 주님의 힘을 얻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것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나눕니다.

십자가를 화목제 관점에서 보면 죄인은 구원받게 되고 그리고 성도들은 화평을 얻는데 힘을 가진 화평을 얻습니다. 힘이 없어서 죄 가운데 빠져 있는 화평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을 증거 하면서 사랑과 힘을 가진 화평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가 나타내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17: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14:2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일 4: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이러한 말씀들이 든 가슴과 관련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24: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이것이 성경에 최초로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성질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랑은 사라가 죽은 자리에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을 가서 이삭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 하신 사랑은 원래 하나님 아버지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아들을 자기 아내가 죽고 난 후 그 아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리브가를 인도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속에 인도해 넣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최초의 사랑입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성령께서 몸된교회를 출생시켜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이에 있는 사랑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최초로 나오는 사랑입니다. 곧 이방인 중에 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고 몸된교회의 지체가 되어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 속으로 인도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에서 얻는 것과 관련 됩니다.

 

9. 화목제의 우편 뒷다리

그리고 우편 다리는 출 28:6-7 “그들이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견대 틀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다른 나라 성경에 보면 [어깨]라는 말과 용어가 같기 때문에 제사장의 흉패를 매는 견대의 보석에 글자를 새기는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여섯 지파 여섯 지파를 새깁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지고 있는 하나님의 힘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어깨에 있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 이니까 우리는 힘이 없을지라도 대제사장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영원히 어깨에 지고 계신 것을 봅니다. ‘우편 뒷다리’에서 오른쪽이 성경에서는 힘의 원천입니다. 베냐민도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동양에서는 왼쪽이 오른쪽 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영의정이 있으면 우의정이 아니고 좌의정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습니다. 성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동양에서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주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 할 때 (므낫세와 에브라임) 야곱은 어린 자가 더 복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오른손의 축복을 에브라임에게, 왼손의 축복을 므낫세에게 놓았던 것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른쪽의 축복입니다. 이 화목제의 우편 뒷다리를 드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28:6-10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공교히 붙여 짤지며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들의 연치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가슴의 흉패와 어깨의 견대에 있는 두 이름이 화목제 제물에서 얻는 것과 관련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0.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고기는 날에 먹고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7:15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말씀드린 대로 화목제를 드리는 목적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고기는 절대로 이튿날로 넘기면 왜 안 될까요? 주님 앞에 감사드리는 데는 많은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감사는 연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자 말자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혜택을 받으면 바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절대로 다음 날로 미루면 안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바로바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성도님들이 나오실 때 감사의 기도는 절대 미룰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를 위해서는 그렇게 영적이지 않아도 감사는 언제든지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화목제를 미루지 말라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감사는 누구든 지 금방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성도들도 감사는 가능합니다.

만찬예배 때 드리는 감사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구원 받은 사람이면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이 정도의 차이는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제를 통해서 교훈 받는다면 각자의 손의 사이즈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본을 주님께서 친히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천 명을 먹일 때도 감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편지 쓸 때 감사기도 드리는 것을 봅니다. 편지를 쓰다가도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바로 하는 것입니다.

 

11. 서원과 자원의 예물은 드린 먹고 남은 것은 이튿날 먹되 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서원과 자원은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16-17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 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이같이 서원과 자원으로 하는 것은 연기가 됩니다. 감사는 아무리 어려도 (영적으로 약해도) 누구든지 구원 받은 성도들은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이것을 마음속에 명심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원 같은 경우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서원과 자원이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원도 강제에서 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내가 순종해야겠다. 라고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입니다. 이것은 감사보다는 더 영적인 영역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루 더 연기해도 괜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일까지 연기하면 안 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 능력에 걸맞게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결심을 했으면 예를 들어 나는 예배를 드리겠다고 결심 했으면 영적인 준비는 필요하되 준비를 위해서 계속 미루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양 만큼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서원과 자원하는 예물은 차이가 있되 서원과 자원하는 것이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12. 화목제 음식은 제단 앞에서 먹을

믿는 성도님들이 어떻게 하면 영적인 힘을 유지 할 수 있는가요? 그것은 십자가의 거리에 비례합니다. 영적으로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멀어 질수록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약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사람은 강해집니다. 만약에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그 사람의 감사는 십자가에 가까이 있을 때보다도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을 때는 살아있는 감사가 되다가도 멀어지면 기계적인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멀어지면 형식적인 감사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절대로 멀어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화목제의 식물은 보통 식사와는 다릅니다. 만약 화목제의 음식을 평상 식으로 바꾸면 안 됩니다. 화목제 음식은 반드시 먹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제단 앞에서 먹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가져가실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에서 먹어야 하는데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키면 우리는 주님에 대한 감사를 가질 때 항상 십자가의 가까이에서 처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기계적이 되고 형식적이 됩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사람이 연습하다가 만일 어떤 일이 생겨서 하루를 쉬어버리면 그 연습하고 있는 것을 계속 보고 있던 가족들이 금방 알아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연습자가 한 시간을 쉬고 있으면 그 사람을 지도하는 사람이 알아본답니다. 일주일을 쉬어버리면 온 세상이 알아본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루만 멀어져 버리면 같이 있던 가족이 압니다. 형제가 이상하다! 말투가 이상하다! 그리고 만약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으면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장로들이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장로들은 성도들의 눈빛만 봐도 이분이 십자가에 가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안다고 합니다. 말을 안 해도 사실은 어느 정도 안다고 합니다. 최소한 그 인도자들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 쉬어버리면 장로뿐 아니라 가족뿐 아니라 모임뿐 아니라 온 세상이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형식적이구나. 저 사람은 기계적이구나.

화목제의 희생을 생각할 때 십자가에 강도가 구원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강제로 못 박혔습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강제로 끌고 가실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감사하십시오. 내려오지 마시고 그때는 달려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화목제의 화평에 힘을 얻을 것입니다. 십자가로부터 결코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13.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일에 먹으면 제사는 열납 되지 않을

그리고 18-21절을 보시면 더러워지는 것이 나와 있고 그 다음에 백성 중에 끊어진다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7:17-21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 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 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20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아무 물건이든지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이것을 신약으로 적용시킨다면, 만약에 영적으로 거룩해져야 할 부분에서 소홀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에서 이탈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인격적인 의지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화목제는 화목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화목을 만들기 위해서 갖고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이유는 화목을 누리기 위해서 갖고 나가는 것입니다.

화목은 이미 됐습니다. 화목은 이미 만들어 졌습니다. 화목제는 구원받은 성도가 십자가 측면에서 만약에 무슨 화목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화목을 얻기 위해 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화목을 누리기 위해서 갖고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로 구원받았으면 이 화목은 원래 누려지게 돼 있습니다. 만약에 실제로 이 화목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화목을 줄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화목을 경험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화목을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이 됐고 그 다음에 화목을 자기가 누리고 싶어서 누리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기 위해서 화목제를 가지고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1:4왕이 나를 침 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 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모순이 발견 됩니까? 누가 모순인지 잘 보십시오. ‘너는 나를 인도하라 그 다음에 내가 너를 따라 가리라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라고 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화목제와 관련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왕이 있는 침궁으로 이끌려 가면 화목제는 화목제의 제물을 나누는 동류와 함께 동참해 가는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은? 방금 대명사가 바뀌었습니다. 내라는 것이 우리로 바뀌었습니다. 왜 바뀌었을까요? 만약 내가 화목제로서의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뒤를 기쁨 가운데 따라가게 되면 나를 보는 사람들이 나를 따라서 함께 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임에서 어떤 성도가 화목제로서의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을 따라가게 되면 그 것을 보는 성도들이 함께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의 효과입니다. 화목과 걸맞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화목이 된 사람으로 화목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화목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가 드려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교제가 있습니다. 화목제는 교제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몫이 있고 사람의 몫이 있습니다. 교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나로 출발을 했지만 나에게 머물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분명히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퍼져 나갑니다. 이것을 계속 유지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영적으로 십자가에 가까이 있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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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