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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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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건제

5:1-6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누구든지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들 무릇 부정한 것을 만졌으면 부지중에라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혹시 부지중에 사람의 부정에 다닥쳤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혹 누구든지 무심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속건제(贖愆祭)는 한문으로 속죄할 속(); 허물 건()입니다. 제사제로서의 죄(허물)를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물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낱낱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십계명처럼 속건제의 열 가지를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1. 번째 죄는 듣는

듣고도 해야 될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증거지요? 들을 것을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할 것을 듣는 것도 죄가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첫 번째 죄는 듣는 것입니다. 말은 처음에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이들의 말도 태어나서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말을 합니다. 사실은 아이들이 어느 한날 갑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하기 전에 충분히 들었지요. 그래서 말을 하는 단계는 충분히 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인류가 최초로 죄를 범한 것을 생각해 보시면 하와와 아담이 듣는 것에서의 문제점을 들어낸 것입니다. 듣고 나서 올바르게 증거를 해야 되는데 증거를 하지 못하므로 뱀이 접근을 해왔을 때 하와가 잘 듣지 않았음을 나타냈습니다.

뱀은 이것을 민감하게 그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거꾸로 생각하면 회복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같이 속건제를 통해서 성도님들의 영적인 회복은 어디에서 출발 하는가 하면 듣는데서 출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듣지 않으면 절대로 회복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를 당했기 때문에 피조를 당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증거할 기본적인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것도 일종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저희 속에 보인다고 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하나님이 보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외면적인 것

19: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둥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하늘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을 보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2: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그렇게 큰 어려움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17: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처럼 그리스의 시인이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명의 시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신의 소생이라 즉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하는 말을 믿지 않은 헬라의 시인들의 시에서 인용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믿지 않은 사람들도 동서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말했음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일지 몰라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도 믿는 것인데 사람들은 안 믿고 있는 것이니까요.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있는 것

19:1-2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 시를 쓴 사람은 조금 전의 바울이 말하는 시인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시인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선 하늘이 먼저 나오지요? 아무도 안 가르쳐 줘도 눈만 있으면 하늘을 볼 수 있고, 하늘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것이지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한다고 그랬습니다. 이 소리를 사람들은 못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걸 보면 궁창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별들이 있습니다. 해가 있지요. 달이 있지요. 궁창이 자기가 품고 있는 물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했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밤, 낮이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있지요. 하룻밤 하루 날이 지나게 되면 이 전날보다도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지식을 전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만드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 방법

19:3-4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앞에 나오는 언어는 형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언어는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전달 과정에는 이와 같이 언어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전달하게 되는 하나님의 전달 방법이 하나가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라고 그랬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문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전하는 문자입니까? 하나님을 설명하는 문자입니다.

바울은 아덴(아테네)에 가서 이방인에게도 이 진리를 전파했지요. 이방인에게 헬라의 시인의 시를 인용하면서 전했어요.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의 시인들의 시를 읽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처음에 하나님이 속건제를 말할 때 죄를 지적할 때는 증인의 죄를 지적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죄를 어기지 않는 분은 한 분 계신 것이지요? 그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증인으로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확실한 분 이셨습니다. 이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말씀을 조금도 감추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속건제를 생각 할 때 우리가 죄를 지은 것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죄를 안 지은 분은 그러면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안 지은 분이 무슨 죄를 안 지었는가? 이렇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무슨 죄를 안 지었는가 보니까 보고 들은 바를 위선적으로 증거하는 그런 죄를 안 지은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용서 받았다. 그러면 회복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회복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주님이 범하지 않은 것처럼 회복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돼있습니다. 들을 말을 안 들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들은 말을 거짓 증거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왜 주셨는가 하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력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억력을 돕는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정보를, 갖고 오되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정보를 갖고 와서 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16:13-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이것은 지식의 활동이며 정보의 활동입니다.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그런 것 같이 무생물인 날과 밤도 지식을 전하거늘 하나님의 인격인 성령이 여러 가지 일 중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을 알리는 일을 한다는 것이지요. 또는 성령의 여러 가지 활동 중에 증거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이것은 우리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속건제를 지적 하실 때 가장 먼저 언급하신 속건제 내용이었습니다.

즉 증거의 일을 게을리 하거나 증거의 일을 잘못하는 것을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지요. 이 죄를 곰곰이 묵상하게 되면 주님과 연결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죄를 범하지 않을 분은 한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 산상에서도 구름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이렇게 저희에게 들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속건제의 첫 번째 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증거는 주님의 증거에 기초하지 않은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든 어떤 신학자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에 의해서 증거 하지 않은 증거는 가치가 없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거짓 되는 것을 계속 숨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말하게 되면 이 죄를 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왜곡하게 되면 이 죄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 받은 사람의 모습

속건제의 죄에서 회복된 사람의 가장 먼저 앞서는 활동은 증거의 활동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오셨어도 맨 먼저 약속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주님의 증언이 되리라. 성령이 오셔서 하신 약속이 속건제 항목에 첫 번째 죄에 해당하는 요소를 성령이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존재자들은 하나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생물도 증거하게 되어 있는데 생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생물 중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이사야 43장에는 하나님이 내 영광을 위해서 창조했다라고 하십니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 첫 번째 속건제의 죄가 증거의 죄였습니다.

 

죄를 깨닫지 못한 자

이것을 결정적으로 상실한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되는데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느끼기는커녕 사단을 감지하는 일이 발생 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사랑스럽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싫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부부간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신뢰를 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 됐다는 것은 바로 증거가 회복 됐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속건제를 통해서 속건을 받을 사람은 주님을 주님답게 증거하는 것이지요. 모임이 죄가 있는데 그것을 감추는 것은 속건제의 첫 번째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2. 부정한 접촉(교제)

하와가 혼자 있을 때 뱀이 찾아왔습니다. 하와는 절대로 아담을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와가 교제의 허점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사단이 성도들을 공격할 때 이런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을 그리고 모임과 정상적인 교제가 없는 사람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사단이 공격을 못합니다. 공격을 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정확하게 가룟 유다를 간파했지요. 가룟 유다를 잘 보면 하와와 비슷한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듣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늘 엉뚱하게 듣고 있었어요. 가룟 유다가 겉으로 보기에는 교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아니었지요.

이와 같이 주님과 교제를 하는 흉내를 내서는 안 됩니다.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임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말씀을 안 듣는 성도님들이 존재 할 수 있습니다. 언제 드러나는가 하면 문제가 생길 때 들어나는 것입니다. 사단이 접근할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때는 아무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유다가 누군지 사람들은 전혀 몰랐지요. 사단이 접근을 하니까 유다가 들어나게 되었지 요. 우리가 여기에서 하와의 죄나 유다의 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 번째,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들음의 근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을까요? 이것은 속건제의 회복입니다. 복음은 이와 같이 속건제가 맨 먼저 시작 될 때 문제점의 반대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속건제가 무엇인지 조금 아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듣지 못해서, 두 번째는 들어도 들음의 근원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말씀과 유사한 것을 들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접근할 때 처음에는 사단이 말을 안 냈어요. “하나님이 정말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물어봤지요. 그 다음에 자기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하였는데 사단은 죽지 않는다고 하였지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죽지 않는다는 것은 사단의 말이지요. 그런데 하와가 한 행동은 어느 쪽을 따랐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와가 한 말은 하나님 말씀 같으면서도 말씀이 아닙니다. 종교의 무서운 것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라새인들과 사두개인 열심당원들이 하나님을 빙자하는 목적이 달랐어요. 서로 원수지간 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대적하는 데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절대로 하나가 안 되는데, 하나가 될 때가 한 번 있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참 된 성도와 참 된 모임과 참 된 진리를 대적할 때는 하나가 됩니다. 그 전에는 전부다 세상에서 서로 싸웁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증거이거든요. 그러나 회복은 거꾸로 됩니다. 듣는 회복이 먼저 됩니다. 다음에 교제의 회복이 됩니다. 그 다음에 말이 회복이 됩니다.

베드로의 부인(否認)은 주님께서 미리 예상을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 속에 肉(육신의 생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肉이 있어도 막을 수가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하면 교제를 조심했으면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보여주시기를 베드로가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위치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을 주님께서 보이셨어요, 그러는 동안에 베드로가 부인(否認)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진리를 들어도 마치 모임에서 남의 이야기 듣는 것처럼 듣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다른 모임에 가서 다른 성도들과 말할 때는 부인을 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적극적으로 거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나중에 자기는 그것과 관계없는 사람처럼 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올바른 접촉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두 번째, 접촉의 죄를 범하지 않은 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어도 아버지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었고 성령과도 밀접한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원래 주님 자신의 특성이 범죄 할 수도 없고, 범죄 하지도 않았고, 범죄를 생각하지도 않으신 분입니다. 주님의 삶에서 보이신 모본에 따라 성도들이 범죄하지 않는 비결은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것은 교제를 주의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하고 교제를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하고 접촉을 많이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의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절대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올바른 접촉

이중에 가장 기초적인 접촉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교제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위험한 가운데로 그들만 가게 하시고도 기도하시러 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계셔서 보호하는 보호도 중요하지만 주님 당신 스스로가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 여주는 모본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기도였지요.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과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성경에 따르면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을 들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통이 얼마나 밀접했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 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 말은 이사야가 한 말인데 이사야 자신에 관한 말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누구에 대한 말씀이겠습니까? 가장 합당하게 적용되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고 주님이시기 때문에 학자의 혀를 가지셨다고 볼 수 있지만 학자라는 말에 난하주를 보시면 제자라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학자라는 말로도, 제자라는 말로도 번역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학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학자의 혀를 받으셔서 어떻게 말로 도와주실 줄을 아시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얼마나 잘 도와 주셨는지.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말을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말을 낼 수 있는 분으로서의 주님은 학자이셨지요. 그리고 그 뒤에 말씀을 보시면 아침마다 깨우치시되이걸 보면 주님께서는 거의 매일 기도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시고 그리고 깨우침을 받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나의 귀를 깨우치사주님은 열심히 듣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형제님들은 항상 다른 형제님들의 교제하는 교제를 들으려고 한답니다. 성도들 간에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면 그 성도는 거기에서 성장이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듣기를 거절하면 그 성도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을 거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듣는 것을 거절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을 내는 분으로부터 멀어지면 끝나는 것이지요. 그것이 창세기 4장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안 듣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무엇이 나왔습니까?

바로 그들에게서 문명과 예술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 속에 주신 신성과 능력을 가지고 자기들을 위해서 그것을 빚어낸 것입니다. 그 결과 바로 퉁소 잡는 자가 나오고 기계문명이 나온 것입니다. 예술이 나온 것이지요.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것을 그대로 나타내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아침마다 깨우침을 받으시고 그 다음에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고 도우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학자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는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이 서로 연관이 되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그 말씀을 나 중심으로 듣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냈을 때 무슨 목적으로 내셨는지 이 말씀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연결을 잘 시키면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자기 마음대로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잘못된 연결은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인용합니다. 성경을 인용하면 하나님 말씀이 됩니까? 마태복음 4장에 사단도 성경을 인용하지 않던가요?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 말씀인가요? 하나님 말씀을 인용했지만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든 물리적인 세계를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화학에서 보면 다이아몬드 하고 숯이 원소가 같습니다. 다이아몬드와 숯의 원소가 다 탄소로 되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지만 불에는 타는 것을 아십니까? 왜냐하면 원소가 탄소이기 때문입니다. 숯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아시지요? 숯이 탄소입니다. 숯하고 다이아몬드하고는 원소가 같습니다. 똑같은 재료인데 하나는 다이아몬드 이고 하나는 숯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에 적용시키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똑같은 말씀인데 사단이 인용하면 하나님 말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용하시면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나 성경에 있는 것을 가져왔다고 해서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6절에서는 분명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하였지요. 성경 속에는 하나도 성령의 감동을 뺀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이 문제를 극복한 분이 주님이십니다.

잠언에 보면 친구를 잘 사귈 것을 무척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분노한자들 하고 동행하지 말라고 권면을 많이 합니다. 분노를 하고 있는 사단은 이미 교제의 대상이 아님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생명이 없는 것하고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진리를 떠난 사람하고 접촉하면 그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 부정한 사람하고 접촉하면 그 사람도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러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구원뿐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의 삶도 점검이 되어야만 합니다.

속죄제는 그 사람 자체를 다루는 것입니다. 속건제는 그 사람의 행한 것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구체적인 죄가 나와 있는 것이지요?

 

눈으로부터 시작 된 잘못된 정보로 인한 문제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에 작용한 것은 다름 아닌 눈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는지 내 눈이 어디로 가는지 주님이 보여 주시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눈으로 들어온 정보가 손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그 사람의 사고나 생각을 통해서 그 손이 사용 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발은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사고가 형성 되면 손이 움직이게 되고 손이 움직임을 통해서 발이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따르면 전도자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발을 칭찬 했어요. 왜 아름다운 발이었는가? 하면 복음을 전할 자를 옮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리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빼거나 찍거나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빼듯이 눈을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손을 찍듯이 손을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눈을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보는 지 철저하게 눈을 빼는 고통을 생각하며 눈을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도의 마음속에 어떤 정보가 들어오는가를 자기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관리하지 않고 자기 속에 나쁜 정보가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정보를 보고도 속건제 죄에서 증거 하지 않으면 죄이듯이 이것이 그 사람의 삶 속에 굉장히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손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어떤 성도가 손에 술잔을 들고서 주님 이 술을 마시지 않게 해주소서. 이 술에 취하지 않게 해 주소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거와 관련이 되고 접촉과도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3. 하지 말아야 말을 하는 (맹세)

5:4혹 누구든지 무심 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 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냐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

여기 보면 무심 중에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야 되겠습니까? ‘내가 만약 무심 중에 맹세를 한 그것이 죄가 된다라고 할 때에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 없다고 나와 있고요. 산상 수훈에서 주님은 맹세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5: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이렇게 사람들의 죄 중에 맹세가 들어 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버린 맹 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맹세해 놓고도 안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봐야 됩니다. 어떤 정치가도 어떤 양심가도 어떤 철학가도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을 보면 우리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되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3: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맹세 중에 거짓되지 않은 맹세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거짓 되는 것이지요. 성도들은 말을 할 때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해야 될 말은 해야 되는 것이고 하지 말아야 되는 말은 하지 말아야 되는데, 해야 될 말을 안 하고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할 때에 모임은 복잡해지고 시끄러워지고 증거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번째 속건제 죄의 항목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설하심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수 없이 크고 작고 간에 대부분 보면 실천을 못할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을 잘못 인식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무심 중에 했어도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경건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은 주님 앞에 실패만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사단보다 죄가 더 깊은 줄도 모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그럽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물었을 때에 하나님의 존재를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보다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걸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게 되고 주님께서 어떠한 분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자기가 지킬 수 없는데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지은 죄라 할 수 있습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4. 성물에 관한

5:14-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성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성물 자체는 우리 성경대로 거룩한 물건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성물 내지는 거룩한 것이라고 기록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 성물에 관한 구약에 실제적인 것은 신명기 16장과 같은 경우 구체적인 물건은 아니라도

16:16-17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알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되 공수로 보이지 말라 했습니다. 공수는 빈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하나님께 무슨 물건을 드리기를 원했지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물건이 성물입니다. 그래서 성물에 관한 죄는 이 죄가 관련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왜 명하셨을까요? 성경에는 남자들이 그 가정에 책임자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가족된 모든 자매들도 함께 그 축복에 참여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왜 공수로 보이지 말라 그랬느냐 하면 하나님이 일 년에 삼차 오기 전에 그 중간 과정에 하나님이 관여해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공수로 오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복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성물입니다. 만약 성물에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바로 레위기 5장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27장을 보시면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이번에는 땅의 십분의 일을 설명하셨습니다. 신명기 16:16절에서는 일 년에 삼차씩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보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 그랬지요. 그 다음에 레위기 27:30절에서는 땅의 십분 일은 여호와께 성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공수로 오지 않는다는 것은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들을 가져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기가 세 번 오기 때문에 세 번 오는 동안에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것들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절기는 일곱 개인데 왜 하나님이 세 번만 오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 세 개의 절기는 일곱 개가 사실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다시 신명기를 보시면 처음에 나온 절기가 무교절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과 바로 연결이 돼있습니다. 두 번째가 칠칠절입니다. 칠칠절은 초실절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나팔절과 속죄일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 보이라 하셨지만 이 세 번은 일곱 절기가 서로 연관이 되어있는 것을 생각 할 때 사실은 모든 절기와 관련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물에 관한 실패

성물을 잘 생각하면 앞에 나온 세 개와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 나온 죄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네 번째 성물에 관한 죄도 점점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사기를 보면 이 관련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증거에 실패를 했어요. 두 번째는 접촉에 실패를 했어요. 세 번째는 맹세에 실패를 했어요. 왜냐하면 사사기를 보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출애굽 시키신 것을 점점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증거에 관한 부분을 점점 상실해 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물질적인 욕구가 생겨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욕심이 생기니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흉내를 내기 시작하면서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잘못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을 잘 보면 이 속건제의 죄의 항목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드온 같은 훌륭한 사람도 나쁜 선례를 남겼습니다. 에봇을 만들어 가지고 우상이 되게 하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크게 죄에 빠지게 만드는 선례를 남겼지요. 훌륭한 하나님의 사사였지만 하나님 말씀 아닌 것을 남기므로 말미암아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 빠져서 하나님 말씀과 비슷하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에서 만약에 이것을 어떻게 교훈 받을 것인가? 많은 형제들이 이것을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으로 적용을 시킵니다. 성물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지요. 구원 받았으면서도 침례를 안 받는다던지 구원받았으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떡 떼는 일을 고의적으로 거절한다면 성도님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씀 그것이 거룩한 것이며 주님의 명령인데도 그것을 소홀히 하고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가 되겠습니다. 신약에서는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는 세 번 여호와께 보이라고 했습니다( 16:16-17, 23:4-17). 이것을 신약에서 교훈을 받으면 명백해지는 것이지요. 물론 주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 한분 한분과 함께 계시고 또 그 속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두시고 주님께서 그 가운데 임재해 계신 집단적인 증거에 몸을 보이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무교절을 보시면 유월절로 시작한 것을 결론짓는 것이 무교절입니다. 칠칠절은 초실절에서 연결된 것을 결론짓는 것이 칠칠절입니다. 칠칠절은 오순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칠칠은 안식일이 일곱 개이므로 칠칠 사십구이고 그 다음 안식 후 첫 날이 바로 오십일 째 되는 오순절입니다. 한자로 다섯 오(), 열흘 순()자입니다. 그러니까 오순(五句)은 열흘이 다섯 개란 뜻으로 오십이란 뜻입니다. 그 오순절의 출발이 무엇인가 하면 초실입니다.

그 다음에 초막절은 나팔절하고 속죄일하고 연결이 되며 마지막 결론되는 것이 초막절입니다. 이걸 보면 성물에 관한 세 가지와 일곱 절기가 모두 연결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교절을 생각할 때는 유월절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그 다음날부터 바로 무교절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무교절은 글자 그대로 누룩이 없는 절기지요. 이것을 사도바울은 어떻게 연결시켰는가 하면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로 삶과 연결시켰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유윌절과 무교절

고전 5:6-7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여기에 사도바울은 유월절 하고 무교절을 바로 연결시켰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유월절을 무교절로 인식을 했습니다. 무교절이라는 말에서 교()는 한자로 누룩 교 또는 누룩 효이며 발효할 때 효()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이 설명할 때는 누룩의 유무를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누룩이 없는 절기가 무교절이라면 유월절도 무교절임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의미상으로 무교절이라는 뜻이 누룩이 없는 절기라는 뜻이기 때문에 유월절도 누룩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이 이렇게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22:1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이걸 보면 유월절도 무교절임을 알 수가 있지요? 왜 유월절이 무교절이냐 하면 누룩이 없다는 의미에서는 무교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씀 하시기를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 한 것입니다. 무교절이 폭이 넓은 것입니다. 무교절이 유월절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무교절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무교절은 실제로 어느 기간을 가리키는 무교절이라는 용어가 하나가 있고 상태를 가리키는 무교절이라는 용어가 쓰이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죄를 누룩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유월절은 죄가 없고 무교절은 물론 죄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월절도 무교절이고 무교절도 유월절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죄가 없는 이유에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보이러 나오는 사람들이 무교절 날 오게 되지만 사실 이것은 죄와 관계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첫 번째 보이러 나올 때는 죄의 문제가 완벽하게 처리돼야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의 문제도 무교절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누룩이 없어야 되는 것이지요. 유월절도 무교절도 없어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에 출발은 누룩의 유무와 관계가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누룩이 있으면 유월절은 출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죄가 있으면 그 사람의 생애에서 유월절은 출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보이러 첫 번째 나오는 무교절은 그 사람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어야 된다는 것을 일러 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들도 바로 주님 앞에 나오는 첫 번째 영적인 의미로 무교절을 생각할 때는 죄 문제가 해결 됐음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이런 면에서 출발이라면 무교절은 과정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유월절만 두지 않고 무교절을 두셨는가? 유월절은 짧은 시간에 일어나고 진행되는 절기입니다. 무교절은 전()생애를 걸쳐 일어납니다. 유월절은 영적으로 구원받는 출발점이라면 무교절은 그 사람이 전 생애를 사는 거룩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 다 죄 문제가 해결돼야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유월절의 누룩이 없는 것이 무교절에 누룩이 없는 것과 연결이 돼야 되는 것이지요. 바울은 무교절이라고 하지 않고 유월절이라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성도님들의 출발을 점검한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죄 문제는 출발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런 여섯 가지 출교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고도 뻔뻔스럽게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출발을 가지고 점검을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여호와께 보이러 나올 때 이와 같이 이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반드시 출발로서의 누룩이 없었어야 되고 과정으로서의 누룩이 없어야 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하고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출발로써 누룩이 없는 자들뿐만 아니라 과정으로도 누룩이 없는 자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유월절은 구원이라면 무교절은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역 모임과 연결이 될 때는 이와 같이 삶 속에 죄가 드러나서 즉 고린도전서 5장과 같은 범죄가 있는 사람들은 영접이 안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이것은 주님의 증거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일 년에 세 번 보일 때 첫 번째 보이는 무교절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은 주님 나라 갈 때까지 늘 이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교절로서의 유월절의 생각 그 다음에 무교절로서의 무교절 두 개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는 출발로서의 죄 없음을 생각하고, 하나는 과정으로서의 죄 없음을 검증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칠칠절

두 번째는 아시는 것처럼 칠칠절입니다.

23:15-16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여기에서 오순절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오십일이 오순절이니까요. 신명기에서는 칠칠이라고 하였습니다. 칠칠이라는 것은 앞에 나오는 일곱 안식일을 세라는 의미가 있으며 오순절은 결과를 말한다면 칠칠절은 그 과정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이 무엇인가 하면 15절에 요제로 단을 가져온다고 하였습니다.

23:9-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이삭 즉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가져오되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 열납 되도록 흔들어 드리는 제사가 바로 요제입니다. 요제는 제사 드리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고 다음에 초실이라는 것은 그때 드리는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그 다음에 오순절은 이 초실과 요제를 가져온 날부터 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오십일이 출발되는 첫날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십일 째라고 하면 언제부터 오십일 째인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오순절은 초실을 가지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 요제를 드리는 날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오순절 칠칠절을 생각하면 칠칠이 시작 되는 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교절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유월절을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오순절을 생각할 때면 반드시 초실절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유일하게 그림자와 실체가 맞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를 보면 오순절이라고 말할 때에 오십일이 시작하는 출발점이 있겠지요. 그 출발점이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남자들이 여호와께 나올 때는 칠칠절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칠칠절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칠칠절이라는 출발점을 생각하는 데 그 출발점은 요제입니다. 요제를 가져오려면 최소한 오순절 날 오십일 전에 와야 되고 올 때는 처음 익은 곡식 단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지파가 가져오는지 모르지만 아마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해 대표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정하는 첫 번째 곡식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알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되지요. 어느 곡식이 먼저 들어왔다는 정보가 있어야 오순절이 계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처음 곡식이 언제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결과를 가지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날짜를 안 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곡식은 날짜대로 다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라야 곡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주의입니다.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실이 없으면 오순절이 없습니다. 곡식이 없으면 오순절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안 들어가면 오순절이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곡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곡식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어야 오순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순절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과 성령

레위기에서는 안 나타나지만 신약으로 가게 되면 이날 성령이 내려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오순절 날 내려왔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초실을 생각하지 않고는 상상 못하듯이 성령도 오순절 날 왔기 때문에 오순절 이전에 있는 무엇과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순절은 초실이었지요. 성령은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성령은 뗄래야 뗄 수 없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할 때는 오순절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오순절을 생각하면 반드시 초실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영적인 오순절을 생각하면 반드시 초실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요.

오순절 날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오순절 날은 처음 곡식이 나왔기 때문에 곡식을 먹으면 힘이 생기게 돼 있지요. 사실은 오순절 날은 힘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오순절 날 이후부터는 달라졌습니다. 왜 달라졌는가 하면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날은 그냥 오십일이 아닙니다. 기계적인 오십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은 무엇인가 처음 출발을 알리는 것이지요. 그 출발에 결과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초실이었습니다.

 

성령은 능력()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했는데 성령이 임했다고 말하는 것으로서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말에 걸맞은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이라는 것입니다.

1:8오직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부활은 부활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권능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님들은 삶을 통해 권능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입으로는 말하고 다니면서 온갖 죄를 다 짓고 말씀 아닌 것을 자기 혼자 다 하면서 구원받았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것은 증거가 아닙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에 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과 동시에 권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눈이 범죄 했을 때 눈을 빼라고 하셨는데 다른 말로 하면 통제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통제해야 하겠습니까?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권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손이 죄를 범하면 찍어버리라 그랬지요? 손을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통제하겠습니까?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발을 주님이 찍어 버리라 그랬지요? 어떻게 통제하겠습니까?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을 생각할 때 오순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출발점은 오순 절이 시작되는 첫 번째 날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초막절

초막절은 나팔절 하고 속죄일 하고 연결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칠윌 달입니다. 그래서 세 절기를 남자들이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 온다면 일곱 절기를 다 지켜야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은 성물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유대인들이 올바르게 행했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로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일곱 절기를 올바르게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 절기를 만드신 분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모두 몸된교회에 들어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다수는 거절했습니다. 물론 소수는 들어왔지요. 열두 제자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도 유대인들이지요.

성물에 관한 죄가 속건제에 네 번째 죄였습니다. 속건제가 회복되면 성물에 관해 회복이 되는 것도 알 수가 있지요. 그러면 에베소서 2:1절에 나오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허물은 곧 하나님의 정하신 성물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요.

2:12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것이 에베소 성도들의 구원받기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들이 구원받기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여호와의 금령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는

5:17-19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그는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부지중에 그릇 범한 허물을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이는 속건제니 그가 실로 여호와 앞에 범과함이니라

여기 보면 4장에 나오는 속죄제와 서술이 같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4장에서는 신분에 대한 것들을 지적했다면 5장에서는 실제로 행한 범과에 대해서 지적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보게 되면 바로 마태복음이 범과를 처리하는 복음인 것을 알 수가 있고 마가복음이 속죄제에 관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이 십자가에서 외치는 주님의 음성을 기록 할 때 마태와 마가는 똑같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허물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은 신분을 중심으로 처리한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마태복음, 마가복음)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하고 요한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외침 속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강도를 구원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자기의 영혼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포근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흉측한 것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을 보시면 아주 포근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끔찍하기보다 상당한 의미가 느껴지며 상당한 깊이가 느껴집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다 이루었다마치 무엇인가 주님이 뿌듯하게 무엇인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으로 표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마리아와 요한을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육신의 동생에게 부탁을 안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관계는 땅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늘과의 새로운 관계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태어난 새 생명의 관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분위기가 상당히 살벌하고 엄하게 느껴집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서 엘리라고 하는 외침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를 낭송하는 선율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슬픈 선율이라고 합니다.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성령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처참하게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았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지만 주님은 한 번도 사람들을 원망하시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을 보면 마태, 마가복음은 사람들이 못 박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이 못 박은 것으로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누구의 심판인 가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이었습니다. 주님의 외침이 누구를 향한 외침인가를 보면 주님이 당한 심판이 누구의 심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은 유대인들이 못 박았다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주님의 생각은 아버지 하나님의 버리신 것을 외침을 통해서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못 박았지만 주님의 인정은 유대인들이 못 박은 것 이면에 하나님 아버지가 버리신 것에 대한 외침이며 이것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나라는 외침입니다.

이 외침이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에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속건제에 관한 모습이고, 하나는 속죄제에 관한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외침은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물과 죄 모두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처리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들으면 치유가 됩니다. 이런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치유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 번 들어서 치유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기록이지만 똑같은 소리이지만 무엇을 듣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속건제의 첫 번째 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 한 것입니다.

?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 하는가? 어떤 사람은 성장하는데 어떤 사람은 성장하지 못하는가? 이것이 바로 속건제 의미의 첫 번째 이유지요. 이걸 가장 잘 듣는 것으로 본을 보이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본이 되셨으며 이렇게 해서 우리의 문제점을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 여호와의 금령 하나를 범함

다섯 번째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안 나와 있지만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를 범했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와 연관성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죄를 범한 허물 자체를 마지막 절에 범과라고 했고 4장에서는 범과라고 해도 범과한 사람의 신분을 중심으로 따져서 처리를 하였습니다. 5장에서는 누가 죄를 범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범죄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이고 4장에서는 범하되 누가 범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2:1]에서 나타내는 허물과 죄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가 회복이 되면 그 사람의 신분이 회복이 되는 것이고, 허물이 회복이 되면 그 사람에게 돌아갈 정계나 벌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 한 것을 부지중에 했을 때 생겨난 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속죄제와 속건제가 서로 동전에 앞 뒤 같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거꾸로 말을 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처럼 속죄를 먼저 말하고 속건을 나중에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무를 볼 때 그 열매를 안 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죄하고 허물의 관계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은 열매를 안 보셔도 나무를 아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열매를 안 보면 나무를 반증을 못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거룩한 것처럼 가장하면 사람들은 속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허물이 안 나오면 좋은 나무일거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7: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러면 그 원리를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걸어가실 때 주님의 행동 속에는 죄가 한 번도 나오질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실 때나 삼십년 동안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나 그리고 공생애 동안에나 그리고 심판받을 때나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실 때까지 주님은 한 번도 죄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수 없이 나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구나. 그러니까 죄가 나오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아무 조치를 안 취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가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가인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죄를 짓고 나서 조치를 안 취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요일 3:12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여기에서 속으시면 안 됩니다. 그 아우인 아벨의 그 행위 자체가 그냥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아벨이 하는 일은 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면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지요.

4: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의 잘못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선택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어요.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가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셨으면 가인은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께 여쭈어야 했는데 가인은 화를 냈습니다.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들이지요. 종교의 재미있는 것이 여러 가지입니다만 믿음을 놓고 종교를 정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께로 접근하고자 하는 모든 방법론은 종교입니다. 그 종교의 선봉에 가인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안 받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요한일서의 권면이 뭔가 하면 죄를 자복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가인의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죄를 시 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회복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떠나갔으면 자기가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인하지 않고 화를 내고 안색이 변하면 그 사람은 주님의 증거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은혜롭게도 주님이 안 받으신다는 대답을 주신 것이지요. 주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사랑입니다. 주님이 가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인의 제물은 안 받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가인은 자기 죄를 자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뭐가 잘못 되었는지를 물어야 해결이 됩니다. 이것은 가인이 얼마나 완고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가 어떤가를 보이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죄는 점점 더 발전합니다. 가인은 금방 살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살인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왜 분을 내야 되느냐? 안색이 왜 변하느냐? 하시면서 주님은 물어보시고 문제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이 친절하십니까? 얼마나 주님이 사랑이십니까? 하지만 가인은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이 어려워도 한 가지 분명한 원리는 죄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가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면 아벨처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스리는 힘이 아벨에게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인에게 네가 죄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화를 내고 안색이 변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것에 대하여 응답을 하셨고 두 번째는 순종해야 할 말씀을 직접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인이 안 들은 것입니다. 종교는 이러한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특징은 완고해 지는 것이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무서운 종교가 유대교였습니다. 이방종교는 금방 우상인 것을 알지만 유대교는 성경을 통해서 출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못됐다고 끔에도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면서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안 느끼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가인이 바로 그런 종교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절하는 은혜를 베풀어도 그것을 못 받아들이고 방법을 제시해도 못 받아들이는 가인을 봅니다. 7절까지의 방법이 가인에게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책임이겠습니까? 성경은 절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으로 가인의 책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래도 참으시는 것이지요. 열매를 맺는 것을 주님이 보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이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지만 이 가인의 후손들은 노아홍수 때 전부다 죽었습니다. 한 사람도 못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가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언 젠가는 전부다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종교화 되어도 성도님들은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가인의 길에 대하여 교훈을 받아야 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을 보고 교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 낮아질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주님 앞에 낮아져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에 8절과 9절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악을 행합니다. 불의가 의를 밀어내고 차지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는 면이 있고, 외형적으로 불의가 의를 심판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사라졌다고 생각 하겠지요. 성도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주님이 현재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살펴본 바와 같이 가인은 하나님의 권면을 받고도 거절했던 것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성도들의 회복도 권면이 통해야 되는 것이지요. 말씀의 권면이 통해야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안 통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부지중에 범하는 것이 허물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이 무심결에 바깥으로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건 제물로서의 제물을 우리들이 믿음으로 받으면 회복이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 보통이 아닐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방법대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모임에는 문제가 항상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를 주님의 말씀대로 처리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회복이 되는 것이지요. 가볍게 봐서는 안 되지만 가인을 통해서 교훈을 받게 될 때 가인은 회개를 거절한 사람입니다.

레위기 6:1-7절에 나오는 것은 약 네 가지로써 이것은 실제적으로 현행 절도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 까지는 사람들의 물건인데 반해서 다섯 번째는 여호와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것도 부지중에 범했을 때 속건제를 처리하고 사람에 대해서도 처리합니다.

네 번째 죄에서 보면 오분의 일을 더하면 속건되는 방법이 있으며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는 서로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로 묶어도 되지만 성령이 이것을 나누어서 설명했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열 가지 정도로 항목을 잡았습니다. 그 다음에 네 가지 죄에는 실제로 어떤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 하거나, 늑봉하고도 하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6. 남의 물건을 맡거나

옛날에 은행같이 돈을 맡길 곳이 없을 때는 귀중한 물품이나 동물들을 이웃에게 맡기는 관습이 있었답니다. 이렇게 남의 물건을 맡았다가 물건을 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기에 해당한 것입니다.

 

7. 전당잡거나

전당잡아도 자기가 너무 유리하게 하고 전당잡히는 사람이 불리하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빚을 져가지고 돈을 못 받을 때 옷을 전당 잡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해가져도 안 돌려주면 그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주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8. 강도질 하거나

이것은 강제로 주인의 허락 없이 가져가는 것이고 이렇게 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9.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레위기 6:3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것”, 즉 물건을 습득하고도 그 습득한 사실을 부인하면 이것도 죄에 해당합니다. 보통 레위기 6:1-3절에 나오는 죄들은 일반적으로 믿는 성도들은 잘 범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안 범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4: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어떤 분들은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성도끼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폭은 훨씬 더 넓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을 버리는 것이 성경적이지요.

4: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분을 내는 것은 허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분은 내되 반드시 절제가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분은 의분(義慣)”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분이라도 지나치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분도 너무 길면 안 되는 것이지요. 사실 가인은 분을 낸 후 자기가 잘못 했다고 주님 앞에 회개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분을 내고 그만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화()는 안 좋은 것입니다. 화에 대해서는 형제를 향해서 라가라 하는 욕을 할 때 지옥 죄의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분() 속에 살인을 봤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분을 내는 존재가 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분하고 살인이 연결되는 것이지요. 분내는 것이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분은 그 사람의 본질(本質)을 드러내는 죄()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분()을 허락한 것도 어떻게 보면 의분(義憤)이기는 해도 우리 속에 죄의 성질이 있음을 주님께서 인정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절제해서 분()을 확대시켜서 더 이상 죄로 연결시키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자세(姿勢)입니다.

()은 그 날 해결해야 합니다. 그 시기는 그 날 분낸 것은 반드시 그날 정리해야 합니다. 앞선 형님들은 절대로 분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을 합니다. 건강에 몹시 해롭답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회개하고 해결하라는 것이지요.

11: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그리고 주님이 기도를 교훈하실 때 기도하다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용서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용서하는 일에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주님께서 기도할 때 용서하라는 것을 보면 기도하는 그 순간에 용서가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간에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주님 앞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물론 그 사람에게 가야 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이 기도를 할 때 용서를 먼저 하고 그것을 마음속에 두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갚기는 해야 되는 것이지요. 주님 앞에서 그 것을 그대로 품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4: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이것을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를 범하게 되면 마귀가 틈을 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귀의 특징은 변명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순전하지 못하면 변명을 하게 되지요. 그것은 아주 나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이런 순전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아주 나쁜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 간에 성도들은 순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4:28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에베소 성도님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성도들은 죄를 범하되 습관적인 죄를 범치 않는 특징이 있다고 형제님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습관적인 죄를 안 짓는다 하더라도 한 번씩 죄에 빠질 수는 있는 것이지요. 이런 죄는 주님 앞에 자백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죄가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로서 습관적인 죄가 아닌 일회성이거나 횟수가 더 되더라도 습관적이지 않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28절을 보면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님들은 이런 일을 안 하겠지만 가능성이 있음을 보이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이전에 도둑질하는 손이 이제는 회개해서 남을 돕기 위한 일을 하는데 손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의의 병기가 된 것이지요. 구원받기 전에는 불의의 병기로 쓰던 것이 구원받은 후에는 의의병기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은 여섯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의 죄는 분명히 구원받은 성도님들이 습관적으로는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위험에 빠질 수는 있지요. 성도들 가운데도 혹시 약해져서 지속적이지는 않지만 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주님께서 여기에서 하신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 이런 죄의 성질 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구원받아도 성도들 속에는 여전히 죄의 성질이 남아 있으므로 이것을 부축이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지요.

 

죄를 범하지 않는 방법

우리들은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몸이지만 그 사람의 몸을 주님이 지속적으로 쓰게 되면 절대로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합니다. 완벽하게 죄를 범하지 않는 방법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주님이 우리를 쓰시도록 온전히 내어드리면 사탄은 손을 못 대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마음과 생각을 절제 할 수 있거나 통제할 수 있는 그 사람은 죄가 틈을 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지요.

그러나 마음과 생각을 통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죄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대충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안 보거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마음 속에 안 새기고 삶에 적용시키지 않으면 그 성도는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입니다. 먼저 되신 형제님들은 우리들에게 권면을 하시지요. 항상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라고! 어떤 형제님은 읽은 말씀이 삶에 적용될 때까지 계속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제는 그만 됐다는 생각을 절대 갖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에게 모임 안에서 육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유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에서부터 주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을 주님께 드려서 그 생각이 그 사람의 몸을 육신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원천적으로 봉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하고 그 일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거의 범죄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실수는 있지만 바울의 경우는 아마 주님과의 교제가 깊었고 말씀이 늘 마음속에 있었으며 늘 주님과의 교통 가운데 복음과 교회 진리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속에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생각이 바울의 옴과 행동을 인도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에 성도들 가운데 그런 마음을 갖고 기도하시게 되면 분명히 주님이 오실 때까지 또는 우리가 숨을 거둘 때까지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충성스러운 증거를 할 것입니다. 먼저 되신 형제들의 권면은 성도들의 믿음생활은 마라톤이라고 합니다. 단거리 경주같이 반짝 열심을 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거리 경주 같은 삶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마음과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말씀을 안 읽으면 그 성도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10. 거짓으로 맹세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 분실한 물건을 취득 하고도 모른 체하는

이렇게 해서 아홉 가지에서 열 가지의 속건제가 나옵니다. 이것은 전부다 실제적인 현행의 범죄입니다. 속죄제는 모르고 하지만 속건제는 대부분이 압니다. 예를 들어서 거짓말 하는 증거를 들었는데 그것에 대해 말을 안 하는 것이지요. 그 것은 어떤 행위입니까? 자기 의지를 가지고 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건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또 다른 결말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결말입니다. 속건제의 결말에서 아름다운 결말이 6:4절에서 마지막 까지를 보면 만약에 내가 물건을 훔쳤으면 훔친 것을 반드시 그대로 변상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그 변상에다가 20%, 5분의 1을 더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취하지 않은 것도 물어준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거기다가 더해서 물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것을 훔쳤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을 원상으로 돌려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돌려 드릴 때 속건제는 그냥 돌려드리면 안 됩니다. 5분의 1을 더해서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뭔가를 잃었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회복이 될 때에 더해진 것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회복에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지 않고 있었으면 이 땅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만 하나님께서 가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속건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하늘의 백성이 생겼습니다.

바로 이것이 몸된교회입니다. 이것이 속건제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죄에 관한 질책이지만 마지막에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은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건제의 결과물로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죄에서 회복되기

그 죄에 대한 심각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를 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님 편에서는 어떤 결과가 생기고, 사람 편에는 어떠한 결과가 생기는지, 그리고 이것은 회복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결론은 회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복의 출발은 5:5절을 보면 이런 처참한 하나님의 것이 도적질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속건제를 통한 속건의 허물의 회복입니다. 그러면 의가 회복 되는 것입니다.

5:5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自服)하고첫 번째는 자복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자복(自服)이란 범죄(犯罪) 사실(事實)을 스스로 고백(告白)하고 항복(降伏)함 또는 복종(服從)함을 뜻합니다.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自服)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일 1: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5:6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두 번째는 그 죄과(罪過)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어린양과 염소를 드리라고 했는데 번제는 수컷만 됩니다만 속건제는 암컷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암 컷은 수동적이지요. 다른 말로하면 이것은 자기가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자복(自服)이 따라야 되고, 두 번째는 희생 제물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즉 속건제의 의의 출발입니다. 세 번째는 그 희생 제물을 여호와 앞으로 가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위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속건제 기능을 생각하면 그냥 십자가가 아니라 그 십자가는 여호와 앞에서 드려진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좋은 출발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5:1-13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2 누구든지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들 무릇 부정한 것을 만졌으면 부지중에라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3 혹시 부지중에 사람의 부정에 다닥쳤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이요 4 혹 누구든지 무심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 5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고 6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7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8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9 그 속죄제물의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범과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11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12 그것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기념물로 한 움큼을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속죄제라 13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

속건제는 그 사람의 죄가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바깥으로 죄가 나오려면 그 안에 죄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실 때는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그리하였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그랬습니다. 주님께서는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나쁜 열매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지요. 우리에게는 속건제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허물이 나타났습니다. 허물이 나타나는 배경이 있는 것이지요. 그 안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건제의 회복을 다룰 때 속죄제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허물만 처리 돼서는 그 허물이 나오는 근본의 인식이 약해지기 때문에 성령은 이미 그림자에서도 속건제하고 속죄제의 연관성을 깊이 연관 시켰음을 알 수가 있고 나중에 복음서가 기록될 때 구분은 하면서도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을 나타냈음을 알 수가 있지요.

그래서 나중에 사도바울도 에베소서 2장을 쓸 때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언급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허물을 먼저 언급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보통 성도들도 죄라고 말할 때는 자기 속에 있는 죄는 나중에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속에 있는 죄는 금방 인식하지 못해요.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통해서 죄를 인식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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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