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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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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8. 15:10 횃불/1996년

잊혀진 명령-거룩하라

월리암 맥도날드

9: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

문제는 신자들에게 합당한 품행은 무엇인가?”이다.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활동은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른 것인가? 성경은 신자들이 하늘의 소명에 따라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일반적인 개요를 말하고 있다. 성경은 많은 질문들에 직접적으로 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혼돈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성경은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6:14). 신자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되며 사업을 함께(동업)하거나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불신자들을 동참시켜서는 안된다. 이러한 것을 위해서는 기도하거나 상담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답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수백 가지의 상황들이 있다. 만일 성경이 삶에 대한 것을 하나하나 다 다루었다고 하면 성경이 너무 커서 아마 가지고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련의 원리들을 주셨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내가 이것을 해도 괜찮은가?”라고 그 원리 하나 하나를 적용해보는 것이다. 이와같은 방법을 통하여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으리라고 본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에 문제의 정보를 입력하고 거기에 맞는 통제키를 움직여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 같다. 여기에 몇가지 질문의 원리들이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가?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는 어떤 해가 없을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일인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원리를 전해주었는데 그 원리는 의식주까지도 적용된다(고전 10:31), 유명한 전도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의 아내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설거지를 한다. 그녀가 설거지를 하는 씽크대 위에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가 매일 세번씩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어떤 영광스러운 일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질 수 있다. 비록 주를 믿는 노예라 할지라도 그는 들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람에게 하듯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하듯농사일을 할 수 있다( 6:57).

세상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정직하지 못한 일, 깨끗치 못한 일, 의롭지 못한 일 또는 의문스러운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에 관여하면서 주여 제가 하려는 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속적인 것은 아닌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과 방법, 음악, 예술, 종교 그리고 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영 보다는 육, 즉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보다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17:16). 세상은 아직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4:4, 요일 2:15).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그는 세속적인 그의 마음 안에 성령님이 주신 직관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은혜 안에 자라가면서 그 직관은 점점 예민해지게 된다. 한 그리스도인이 TV를 주문했는데 그 TV를 싣고 온 차에 온 세상을 당신의 안방에라는 광고가 쓰여있는 것을 보고 그는 그 TV를 다시 돌려보냈다.

 

예수님 같으면 이 일을 하셨겠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그를 따라오도록 본이 되는 삶을 사셨다(벧전 2:21). 그러므로 우리의 품행의 모든 분야에 이 질문을 적용해보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몇 년 전 찰스 첼돈(Charles Sheldon)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매일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그의 자취라는 책을 썼다. 결과는 과히 혁명적이었다. 어떤이들은 예수님께서도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고 말한다( 2:15,16).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실 때에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 신실하셨다. 그분은 절대로 그들의 죄를 묵과하거나 그분의 삶을 타협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만일 그들의 죄를 입증하고( 5:11) 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부도덕한 사람들과 함께 먹을 수 있다( 1:14). “이 땅에서 살아가신 그리스도의 본이 거룩에 대한 하나의 표준만 되어서는 안된다”(R. C 채프만).

 

당신이 그 일을 하고 있다가 주님이 오셔도 좋은가?

주님께서 오실 때를 아는 사람은 없다. 주님은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 사도요한은 그분의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요일 2:28). 만일 그분이 오실 때 우리가 의심스러운 일이나 음란 영화, 음란 서적 등 육체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하다 발견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분이 우리에게 너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라고 물으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주를 부인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는 소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살게하는 촉진제가 된다(요일 3:3). 그러나 진리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진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 실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딤후 4:8) 그 소망으로 인하여 준비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어떤 신분에 맞는 것인가?

다른 장에서 두 성품에 대해 더 깊게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해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모든 신자는 옛성품과 새성품을 가지고 있다. 옛성품은 아주 악하고 새성품은 말할 수 없이 선하다. 이 두 성품은 지속적으로 서로를 향하여 대적하고 있는데 우리가 많이 먹이는 성품이 이긴다. 우리는 우리가 듣고 보고 행하고 가는 곳, 그리고 사귀는 친구와 생각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 성품을 먹인다. 우리는 늑대를 먹이고 양은 굶기면서 양이 이기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당신의 몸이 성령의 전이란 것을 생각할 때도 기꺼이 그것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이 구원받을 때 성령께서 영구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 거하신다(고전 6:19). 삼위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그분이 거할 거룩한 곳, 즉 성전으로 보신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 몸이 거룩한 곳, 즉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이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성적 부도덕이나 곡식 또는 술취함 같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담배와 마약같은 암적인 것들이 몸을 주장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합당한 건강의 원리를 따르며 주를 위하여 몸을 잘 관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행동인가?

우리는 다 왕자들로서 우리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5:8, 1:10). 프랑스의 루이 16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단순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한 악한 여인이 그에게 더러운 말을 가르치려고 했을 때 이 어린 왕자는 주먹을 쥐고 발을 구르면서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어. 그런 더러운 말은 하지 않을거야. 나는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을거야!”라고 말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도랑의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을 보면 마음 아파할 지는 모르지만 놀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 인생 낙오자처럼 사는 것을 보면 놀란다. 우리는 대통령의 아들이 그렇게 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들은 자기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리라고 기대한다.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을 보면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줄 알았는데····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같은 죄를 습관처럼 범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것을 보면 놀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래야 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나은 삶을 기대해야 하며 그리스도인 또한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돈을 사용하는 일이라면 더 가치있게 사용될 수는 없는가?

사람이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좋은 것이 있고 더 나은 것이 있으며 또한 가장 좋은 것이 있다. 우리는 최고의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좋은 것이 때로는 가장 좋은 것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죄짓는 것은 아니지만 하찮은 것이나 일시적인 것, 그리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돈을 쏟아 부을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돈을 사용하여 영광의 문에서 환영을 받을 수도 있다( 16:9). 이 원리는 신자들이 쓰는 모든 돈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눈을 열어서 그들이 하나님과 영원을 위하여 돈을 쓰게 될 때 얼마나 엄청난 일을 이를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더 낫게 사용할 수 있지 않는가?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도 어떤 법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영광가운데서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루 2신시간이 맡겨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선을 위해서도, 느리고 악을 위해서도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낭비될 수도 있다. 우리는 선한 청지기로서 시간을 아껴야 하는데( 5:16) 이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우선순위에 있어 하찮은 모든 행동이나 활동을 삭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떤 초청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기도하거나 말씀 전하는 일을 위하여 직장에 나가는 시간을 줄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사회나 가정의 모임보다는 교회의 모임이 우선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한 신실한 결정은 사역의 영역을 넓혀준다.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삶에 있어 어떤 행동들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있다.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 자체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형제를 거치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면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주목하라.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13).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15).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어지게 말라”(20). 그리고 고린도전서 8:913에서는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바울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덕을 생각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원칙(원리)은 그들의 덕을 세우는 것인데 이는 그들을 영적으로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짐을 지우면서까지 즐기는 우리의 자유는 그 자신에게도 사실은 덕이 될 수 없다”(W. E 바인).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순한 술을 적당히 마실 수 있다 해도 주님 안에 있는 형제를 슬프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권리를 포기하는게 더 낫다. 찰스 핫돈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이 애연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 중에 하나였지만 자신의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하여 변호하였는데, 하루는 광고판에 스펼젼이 피우는 담배를 피우자라는 광고가 있는 것을 보고 담배 피우는 것을 중단하였다.

 

의심스러운 것인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14 :23). 이 말씀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나 본질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하면 죄라는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것은 전혀 나쁘지 않고 또 그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양심에 분명치 않고 또 그것을 믿음으로 하지 않거나 합법적이라는 양심의 확신이 없는데도 한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때로 그것의 흑백을 분명히 가리기가 어렵다. 이에 대한 법칙은 의심이 간다면 더러운 것이다이다.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들에 대한 법칙을 받아들이라. “의심스러운 것은 해서는 안된다.”

 

악의 모양은 없는가?

데살로니가전서 5:22을 공인된 사본 그대로 읽으면 악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버리라이다. 현대의 역본들은 거의가 동일하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구역본들도 잘못된 것은 아니고 그 기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한적한 산길을 산책하면서도 전혀 성적인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는 있다. 주일학교 교사가 술집에 들어가 음료수를 마실 수도 있지만 그가 술집에 들어간 것을 우연히 본 주일학생을 설득시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짐스러운 것은 아닌가?

죄와 짐은 조금 다르다. 죄는 언제나 그른 것이지만 짐은 그릇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방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한다( 12:1). 올림픽 경기에는 준수해야 할 규칙이 있다. 만일 선수가 그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실격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기 선수에게 5kg 나가는 셔츠를 입지 말라는 규정은 없다. 입을 수는 있겠지만 입는다면 달리기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10:33)라고 말할 때 무게를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달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경주하는데 있어 짐은 무엇인가? 신령하지 못한 친구 관계, 시간만 낭비하는 직업, 지나친 취미생활, 지나친 운동, 무분별하고 지나친 TV 시청 등,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경주에서 승리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사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떤 활동이든지 짐이 될 수 있다.

 

구속적인 것은 아닌가?

어떤 것은 합법적이면서도 우리를 얽어매므로 피해야 할 것들이 있다. 사도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6:12)고 말했다. 그는 그 자체로 볼 때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속할 때는 잘못된 것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음식이나 음료에 매이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 마약이나 스포츠 그리고 TV도 더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 것인가?

어떤 이는 그리스도인의 품행에 있어 가장 좋은 점검은 그리스도의 눈에 그것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분이 지지하실까? 우리 옆에 앉아 계신다면 부끄럽지 않을까? 사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옛 흑인 영가는 주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보시며,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시네, 주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네라고 말하고 있다. 거룩하신 구세주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덕적인 문제를 결정하는데에 필요한 원리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기억하여 적용할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거룩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는 크게 흔들릴 때가 있다. 우리는 승리하거나 아니면 패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죄들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속적인 부흥을 원한다. 우리는 모두 원하기만 한다면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1996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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