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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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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4. 11:15 횃불/1996년

부모와 우선순위 (2)

A. J. 히긴즈

자유롭게 놓아주기

우리가 직면해야 할 가장 어려운 과제는 아마도, 자녀들에게 독립을 부여함으로써 자유롭게 하도록 놓아주는 일일 것입니다.  자녀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이 왜 그처럼 어려운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유대 관계를 강화해야 하는 문제는 오늘날 많이 강조되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병원의 분만실이 아빠에게도 개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 관계를 강화하는 일은 매우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또 필수적입니다. 반면에 자녀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자유롭게 놓아준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자녀를 세상으로 내모는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부모 노릇의 궁극적인 목표인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도하는 가운데 자녀를 양육하여 세상에서 자립하도록 돕는 것. 이것은 비정(非情)이 아니라 온정(溫情)이며, 실수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것은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며, 매우 실제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요청을 받았을 때에도 조력과 조언을 거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강요나 간섭 혹은 죄의식을 이용하여 자녀와 그 가족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그치라는 뜻입니다. 부모들과 친인척들은 요청을 받지 않는 한 자녀들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고 오히려 성인으로서의 자치권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그들을 합당한 성인으로 잘 양육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의 기준을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企業)입니다( 127:3). 자식은 하나님을 위해 양육하라고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한나의 심령을 깊이 들이마셔야 합니다. 사무엘은 그녀의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의 소유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사무엘을 다시 돌려드렸던 것입니다 자녀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양육해야 할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특권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어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청지기 직분에 대해서는 충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청지기 직분이 완료되면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려 보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그 원칙을 살펴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 가슴 속에 가장 소중했던 대상을 하나님께 돌려드림으로써 자기 것이 아닌 하나님 것이 되게 했습니다.

신명기 32:10,11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우하심이 다음과 같이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가르치시며 보호하시며····” (우리말 성경에는 가르치시며보호하시며 로 나와 있음-역주). 이것은 지금까지 각 장()에서 논의된 사항들과 잘 상응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그처럼 온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한가지를 더 가르치시고자 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11). 이것은 어떠한 그림입니까?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독립시키려고 준비시키는 그림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생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성숙하고 훌륭한 결정을 내리면서 그 땅에서 살아가도록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우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온전히 장성해지도록 끊임없이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유대 관계를 끊는다는 뜻이 아니라 유아기의 관계를, 훨씬 더 만족스럽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관계로 대체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국가가 한 때 사기 영토 내지 식민지였던 곳을 독립시킬 때 이것은 모든 유대를 다 끊어버린다는 뜻이 아리라 필수적이고 귀중한 것은 존속시키고 보강시키는 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것은 제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부모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살도록 그들을 잠시 동안 우리에게 의탁하여 양육케 한 다음,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자유롭게 놓아주기가 그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들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메아리를 치는지 잠시 동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18년 이상 양육하고 나면 우리는 그 자녀에게 엄청난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뭔가를 잃어 버린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본능은 자동적으로 이것을 싫어합니다. 자녀를 독립시키는 일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개성이 자녀 속에 너무 잘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우리에게 반사되고 우리는 종종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선택 사항에 대하여 더 이상 명령하거나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모들은 부모와 자식간의 고삐를 더욱 꽉 잡아 당기기 시작하지만 이것은 갈등을 야기시킬 따름이며, 최악의 경우 반항을 초래합니다. 성장과정에서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해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통제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은 비극적인 대결을 초래 합니다.

비록 바울은 육신의 자녀는 없었을지라도 자기가 양육한 영적 자녀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혜와 덕성을 가지고 대했으며, 그 실례로 디도와 디모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상응한 인정(認定)과 신뢰를 표현하면서 그들에게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없을 때에도 제 구실을 다 할 수 있는 자녀들을 양육했던것입니다.

자유롭게 놓아주기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때가 되자 그 탕자는 성년이 되었고 자신의 독립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때 그 아버지가 아무리 궁극적인 기쁨을 내다보았다 할지라도 자유롭게 놓아주는일에는 일시적인 슬픔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선악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과거 내내 그 아버지가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 훈련이 테스트를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탕자에게 자유를 허락했다고 해서 잃은 것은, 잠 못 이루는 며칠 밤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에 가서 아버지는 훨씬 더 견고하고 가치있는 부자지간의 관계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께로 나아온 세베대의 아내는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에 대하여 아마 그 전에 가족끼리 미리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경배와 간구의 태도로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녀의 요청은 간단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두 아들을 주님 나라에서 특별히 주님 옆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선한 의도, 즉 자기 아들들에 대하여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주님의 책망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영적인 소원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굴복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도 자기 아들(?)을 지배하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그녀는 아마, 이제는 주님이 하나님의 권능이나 하나님의 신임장을 백성들에게 드러내야 할 때라고 생각했음인지, 주님의 행동을 지시하려 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그녀가 다른 자식들과 더불어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주님의 일을 방해한 적이 있습니다( 3:3134). 그분은 어렸을 적에 자기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2:51). 그분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모친을 공경하셨습니다( 19:252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모친이 자기를 지배하도록 용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어렸을 적에는 하나님의 뜻이, 그분이 자기 부모한테 순종하는 것이었지만 그분이 성인이 되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마리아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분의 도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지 마리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반은 자기 딸들을 야곱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뭔가를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31). 그래서 그는 뭔가를 되돌려 받으려고 그들을 쫓아갔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제지시켰습니다( 31:2629).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우리가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명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행동으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투자한 세월은 독립을 향한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자녀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주어지고 또 그것이 성취될수록, 자녀들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질수록, 자녀들의 생각이 더욱 성숙해질수록,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들을 단순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숙하고 독립된 개체가 드디어 이루어졌구나 하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연령의 문제라기 보다 오히려 표현되는 품성의 문제입니다.

필자는 딸 아이 하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아이가 자전거를 놓지 말아 달라고 계속 요구하는 동안 필자는 자전거를 붙잡고 같이 뛰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전거를 놓아줘도 좋은 때가 이르자 자전거를 붙잡았던 손은 놓았지만 필자는 그 아이 옆에서 계속 함께 뛰었습니다. 얼마 후에 필자는 그 뛰는 것조차 멈췄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스스로 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 아이는 자전거를 혼자서 타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혹 그 아이가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다치면 어쩌나 싶어 필자가 그 현장에 여전히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자전거는 그 아이의 손에 있었습니다. 필자는 가능한한 모든 것을 도와 주었고 지도해 준 것이 사실이나 목적과 진로와 속도는 이제 그 아이에게 달려 있었던 멋입니다.

우리 모든 부모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확립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므로, 우리의 자녀들이 분모들로부터 지배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고자 노력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풍성한 유산을 누리면서 하나님플 위해 준비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1996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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