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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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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6. 09:17 횃불/1996년

잊혀진 명령-거룩하라

 

10: 사실을 바로 이해함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데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 진리들이 몇가지 있는데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새 성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7:1425).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악하고 부패한 옛성품이요 다른 하나는 구원받을 때 받은 거룩하고 깨끗한 새성품이다. 우리는 그것을 아담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죄는 내 마음에서 나갔지만 할아버지가 아직 뼈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옛성품은 전적으로 악하다. 바울의 경험이 곧 우리의 경험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7:1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옛성품 안에서 선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되며 선한 것이 없음을 발견할 때 놀라거나 낙심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옛성품은 전적으로 악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악하다. 이 옛성품은 오랫동안 거룩한 삶을 산 사람이라도 이제 갓 태어난 아이보다 낫지 못하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옛성품을 개선시키려 하지 않으신다. 그는 이 옛성품을 갈보리 동산 십자가에서 정죄하시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려는 것에서 우리나 죽은 자 되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옛성품을 그의 등뒤에 짊어진 죽은 시체로 비유했다. (물론 시체는 썩어서 고약한 냄새를 냈다). 그 시체는 그가 가는 곳마다 등뒤에 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였다.

새성품은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선하다. 그리고 오직 선을 행하기에만 능하다. 이 새성품은 청결하고 고귀하며 의롭고, 사랑스러우며 또한 진실하다. 새성품의 모든 생각과 소욕, 동기 그리고 행동은 다 그리스도를 닳았다. 이 서로 다른 두 성품이 지속적으로 서로 투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둘은 절대로 서로 화평 가운데 살 수가 없다). 이 투쟁은 거듭날 때부터 시작된다. 새신자는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내적 투쟁을 경험하게 된다. 옛성품은 중력의 법칙처럼 그를 끌어내리기를 원하고 새성품은 그를 높은 거룩의 경지에 올려놓기를 원한다. 이 두 성품의 싸움은 아주 치열해서 때로 신자는 그의 구원을 의심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의심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은 그가 그러한 투쟁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만일 그가 두 성품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투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두 성품의 싸움을 리브가의 태속에서 싸우는 두 아이로 비교하기도 하는데 그녀는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라고 외쳤다. 리브가의 태속에서 일어났던 일이 하나님과 함께 나가기를 원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는 동시에 배교자의 임재를 느낀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왜 이런가?’라고 탄식하는 경향이 있다. 늙은 형제 육이 그의 길을 가기 원하는 것이다. 젊은 형제 영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거친 늙은 형제를 이길 수 없을 것같아 보인다. 그러나 리브가의 아이들처럼 장자가 차자를 섬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에서 나온 모든 것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번 하우스)

중생할 때 시작된 싸움은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갈 동안 계속된다. 이 싸움은 휴거되거나 죽기 전에는 피할 우 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쁜 소식은 우리가 주님을 볼 때 우리는 이 옛성품을 떠나 주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가 다 이와 같은 투쟁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우리들에게 당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13). 청년들은 청년의 정욕에 시달리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목회자 또는 선교사들에게는 그와 같은 어둡고 불같은 시험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리브가의 뱃속에서 두 아이가 싸운 것처럼( 25:22,23) 모든 신자들은 다 그 안에 서로 싸우는 두 성품을 가지고 있다. 새성품은 청결하고 거룩한 것을 구하는데 비해 옛성품은 무엇이든 청결하지 못한 것을 좋아한다 이 둘은 마치 노아가 방주에서 날려보낸 비둘기와 까마귀같다. 까마귀는 홍수로 인해 죽은 온갖 더러운 것을 먹었다. 그러나 비둘기는 깨끗한 장소와 먹이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는 방주로 다시 돌아왔다( 8:612). 옛성품은 할리우드의 음란한 것들이다. 음란 TV프로로 그 배를 채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새성품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좋아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먹이는 성품이 이긴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항상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그의 개에 대해 불평했다. 그의 친구가 그에게 어떤 개가 이기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물어라고 말한 개가 이긴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두 성품도 이와 같다. 우리가 물라고 말한 성품이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뻐꾸기의 경우를 통해서도 그 예를 들 수 있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집에다 알을 낳아 그 새로 하여금 자기의 알을 부화하게 만든다. 그 새가 알을 품어 부화시키면 먹이를 줄 때 뻐꾸기 새끼도 함께 먹이를 먹는데 모든 것은 어느 새끼가 먹이를 더 많이 먹느냐에 생존이 달려있다. 뻐꾸기 새끼가 먹이를 독차지하면 다른 새끼는 죽게 된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그것을 한 것은 내 옛성품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옛성품 핑계를 대고 죄를 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핑계를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인데 되지도 않을 일이다. 하나님은 성품에다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물으신다. 당신은 아마 과속으로 적발된 어떤 사람에 대한 소설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경찰관에게 선생님 속도를 위반한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옛성품입니다라고 말했다. 경찰관은 그에게 그래요? 그러면 당신의 옛성품이 속도위반을 했으니 그에게 3만원 그리고 공범인 새성품에게 3만원, 그래서 6만원의 벌금을 물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옛성품에게 핑계를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죄를 짓는 것과 습관적으로 짓는 것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진리는 죄를 범하는 것과 좌의 지배를 받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죄를 범한다. 무죄하지는 않지만 죄 아래 있지 않은 것이다. 요한은 그의 첫 서신서에서 믿는 자도 죄를 범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만일 우리가 부인하면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또한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였다(1:8,9).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3:6,8,9)고 말했다. 요한이 여기에서 습관적으로 짓는 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범한다고 한 말을 통해 알 수 있다(3:8). 죄짓는 것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특징이다. 그러나 신자는 마귀에게서 나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죄짓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의문을 갖게 한다. “어떤 순간에 죄가 습관적인 것이 되느냐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습관적인 죄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만일 성경이 이를 밝히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그 선을 넘기 직전까지 갈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침묵은 모든 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경지 즉 완전히 성별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구원받은 직후 즉 극적인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후 죄의 성품이 제거되며 그후로부터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기준에 이르지 못한 모든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이 다 죄이다( 3:23). 죄는 불법인데 이는 그 자신의 길로 행하는 것이다(요일 3:4). 잘못을 범하는 것만 죄가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도 죄이다( 4:17).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하는 것도 다 죄이다( 14:23). “죄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가장 최선의 것도 더럽히며 그 회개를 망쳐놓는다. 그리고 그의 눈물에 불순물을 섞고 그의 믿음에 불신을 집어 넣는다.”  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그의 회개도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죄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한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보내는 가장 경건한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찬송을 부르는 그 순간에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시는 이의 용서가 필요하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자 하는 마음과 자원함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제 죄를 미워한다. 그는 죄를 범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고 부도덕함에 대한 자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

어떤 이는 아마 만일 그리스도인이 죄를 피할 수 없다면 왜 요일 2: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기준은 언제나 완벽하다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눈감아 줄 수가 없으시다. 예를 들어 그는 할 수 있으면 죄를 적게 범하라고 말씀하실 수 없으시다. 그러나 그는 즉시 넘어지는 자들에 대한 해결책을 준비하셨다. 같은 구절에서 그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셨다. 이 앞절에서 그는 이미 그리스도일도 죄를 범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다음의 말씀들에 주목하라.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1:8).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1:10). 물론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즉 무죄한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도 있다. 로마서 6 :2은 신자들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의 신분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보신다.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러나 11절에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매일의 삶을 말한다. 만일 2절의 의미가 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11절의 권고는 불필요한 것이다. 다른 세 구절도 신자들이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6:7,18,22). 이 모든 구절들에서 사도바울은 종과 주인의 예를 사용하고 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는 우리의 주인인 죄에 대하여 죽었다. 우리는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사람들이 무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온전”, “온전해지다”, “온전하다는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5:48, 3:12, 딤후 3 16,17, 6:1, 9:9, 10:14, 13:20,21, 3:2, 3:1,2). 일반적으로 말해 온전이란 단어는 완성, 성장 또는 성숙을 의미한다.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절대로 그 의미가 무죄한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9:9에서는 온전한 양심을 말하고 10:14에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는 것을 말한다. 무죄의 의미에서 온전을 가르치는 또 다른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23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 그리고 육-성결이 이루어져 그리스도의 오실 때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요일 3:6,9, 5:19과 같이 그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말씀들도 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이 구절들은 습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사용된 동사가 현재 진행형으로써 지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죄를 습관적으로 범하지 않는다.

그는 죄 가운데 살지 않으며 죄짓는 것이 그의 삶의 특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거룩에 대한 가르침이 매우 중대한가? 하나님 말씀과 대치되는 교리라면 무엇이든지 중대한, 다시 말해 심각한 것이다. 온전히 무죄한 상태에 이르기를 위태 투쟁했던 많은 진지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환멸 가운데 빠졌으며 많은 경우에 압박과 정신쇠약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H. A 아이언사이드는 그의 책 거룩 그 허와 실이라는 책에서 그 자신이 거룩에 이르기 위해서 피나는 투쟁을 했던 것, 그로 인해 정신적인 쇠약에 빠졌던 일,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거룩에 대한 다른 진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의 평강에 대해서 그 자신의 경험을 적고 있다.

 

내 스스로는 어쩔 수 없이 나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으며 이 또한 진리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사실 성령님이 우리로 시험을 이기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문제는 그분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가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여 죄를 짓는다. 그리고 우리가 원할 때 우리는 죄를 짓는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죄가 신자들을 주관치 못한다는 기독교의 기초를 부인하는 것이다( 6:14),

그리고 나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요일 1:8). 나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는 하나님의 원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8:2).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관계와 교제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을 때 그의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지만 구원의 즐거움은 잃어버린다. 가족으로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지만 관계는 단절되지 않는다. 그는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아무것도 그 관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요일 1:5) 그와의 교제는 단절된다. 행복한 가정의 교제는 죄가 고백되고 버리기까지는 단절된 채 그대로 있다(요일 1 :9, 28: 13).

 

극복할 수 없는 죄가 있는가?

우리들은 그가 지을 수 있는 어떤 죄로부터라도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전 10:13). 우리 모두는 늘 우리 옆에 붙어다니는 죄, 원하지 않는데도 우리 안에 침투하여 우리로 고민하게 하는 것들, 우리를 낙심케 만드는 습관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사실 하나님 말씀이나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과 죄가 그분의 능력보다 크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번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정이 필요함

우리가 또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단 한번의 경험으로 우리가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고 있는 죄로부터 해방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교회들에서 때로 부인되기도 한다 목회자들은 때로 교인들에게 거룩에 이르는 지름길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들은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사람들로 앞 제단에 나와 성령의 충만 또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으라고 권한다. 만일 그러한 극적인 체험들이 그들을 자동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한단계 더 높은 거룩의 경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속은 것이다.

죄의 유혹으로부터의 구원이란 그때 그때 되어지는 일이지 한번에 순간적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약속은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 33:25)이다.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5:18)고 말했는데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이다. 이것은 현재의 지속적인 행동을 말한다. 강대상 앞에 나가 자신을 드렸던 어제 밤의 경험은 오늘 우리가 당하는 시험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범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이 히브리서 10:26,27에서 말하는 고범죄를 지을까 봐 불필요하게 염려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죄를 범할 때에 자신들의 의지가 관여되었기 때문에 고범죄를 범한 것이며 그러므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를 짓는 것과 히브리서 10장에서 말하는 고범죄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게 매우 중요하다. 고범죄는 배교하는 죄이다. 이 죄는 29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진실로 믿는 신자는 이와 같은 죄를 짓지 않는다. 고범죄를 지었을까봐 염려하는 그 자체가 바로 이러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독교의 신앙에서 배교한 자들은 아주 완악하고 완고해 그와 같은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기독교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그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

이제 이 장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삶을 사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나 자세가 있다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거룩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골로새서 2:23에서 바울은 외적인 거룩을 의미할 수도 있는 고행과 자기부인에 대해 말하면서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고 말했다. 수도원 제도는 거룩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을 어떤 산장에 고립시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 자신의 성품(본성)으로부터는 분리시킬 수 없다. 자기 반성도(자신에게만 매달려 있는 것 -역자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안에는 승리가 없다.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마치 배가 그 닻을 배 안에 내리는 것과 같다. 수동성 또는 무저항도 그에 대한 답이 아니다. 거룩은 한가하게 앉아 기다리는 자에게 임하지 않는다. 또한 열심히 시험에 대해 공부한다고 해서 임하지는 않는다. 시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시험을 더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승리는 낙심하여 포기한 자에게도 임하지 않는다. 그것은 패배한 것이며 하나님은 패배한 자를 사용하시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다. 이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996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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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