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1. 6. 09:16 횃불/1996년

선교와 신앙

 

나의 이 한 생명,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불태울 수 있다면! “

주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 보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불태울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선교가 아닌가 합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선교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78년전 주님의 은혜로 동남아의 몇 나라들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교에 대한 관심과 다른 나라의 성도님들은 주님을 어떠한 모습으로 섬기고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그 여행은 제게 큰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 여행은 제게 많은 것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 제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선교는 생각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직접 현지에 뛰어들어 선교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뒤에서 선교사들을 돕는 간접 선교입니다. 저는 그 여행을 통하여 제 자신은 앞에서 말한 직접 선교의 적임자는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외국에 나가 선교하는 분들이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문화와 풍습이 전혀 다른 나라에 가족을 데리고 가서 그곳 영혼들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아무리 칭찬한다 할지라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처로 선교를 위해 떠났고 또 제가 알고 있는 여러분들도 선교를 위해 그 가족을 데리고 여러 나라로 떠났습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분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제게 없는 용기가 그들에게는 있었고 제게 없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그분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에게는 하늘에서 큰 보상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하여 삶을 드린 그 수많은 선교사 형제 자매님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오늘 이 글을 쓰는 것은 저의 칭찬으로 그분들의 상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쓰고자 하는 것은 지금 우리 가운데 불붙고 있는 선교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고 점검해 봄으로써 그동안 보여진 선진들의 선교 실패의 전철을 우리는 밟지 않고 나갈 수 있으면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며 또한 주님의 일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선교부에 상당한 기간동안 근무를 하였고 또 기회가 있어 194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모임의 선교 역사에 대해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선교에 대해 적어도 다음의 몇 가지는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선교사로 나가고자 하는 분들의 신앙입니다.

국내에서 목회를 하는 분들이나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분들 모두가 쉽게 받는 유혹은 사람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실 가족을 데리고 문화와 언어가 다른 타국에 나간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그런 유혹에 약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초창기부터 허드슨 테일러나 죠지 뮬러와 같은 믿음의 거인들에 대한 간증을 들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들의 그 위대한 믿음 앞에 머리를 숙였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셨다는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픈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하지만 특별히 위험부담이 큰(?) 사람일수록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 더 필요합니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가끔 에스라의 신앙 양심에 큰 도전을 받습니다.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고레스로 하여금 조서를 내려 그 나라에 와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에서 빼앗아온 많은 금은 보화를 주면서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에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에스라는 바벨론에 있는 동안에 이교도 왕에게 하나님은 참 신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는 우리가 전에 말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많은 금은 보화를 가지고 1,000km가 넘는 먼 길, 산적이 우글거리는 그 험난한 길을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왕이 이왕에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그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군대도 구하고픈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말하고 또 믿는 사람이 왕에게 보병과 마병을 구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양심, 이것이 바로 신앙의 양심, 깨끗한 양심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에스라가 왕에게 마병과 보병을 구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사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도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며 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마병과 보병을 보내주셔서 그들을 도와주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에 조금이나마 불명예가 될까 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마병과 보병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주를 의지합니다. 우리 앞에는 험난한 길이 있고 수많은 산적과 도적들이 있으며 우리는 많은 금은 보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왕에게 군대를 청하는 것은 당신의 이름을 모독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고 또 사람을 지으신지라 우리의 이 길도 능히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시며 또한 영광을 받으소서.”  그들의 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위와 같은 기도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먼 길을 통과하여 약 4개월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그 4개월 동안 마병과 보병의 보호를 받으며 왔더라면 경험하지 못할 많은 일들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매순간 순간마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여행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 멀리서 이를 지켜본 바벨론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은 참으로 스릴이 있는 것이며 신앙생활의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이론과 형식에 젖어 점점 형식화 되어 가는 이 기독교계에 이러한 신앙들이야말로 세상을 밝게 비취는 신앙의 등대가 아닌가 합니다. 자신을 부르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자신의 필요 또한 하나님이 공급하시리라고 믿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선교에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두번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선교사들의 인격과 자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선교부에 몸담아 오면서 많은 선교사들을 보아 왔습니다. 선교란 불타는 열정만 가지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격과 삶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선교사들이 하는 사회사업이나 뿌리는 돈이 아니라 변화된 그들의 삶입니다. 주님을 많이 닮은 그들의 삶과 인격은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을 누구나 다 선교사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특별히 훈련시킨 사람을 보내십니다. 안디옥 교회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울과 바나바를 보낸 것은 그냥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곳에서도 성령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나 가족이나 그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님보다 덜 사랑하지 아니하면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선교지에 나가는 분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러한 면에 뛰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선교지에서 세상 것이나 가족 그리고 그 자신의 관심사에 매여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등한히 한다면 그는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나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영향만 끼칠 것입니다.

제가 선교지에 나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는 눈물겹도록 열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가 있으면서 여전히 자국식 생활양식을 고집하고, 자녀들을 그 나라에서 부유층이나 갈 수 있는 좋은 학교에 보내며,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는 그 나라의 의료진을 믿을 수 없어 비행기를 태워 외국으로 치료를 위해 보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현지인들이 찾아와 자식이 아프니 도와 달라고 할 때, 그냥 도와주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선교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이 당신의 설교를 들을 것 같으냐고? 아시아 지역의 한 선교사는 그곳에서 아주 아름다운 집에 살면서 매월 가족이 그곳 노동자의 한달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수영장 비용으로 지출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영하는 동안 저는 그 옆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아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기의 월급은 그들의 한달 수영장 사용료도 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복음을 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선교사가 생각할 때 그것은 자기 나라에서 어린 아이의 한달 용돈에 불과하다고 하겠지만 현지에서는 그곳 사람들의 마음에 좌절을 심어 주기에, 아니 그들의 마음 속에 선교사에 대한 이질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선교란 무엇일까요? 왜 사람들이 선교사를 그렇게 존경하고 우러러 볼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그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그곳의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기에 그런게 아닐까요? 허드슨 테일러와 같이 그 나라에서 현지인화 되지 못하면 진정 좋은 선교사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곳 사람들이 이질감을 갖지 않는 삶을 사는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선교사는 우리가 어려웠을 때에 우리와 같이 까만 고무신을 신고 예쁜이 비누를 사 쓰시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선교지에 나갔다고 해서 다 선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나 많은 사람들이 선교에 대해 생각할 때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설교하는 것,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리빙스턴에 대해 그는 아프리카 사람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것처럼 정말 그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문을 열게 할 수 있는 삶을 살게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자질이나 인격에 있어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세번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선교사로 나가고자 하는 자의 신앙관입니다.

저는 모임의 오랜 선교 역사와 각 나라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각각 그 선교사들의 신앙관에 따라 그 나라의 교회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교사로 나가고자 하는 자는 건전한 교리 위에 건전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성경의 진리를 전하고 성경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깨달음대로 자기(?) 스타일의 교회를 세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란 나가서 복음만 전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가르쳐서 건전한 교리 위에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선교사로 나간 사람들은 건전한 교리로 무장을 한 사람으로 진리를 타협하지 않되 융통성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보며 한국의 모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자라야 한다고 봅니다.

 

네번째로 생각되는 것은 선교사들을 보낸 우리의 자세입니다.

땅설고 낯설은 타국에서 고통과 위협을 무릅쓰고 일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따라 그들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선교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고생을 무릅쓰고 일하고 있는데, 오직 자신의 관심사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중에는 처음에는 선교에 열정을 가지다가도 차츰 그 열정이 식어져서 나중에는 무관심에 빠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세월이 가다보면 우리의 관심은 차츰 멀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선교에만 너무 열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또한 좋은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분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주님의 공급만을 바라보고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자신도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매달 살아가기가 그리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매달 겨우 몇십만원으로 생계를 꾸려 가며 일하고 있는데 선교지에 나간 선교사들에게는 매월 수백만원씩 후원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잃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지금도 수많은 일꾼들이 어려움 가운데서 겨우 생활만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에 나간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어려운 가운데도 주님을 섬기고 있는 국내 선교사들에게도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자격이 우리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해야 할 의무는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자원을 아무렇게나 쓰는게 아니라 잘 구분해서, 다시 말해 잘 분별해서 써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명한 투자자처럼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쓰는 돈에 대해서 어디서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무작정 어느 누구의 구좌에 입금했다고 해서 다 선교지에서 신령하게 쓰여진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란 어느 교회 어느 지역만의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해야 할 주님의 일꾼들이라고 봅니다. 자기 교회의 일꾼은 굶주리는데 선교에만 투자하는 것도 현명하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봉사가 더욱 영광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은 첫째 하나님만 의지하는, 또는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인이어야 하며, 둘째 그 삶과 인격이 제대로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셋째 그 신앙관이 건전한 교리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로는 선교사를 보낸 성도들의 지속적인 기도와 분별력 있는 후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구약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교훈을 받는 것처럼 전에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켰던, 그러나 지금은 쇠퇴해 가는 서구 성도들의 선교사를 통하여 우리가 교훈을 배우면 보다 더 성공적인 선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타국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영혼들을 위해 수고하는 분들께, 그리고 이 일에 기도와 물질로 동역하는 분들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1996 2월호)

 

'횃불 > 199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대적인 굴복  (0) 2014.01.06
가르침의 자세  (0) 2014.01.06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0) 2014.01.06
잊혀진 명령-거룩하라  (0) 2014.01.06
가장 위대한 일과 그 행복  (0) 2014.01.04
부모와 우선순위(2)  (0) 2014.01.04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다  (0) 2014.01.04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0) 2014.01.04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