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2. 12. 13:06 횃불/1996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17장 “깰지어다, 깰지어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52:1).

앞장에서 살펴본 삼중적인 경청’(hearken)에 이어 여기에서는 삼중적인 깰지어다라는 내용이 뒤따른다 첫번째 깰지어다라는 말은 여호와의 팔에 빗대어 한 것인데 마치 잠자고 있는 것으로 이미지화 한 이 비유는 풍부한 시적 표현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번은 예루살렘에게 말한 것으로써 몰락 한 그 성에 대한 것, 혹은 바벨론 물가’( 51:9,17, 52:1)에 앉아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중심구절( 51:17)을 먼저 생각해 보자. 기기서 예루살렘은 어떤 취하게 하는 것에 마비된 모습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그 찌꺼기까지 다 마셔 취하여 누워 잠자고 있다. 그러나 그의 취함은 포도주나 독주로 인한 것이 아니며 여호와의 분노의 잔을 마신 까닭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종종 선지자들에 의해 사용된다.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마신 그들은 인사불성 상태가 되어 비틀거리며 자해하게 되는데 우리는 만취한 결과 나타나는 그러한 현상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전 예루살렘이 그 마법 아래 굴복 되어졌다. 그 자녀들은 혼절하여 모든 길거리에 드러누워 있는데, 이는 마치 그물에 걸린 영양이 빠져나갈 수 없이 헛되이 애쓰는 모습과도 같다. 바로 그같은 상황 가운데서 여호와의 종의 다음과 같은 외침이 소개된다.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동녘 하늘의 빛의 떨림같이, 잠자던 그 도시의 생명이 꿈틀댄다. 이는 마치 따스한 남풍이 불어와 겨우내 얼어붙은 눈서리를 녹이는 듯하다. 야이로의 집에 잠들어 있는 그 소녀를 깨웠던 달리다굼이란 속삭임처럼, 그 외침이 마비되어 있던 시온성을 일깨우게 되었다. 그러자 갑자기 생명의 맥박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깨어난 예루살렘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잠들어 계신 것처럼 여겨 그분이 깨어나시도록 불렀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전혀 반대였음을 배워야만 했다. 그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거민이었다. 그러므로 그 호소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예루살렘에게로 되돌아 왔다. “시온이여, 깰지어 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여호와의 진노 외에도 다른 수면제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매혹적인 그 땅의 분위기, 악한 동무들의 아편, 그리고 사업에 몰두하고 육신적인 안전을 추구하는 세속적 쾌락의 마약등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 모두를 깊은 잠 속에 골아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군대는 너무 쉽게 빛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깊은 잠에 취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한두번이 아닌 여러 차례로 제자들의 삶은 잠으로 인해 힘들어지곤 했다. 우리 또한 열심의 열정, 사랑의 따스함, 믿음의 확신 그리고 봉사의 열심을 상실하고 무감각해지고 이성없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영혼을 일깨우시는 자비로운 분이시여, 우리 곁에 자주 자주 서셔서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말씀해 주소서,”

우리는 종종 잠에서 깨어나 그동안 주께서 잠들어 계신 것처럼 착각하곤 하는 데 실상은 그 반대로 우리 자신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1) 하나님을 향한 시온의 호소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깨어난 첫번째 징후는 외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경우에 실로 그러하다. 어머니가 집 근처에서 무슨 일에 몰두하든지 간에 그녀는 자신의 아기가 깨어난 첫 신호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녀는 애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는 영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소 사람 사울이 회심하였을 때, 하늘의 지켜보는 자가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라라고 말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의 영이 흘러 넘치는 것은 소생과 부흥의 첫번째 징후인데, 이는 마치 계곡의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산꼭대기의 얼어붙은 눈이 녹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기도는 우리에게 모든 거룩한 삶과 무척 밀접한 것으로 언급된다. 밀물과 썰물, 겨울과 여름, 변화산과 귀신 들린 아이가 있는 계곡이 있다. 때로 하나님이 깨어 계시고 살아 계시고 힘있게 역사 하시는 듯 보인다. 그러한 때에는 그분의 힘있는 맥박이 우리 안에 용솟음치며 그분의 목소리가 우리를 새롭게 하며 영웅적인 과업으로 이끈다. 하지만 다른 때는 무거운 무기력감이 지상 위에 드리워지고 하늘을 향한 우리의 시야를 가리워 버린다. 그러나 우리의 실수는 그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기보다는 도리어 하나님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 내적 생명의 변화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잠자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깨어나야 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능력으로 띠 띄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팔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믿음으로 가까이 쉽게 취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 외침은 간결하고 진지하다.

세 번이나 그 간구자는 깰지어다라고 외친다. 잠에서 갑자기 깨어났을 때,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고 고침이 필요함을 의식하여, 우리는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외치게 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비록 우리가 그동안 잠들어 있었고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었기에 비난 받아야 할 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배운다 하더라도 말이다. 비록 처음에는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진지한 자체는 여전히 좋은 것이다.

 

우리 외침의 가장 좋은 기초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51:9) 믿음의 변론을 위해 과거의 경험들을 인용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과거 생애는 그 목표를 놓칠 것이다. 각 사건은 다가올 때를 위해 그분의 성품에 관한 새로운 면을 보고 우리 마음에 간직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다시 그분 자신을 되풀이 하시지 않고서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기대하게 되며 만일 그분이 그 모든 일을 행하셨다면, 그분은 풍성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지혜로우시고, 강하신 분이라고 말하기를 배우게 된다.

그분이 해결할 수 없는 비상사태는 없으며 그분이 성취하실 수 없는 것이 없다. 그분은 만나를 주셨고, 또한 물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애굽으로부터 건지신 그분은 또한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해방되게 하실 수 있다.  그분은 깊은 샘을 마르게 하셨고 구속받은 자들을 위해 바다 속에 길을 내셨다. 그렇다면 그 분은 또한 사막에서 물 웅덩이를 만드시고, 모든 산에 길을 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팔은 강하다.

그 팔로 하늘을 펴시고 땅의 기초를 정하셨다( 51:13). 그 동일한 힘으로 역사하사 만물 속에 그 능력을 영원한 기념비로 남겨 두셨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는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성벽과 보호하심을 의뢰할 수 있다. 그분의 요새가 강한 대적들의 모든 공격을 능히 막아낼 수 있다.

압제자의 분노가 우리를 파멸시킬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헛되이 깨어질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다의 파도가 긴 항구의 벽을 깨뜨리려고 부딪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벽 뒤에 있는 것은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 해도 안전하게 보호된다.

하나님의 팔은 구덩이까지도 닿는다( 51:14). 그 팔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깊은 구덩이는 없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요나처럼 우리도 해초와 물로 에워싸인 산들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기서 우리를 끌어올리신다.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9). 우리가 아무리 깊이 침체되어 가라 앉아 있을지라도 그 밑에 그분의 영원한 팔이 있다. 하나님의 두 팔이 언제나 받치고 있다.

 

하나님의 팔은 온유하다(부드럽다).

그 팔은 우리를 위로한다( 51:12). 그것은 마치 병들고 지친 아기를 만지는 어머니의 손과 같다. 사랑하는 이의 팔에 안기면 그는 행복한 안전감을 느끼게 된다. 그 두 팔이 십자가 위에 펼쳐졌고 온 세상을 널리 품고 있다. 주임의 두 팔은 지금도 온 세상 전 우주 어느 곳에 있는 영혼이든지 다 환영하며 그 따스한 가슴으로 품어 주신다. 요한 사도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그 부드러운 품에 안기었다. 우리 또한 우리의 병든 가슴과 피곤한 육신을 위로하시고 품어 주시는 그분 품에 안기기를 더 이상 주저하지 말자. 우리를 그 품에서 떼어 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안전한 예수님의 두 팔 안에

안전한 그분의 사랑의 품속에

거기 그분의 사랑이 드리워져 있네.

내 영혼 달콤한 안식을 누리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여호와께서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자( 51:13)이심을 망각해 버린다. 우리는 찬란한 천국보다 세상 것을 더 많이 생각하며, 생명나무 보다 사라지는 풀 같은 것을,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까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멀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모호해져 있고, 가스등의 그을음으로 인해 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흐리게 보이며,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에 기울어져 있다. ,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 주 예수님을 생각하라. 그분이 그대와 그대의 모든 대적하는 환경 사이에 계심을 믿으라. 비록 그것들이 당장이라도 그대를 파멸시킬 것처럼 준비되어 있다 해도 말이다. 학대자의 분노를 항상 종일 두려워한다면 그러한 자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어깨와 그분의 손안에 감추어진 자로서 거하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 51:16).

 

(2) 시온을 향한 호소

우리가 철저하게 깨어나고 되돌아볼 시간을 가졌을 때, 우리는 그 잘못과 허물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놓여 있음을 발견케 된다. 하나님이 잠들어 계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바로 우리가 잠들었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복된 일이다.  인생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게 되면 구세주의 빛나는 영광을 놓칠 수 있다. 깨어 있지 않게 되면, 우리는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그 긍휼을 얻는데 실패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우리의 일을 하도록 맡기실 수도 있다. 

게다가 세상에는 잠들지도 졸 수도 없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필요를 언제나 열심히 채워 주어야 한다. 깨어 있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두 가지의 옷차림을 발견케 될 것이다. 첫째는 힘이요, 둘째는 아름다움이다. 각각은 신약에 그 대응되는 것이 있다. 전자는 에베소서 6장에 있고 후자는 골로새서 3장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품, 영 그리고 인격- 로 옷입으라.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아름다운 옷으로 입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꽃이 피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단지 의복을 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옷으로 입어야 한다. 인생의 향취를 일컬어 우리는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하거나 꽃으로 만발한 정원으로 부른다( 61:10,11). 우리는 어떤 일을 바르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 진리를 말해야 할뿐만 아니라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해야 한다. 가난한 자에게 구제해야 할뿐만 아니라 겉치레나 은혜를 베푸는 체 하지 않고 겸손히 주어야 한다.

즉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우리에게 입혀져야 한다. 구속받은 영혼에 대해 사도가 언급한 많은 옷가지는 주로 성격과 성품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꽃으로도 불릴 수 있는 동정심, 친절, 겸손, 온유함, 오래 참을등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짤 수 없다. 우리 자신의 본성의 고치로부터 그러한 것을 뽑아낼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조차 없다. 그것들은 모두 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으로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옷입음으로 그것들로 옷입는다. 예수님 안에서 그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되라( 1:9). 이와같은 진리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도록 만드신 주 예수님을 취하라는 것이다(고전 1:30).

이것은 오직 우리 마음에 쉼(여유)이 있을 때 그렇게 될 수 있다. 영혼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길이 회상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영혼의 경외하고 기쁨의 옷이 그분의 영광스런 성품으로 빛나게 되며 믿음의 행위에 응답하여 나타나게 된다. 아름다운 옷이 가장 심령이 가난하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어느 누구도 누더기 옷을 입은 채로 살 필요가 없다. 그는 다만 하나님이 친히 입으신 그 빛으로 옷입으면 되는 것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 104:2),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는 능력을 입어야 한다.

시온이여, 네 힘을 입을지어다.” 하나님은 인생에 일어 모든 가능한 비상시나 필요시에 힘을 공급해 주신다. 어떠한 부르심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거기에는 항상 이것을 채울 수 있는 충분한 은혜가 공급된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과 시련은 없다.  어려운 압력을 통해 우리 자신은 더 유용한 자가 되도록 빚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위험성은 있다. 즉 우리는 그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능력으로 옷입는 것을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힘을 구입하거나 우리 자신의 결심, 기도 혹은 걱정으로 그 능력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힘이 되신 그리스도를 옷입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다만 그렇게 적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주님의 능력으로 옷입으라. 그대 시험 가운데 있는 자여 ! 자주 실패와 패배로 넘어지는 그 삶의 현장에 가기 전에 조용한 경건의 시간을 가짐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옷입으라. 그저 단지 지켜 주시거나 도와주시라고 기도하지만 말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그대 자신을 무장하라. 그분의 능력을 붙들라. 그러면 평안 가운데 거할 것이다. 무장한 어떤 사람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의 갑옷으로 그대를 두르라. 바로 그 전신갑주가 그대의 것임을 기억하라. 이제 어떤 흉악한 원수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대가 더 힘이 있음을 믿으라. 다윗처럼 이렇게 선포하라.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3:6, 27:1).

우리는 죄의 영역으로부터의 구원을 반드시 기대해야 한다. 바벨론은 그의 보좌로부터 내려앉아 티끌에 거하도록 명하여졌다. 예루살렘은 티끌 가운데서 일어나 그 보좌 위에 앉도록 명해진다.  그녀의 목에 줄이 풀려졌고,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그 성문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구원하심이었으며 그러므로 이제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으로 일컬어지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구별된 것이다.

이 말씀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자. 우리 마음의 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차지하시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그분께서 그곳을 값주고 사셨으며 그 성벽을 지으셨고 그곳을 왕이 거주하시는 보좌로 칭하신다. 마음은 거룩한 성전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재관장, 입법자, 왕으로서 그분께 철저히 굴복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 성벽은 구원으로 일컬어지며 그 성문은 찬송으로 가득찰 것이다. 기기에는 가증하고 부정한 것이나 어떠한 거짓된 생각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악마적인 것은 이제 인간의 영혼에서 추방될 것이며 임마누엘 되신 주님이 그분의 영광과 아름다움 가운데 그 보좌에 거하실 것이다. 그리할 때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거리에는 합창단의 찬양 소리로 가득 채워지며, 제사장들이 흰옷을 입으며, 수금을 치는 자와 각종 향기로운 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1996 7,8월호)

 

'횃불 > 199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뿌리는 농부와 같다  (0) 2014.02.12
잊혀진 명령- 거룩하라  (0) 2014.02.12
여성에 관한 역사적 교훈  (0) 2014.02.12
영생과 중생의 신비  (0) 2014.02.12
유산  (0) 2014.02.12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0) 2014.02.12
잊혀진 명령-거룩하라  (0) 2014.02.03
“믿는다”란 무슨 말인가  (2) 2014.02.03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