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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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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12. 13:08 횃불/1996년

영생과 중생의 신비

0. J.스미스

이번에는 니고데모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 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

먼저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국적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끝으로 니고데모는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만일 유대인이 거듭나야 한다면, 이방인들은 어떻겠습니까? 이방인들은 이교도들을 말하는데 유대인들은 언제나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였습니다(마가복음 7:27).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은 민족이었는데 그들의 선생인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그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나라의 백성인 유대인이 거듭나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선택받지 못한 민족들, 그리고 이교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도 거듭나야 합니다.

둘째로 니고데모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거듭나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세대에 살고 있는 소위 선남 선녀들은 어떻겠습니까?우리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니고데모는 흠잡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보다 나은 생활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의 생활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거듭나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했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역 시 그와 같은 경험을 가져야 하지 않을 까요? 만일 그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의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거듭나야 합니다. 

셋째로 그는 유대인으로서 선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모세의 계명을 그의 있는 힘을 다하여 지켰습니다. 그는 계명을 지키는 일에는 엄격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의 생활은 율법에 따라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마음이 종교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였으며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종교적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의 종교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그를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지만 그에게 다른 그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시는데 주저하지 않으셨으니 그것이 곧 중생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만일 니고데모가 그의 종교적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야 했다면 여러분과 나에게 이것이 얼마나 더 긴급한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진리

아무도 영생을 가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 이외에는 생존하지 않는 곳입니다. 이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이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나는 영생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나의 영생과 비극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영생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첫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영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라고 밝혔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을 하늘 영광 보좌를 떠나서 이 세상에 오게 한 것입니다. 그 분이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죽은 목적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영생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이 영생은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둘째로 그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인 것은 사람은 모두 죄로 죽었기 때문에”(에베소서 2:1,5) 영생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체로 구성된 삼위일체적인 존재입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죽은 것이 어느 부분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무엇이 죽었단 말입니까? 죽은 것이 육체이었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는 전과 변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혼, 즉 그의 지성과 감정이었습니까?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부분은 영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했던 것입니다. 그날까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한 바로 그 시간부터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교제가 파괴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회복되어야 할 것은 영입니다.

인간은 혼과 육체의 활동만으로도 살아있는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내려다 보실 때 그 분은 우리를 두 부류로 구분하십니다.  즉 산 자와 죽은 자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당신은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은 살았든지 죽었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능률적인 사업가를 보고 저기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 있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그의 혼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지성의 활동과 감정의 감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대단히 다른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는 죽었다라고 ! 우리는 보이는 생명에 관하여 말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의 장례식에 참여했을 때 많은 조객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그의 육체적 사망을 뜻합니다. 그는 다시는 그의 육체적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론은 그는 살았다입니다. 즉 그는 영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었고 따라서 그는 거듭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혼과 몸이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산 것입니다.

셋째로 영생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인 것은 그것이 인간의 장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이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5).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뜻은 영생 없이는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멸망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정반대 상태라는 것이며 그 상태는 형용할 수 없이 처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종말을 귀결짓는데 사용하신 단어가 멸망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한편에는 생명입니다.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즉 당신이 영생을 얻지 않으면, 당신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여기에도 다시 두 면과 두 결과가 있습니다. 즉 생명과 심판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심판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 없다면 죽음과 심판만이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오”(요한복음 10:28).

생명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멸망하는 길입니다.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택하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은 이 영생을 가졌습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영원한 행복과 고통이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신가?

어떤이들은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닙니까?”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주이시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한복음 8:44)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가정에 태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가 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내가 속해 있는 가정에 태어나기 전에는 나의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 가정이란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전에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시기 전에는, 당신은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는 구절을 말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연적 탄생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오직 영적 탄생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게 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 태어나면 두번 죽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육체적으로, 두번째에는 영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져서 불못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최상의 중요한 일입니다. 

낳음이 없이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적 혹은 육체적 생명은 탄생을 통하여 세상에 존재하게 됩니다. 영적 생명도 이와 같습니다. “너는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당신의 마음에 오셔야 하며, 그분이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는 바로 그 순간에, 생명, 영원한 생명이 당신의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차디찬 형식적인 신조나 특별한 옷차림이나 종교적인 감정이나 율법과 계명의 법조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는 불가사의한 희미하고 신비스러운 그 무엇도 아닙니다. 기독교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것이 기독교를 종교와 구별되게 합니다. 율법이나 계명의 조문이 필요없고 새로운 기관을 설치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이것 없이 다른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근본적 변화

당신이 거듭나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변화가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면, 모든 것이 새로와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변화입니다. 한때 당신이 좋아하던 것들을 이제는 싫어하게 되고, 한때 싫어하던 것들은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취미, 새 희망과 새 이상, 새로운 친구와 사업 동지,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습니까?

여러분 중의 어떤이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교회에 적을 두었고, 교회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여러분 중의 그 누구라도 이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을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당신이 대학교수일 수도 있고 교육면으로나 교양면에서 볼 때 손색이 없으며 세상에서 유명한 철학자일지라도 영적이며 신앙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무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당신이 당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고 막노동을 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거듭나면 영적인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소위 자기 자신의 지혜와 이해로 하나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 1:21) 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 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4).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탄생하기 전에 자기가 장차 살게 될 세계에 관하여 알 수 있습니까? 물론 그는 모를 것입니다. 자연적 인간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기까지는 영적인, 즉 신령한 세계에 관하여서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첫 필요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질문은 나는 새 생명의 경험을 하였는가?”, “‘거듭난다는 말을 나는 알고 있는가?”,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는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진리인 까닭에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인 것입니다. 당신이 이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영원한 문제가 결정되는데 그 까닭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는 뜻입니다. 죽을 때에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변화는 회심할 때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은 이 자연 세계에서 태어납니다. 영적인 세계란 전혀 다른 한 영역입니다 자기 발전의 모든 노력은 이 자연 세계의 테두리 안에서뿐입니다. 자연 세계 밖의 다른 영역인 영적 세계에 합당한 생명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야 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암흑의 세계에서 광명의 세계로, 자연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순간에 한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는 암흑의 나라에 속했든지, 아니면 광명의 나라에 속했습니다. 사단의 나라에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자연 세계의 시민이든지 영적 세계의 일원이든지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속했습니까?

저는 가끔 도토리와 금강석을 비교하곤 합니다. 도토리는 아무 매력도 없고 거무틱틱합니다. 금강석은 언제나 그 휘황찬란한 빛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이 도토리처럼 신자로서의 아무 매력도 없고 무기력합니다. 그 반면에 많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그의 도덕적 생활을 자랑하며, 그가 아는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금강석과 같습니다. 그러라 이 두가지 즉 도토리와 금강석을 같은 곳에 심고, 75년 후에 그곳에 돌아와 보십시다.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겠습니까? 도토리를 심은 곳에는 보기 좋은 떡갈나무가 서 있을 것이며, 그것은 어떠한 비바람도 이겨내는 것입니다. 금강석을 묻었던 곳을 파헤쳐 보면 그곳엔 금강석 밖엔 없습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하나는 생명이 있고, 하나는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한 사람은 영생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생명이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그는 영원에서 하나님과 같이 살 것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은 겉으론 보기 좋을지라도 그는 죽은 것입니다. 그는 한 근본적 요소인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덕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두개의 꽃다발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둘 다 같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큰 차이를 찾아보게 될 것입니다. 한 곳에서는 그 주위를 황홀케 하는 향기가 퍼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조화였습니다. 즉 진짜 꽃을 본따서 만든 것입니다. 하나는 살았고 하나는 죽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가졌고 하나는 생명이 없습니다. 무엇이 결여되었습니까? 생명! 꽃의 참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져야 합니까? 생명!

당신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방과 형식적인 외형 등으로는 안됩니다.  신자가 되는 척 하는 것으로 신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소유했다고 말하는 것과 사실로 소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인위적인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겉치레만 하는 의식주의자들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필요한 생명입니다. 다른 그 무엇도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생명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알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윤리의 제도나 도덕의 법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 생명의 창조요, 주인입니다. 성령의 작용에 의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마음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산상보훈을 복종하는 일(만일 가능하면)이나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도덕적 윤리적인 생활관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 세계에서 최상의 표본이겠지만, 그것이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996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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