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3. 19. 16:24 횃불/1996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19장 그리스도에 대한 변호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52:1315).

 

그 가시 면류관을 쓰시기에 합당하신 오직 한분이 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병거에 앉아서 이 죽음에 이르는 슬프고 놀라운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기자가 누구에 대해 말한 것인가라고 빌립에게 물었다.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 전도자는 바로 그 성경 말씀으로부터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뚜렷한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하늘과 땅,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연약함을 혼합해 놓은 이러한 비밀을 풀 수 있는 전체 신약성경의 열쇠이다. 그러나 고귀한 성령님의 증거 없이는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어떠한 가치도 발견할 수 없다. 성령님의 역사로 봉인된 책이 하나씩 하나씩 열려지며, 보좌에 앉으신 양이요, 유다 지파의 사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증거되어 진다.

역사상 위대한 고난당한 자들에게 이 예언의 여러 부분을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 주어졌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포로 시대의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슬픔과 고통은 모든 이들의 유산이기에 그것은 매우 유사하며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인간이 겪는 고난은 인자이신 그분의 것에는 비교할 수 없는 적은 것이다. 어린 아이의 손이 웅장한 오르간의 건반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인의 후손이신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온전히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이 모든 것이 내 자신 속에 있음을 인식한다. 이 모습은 바로 나의 것이다. 내 모습과 내 삶에 일치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의 아들 중 어느 누가 그같은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세상의 모든 조소와 경멸을 한꺼번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의 인자가 이 어둡고 쓰라린 기록을 성취하였다고 주장했고 그 가슴을 열어보이고 입은 상처를 보이신다. 그분의 셀 수 없는 무수한 고난을 생각해 보라. 그분같이 고난당한 자가 있는지 물어보라. 아무도 감히 그 분의 당한 것 같은 고난을 받았노라고 도전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그분은 기록된 그 말씀보다도 더 깊고 쓰라린 고통을 말없이 감당하신 것이다.

이 슬픈 애가가 불행히도 우리 성경에는 인위적인 장들로 나누어져 있다. 사실 그 대목은 이사야 52 13절로 시작되는데, 이 책에서 그토록 자주 우리의 주위를 끄는 보라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그것은 각각 3절씩 다섯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대목은 다소 길다. 영어 번역으로는 그 속 깊이 잠겨 있는 운율과 슬픈 곡조의 개념을 낼 수 없다. 그 주제는 하나님의 종의 고난이다그의 동료들이 내린 잘못된 결론과 그분이 받은 것에 대한 승리로운 변호가 제기된다.

 

(1)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

뇌성과 우뢰(thunder-storm)가 임박할 때 시커먼 구름이 산들 위로 어둡게 드리워 있는 것처럼 여기 세가지 비밀이 있다

 

겸손의 비밀

연한 순, 그것은 메마른 땅을 통해 고통스럽게 물기를 빨아올린 것이다. 그야 말로 자연스런 매력이 상실된 것이다그러한 이미지가 신약성경을 통해 온전히 나타나 있다. 소박한 양친, 말구유, 그리고 비천한 상황 등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가 선택한 제자들도 어부에 불과했다. 그처럼 빈곤이 그분의 지속적인 분복이었으며, 보통 백성들이 그분을 헌신적으로 흠모하며 따랐다. 도적이요 강도들이 그분의 십자가 좌우에 매달렸다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이 그분의 교회 구성원들이다. 이것은 실로 겸손 그 자체이다. 인간은 그분이 오실 때 그 높으심으로부터 이러한 겸손을 거의 구별할 수 없다.

그분의 겸손하심의 심오한 낮아지심은 바로 그분이 인간 자체가 되신 것이었다. 그분은 아낌없이 축복을 베푸시는 무한자이셨다. 그분의 부요하심이 전 우주에 흘러 넘친다. 완전한 도덕성의 탁월한 광채가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염된 공기를 마시며 죄인들과 매일 접촉하며 사시는 것과 가장 비천하고 전염병에 찌들은 종족에 둘러 싸여 사셔야 했던 그분의 고뇌는 얼마나 컸겠는가! 게다가 그분은 돌아가셔야만 했다! 그 생명주시는 분은 그 무덤의 어두운 현관 아래로 통과하셔야만 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손에서 치욕과 멸시를 당하는 죽음에 순종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실로 겸손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의 비밀

여러분은 그 상처난 얼굴에 지을 수 없는 자국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분이 슬픔을 아시는 슬픔의 인자였음에 대해 이보다 더한 증거가 필요없다. 그러나 슬픔이란 무엇인가? 우리 각자는 경험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안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정의하거나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자가 어두운 그림자의 위협에 처할 때 그를 만나는 사랑의 결과로 야기되는 감정이 바로 슬픔이다. 관능적인 만족이 줄어들 때 고함치거나 손실에 대해 불평하는 이기적인 종류의 슬픔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것을 언급하지는 말자. 여기서는 우리가 세상의 구속자이신 그분의 슬픔에 관해서만 생각하기로 하자. 우리는 그 슬픔을 그분의 비할데 없는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요 그분의 이미지를 형성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할 수 있다. 그 슬픔의 크기는 최고의 것이었다. 그 대상이 사랑의 품을 교묘히 벗어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사랑은 차갑게 변하게 되고 그들의 영혼들은 오해와 잘못으로 오염되게 된다. 만일 그 사랑을 받아들였더라면 구제받게 되었을 그 삶의 소용돌이 속에 사로 잡히게 된 그들은 그같은 사랑의 도움을 거절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때에 거기에 슬픔이 있다. 마치 비가 차가운 냉기를 만나 눈으로 변하여 하얀 눈송이를 뿌리듯이 말이다.

왜 예수님이 슬퍼하셨는가에 대해 더 이상의 논증이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달리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무한한 고통을 유발하지 않고서 인간은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그분을 상처입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분의 심장을 비틀리게 한 것이 그대가 아닌가? 그렇게 아니하고서는 방탕한 자식 같은 그대를 위해 쌓아둔 그분의 그 섬세하고 민감한 사랑을 그대가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세기를 걸쳐 그분은 계속하여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들은 그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있었다. 그분은 그들을 마치 암탉이 새끼들을 품듯이 모으고자 했지만 그들은 그분을 거절했다. 그분은 자신의 정원에 오셔서 고귀한 열매와 향료를 얻고자 하셨지만 귀한 상품들은 강탈당했고 담장들이 허물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영접은 고사하고 거절당하셨고 환영을 기대했으나 공개적인 수치를 당하셨다. 분명히 이러한 사실이 슬픔의 비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고통의 비밀

상처를 입히고 멍들게 하며 채찍질한 그 군인들은 그분의 얼굴에 침뱉기까지 했다. 그 혹독한 채찍질은 그분의 육체에 마치 밭고랑이 갈리듯 하게 했다. 피 맺힌 땀방울이 그분의 이마 아래로 흘러 내렸다. '십자가에 못박아라!'라는 외침이 뒤 따랐다. 여기 고난의 진수가 있다! 그같은 비참한 광경에 대해 군중들에게 내뱉은 빌라도의 외침이 그들의 동정심을 유발할 수도 있었으련만 이 사람(인자)을 보라!”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님이 참으신 고뇌를 언급하며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고난에 대해 언급하는 헬라 교회의 기도서에는 히브리 서신의 놀라운 말씀들이 주어져 있다. 그 서신에서 그분은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신바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말씀들을 곰곰히 상고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심한 고뇌를 겪으셨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분은 자신의 십자가에 이르기 전에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의 죽음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 고통의 압력은 거의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속죄의 희생이 제공되기 전에 그분의 성품은 모든 두려움으로 붕괴될 지경이었다. 만일 이것이 그 구절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면, 그 구속주의 인간을 위한 넘치는 고뇌는 얼마나 놀라운 개념인가! 만일 갈보리에 대한 예상이 그토록 그분의 심장을 짓누르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종이었겠는가! 그것이 바로 고통의 비밀이었다.

, 고난과 슬픔의 왕이시여! 상한 얼굴의 군주여, 어느 누구도 당신의 슬픔의 그 끝까지는 미치지 못했다오. 우리 무릎을 꿇고 당신 앞에 엎드려 경배드린다오. “모든 영광 받으소서!” 우리는 당신의 눈물과 고뇌에 정복되었다오. 우리 심령이 그대의 사랑에 매혹되었다오. 우리 영혼은 영감을 받아 고무되었고 우리 삶은 그토록 커다란 희생을 치루신 당신의 목적대로 드려지도록 굴복한다오.

 

(2) 잘못된 피상적인 결론들

모든 세대는 범죄의 비참함, 불법의 고뇌, 그리고 죄의 고통 등과 관련을 맺어 왔다. 특별한 고통은 특별한 잘못 행함의 표시로 간주되어 왔다. 욥이 그의 무죄함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헛되었다그의 친구들은 계속하여 그의 끔찍한 고통들은 악으로 비롯된 것이며 그가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었지만 그 자신과 하나님은 잘 아는 죄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주장했다. 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이 고통하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본 제자들은 그것이 바로 그 사람 혹은 그의 부모들이 어떤 끔찍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이를테면 인과응보의 사상을 말한 것이다. 폭풍우가 휩쓸고 간 후 말타 해변에 이르렀을 때 불의 열기를 인해 기어 나온 독사가 사도 바울의 손을 물자 그곳 원주민들은 그를 살인자로 여겨 비록 그가 바다를 피해 올 수는 있었지만 공의로운 형벌을 피할 수는 없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저 무지한 군중들은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그 고난을 또한 무언가 스스로 잘못한 것이 있어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하지만 결국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마침내 그 백성들의 입술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흘러나올 것이다. “우린 그분을 경배하네.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당했던 그분을.” 어쩌면 그분의 죽음을 동의했던 바리새파가 안나스와 가야바의 독한 판단보다 더 혹독한 심판을 조장했을 것이다. 그 끔찍한 날이 지나고 십자가의 시체들이 내리워졌을 때, 그들은 그 나사렛 사람이 자신을 높이는 그같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기에 하나님에 의해 그같은 고난을 받으며 죽임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안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분의 죽음을 타협케 하는 말을 거절한 것 외에는 가야바 앞에서 잠잠하셨고 말을 해 봐야 공허한 헤롯 앞에서 잠잠하셨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진리를 진정 알려고 했을 때 외에는 그 앞에서도 잠잠하셨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운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7)왜 이렇게 침묵하셨는가? 부분적으로는 자신을 못박고자 하는 그들과 변론해봐야 무익하다는 것을 구세주께서 분명히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분은 그분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평온한 가운데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일어나사 마침내 자신을 온전히 변호해 주실 것을 아셨기에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아버지께 자신을 의탁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신의 고난으로 인해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한 해결책이 됨을 인식 한 황금빛 비밀을 그분의 가슴 속에 간직하셨음을 나타낸다.

한마디 불평이나 원망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받은 이들에 대해 우리는 최고의 찬사를 부여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주어진 그러한 고난과 슬픔의 짐을 조용히 담당하셨다. 오해와 비난을 받으셨지만 그분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장 최선의 순간에 모든 것이 밝혀 지기까지 참된 변호가 될 때까지 회피하지 않으셨다. 바로 그같은 목적된 강함을 보며 우리는 최고의 찬미를 드리게 된다.

 

(1996 10월호)

'횃불 > 199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다  (0) 2014.04.10
운명을 결정하는 질문  (0) 2014.03.19
주 예수님과 여성들  (0) 2014.03.19
발람(12)  (0) 2014.03.19
그릇된 적용  (0) 2014.03.12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  (0) 2014.03.12
잊혀진 명령-거룩하라  (0) 2014.03.12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 교회  (0) 2014.03.12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