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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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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19. 16:25 횃불/1996년

발람(12)


하나님의 통치

한번은 어떤 교회외식주의자가 한 열렬한 복음주의자에게 이렇게 도전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당신의 교리는 부주의한 삶을 조장하기 쉽지 않겠는가?” 그러한 도전은 가볍게 물리쳐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이런 진리가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의 영원한 안전을 자랑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거룩한 삶을 드러내고 있는가? 자신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확고부동하게 말하는 반면 그 삶은 신랄한 비난을 받아 마땅한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 해이된 삶에 대한 처방이, 의심과 두려움의 먹구름이 깔린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일까?

모름지기 진리는 균형이 잘 잡힌 가운데 이해되어야 한다.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 가르침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 가운데 똑같이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할 진리의 두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통치(government)이다. 이들 두 측면은 하나님의 지상 백성 및 천상 백성과 관련해서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발람의 모든 비유와, 특히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라는 말씀에서 밝게 빛난다( 23:21). 그 어느 것도 이러한 사실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놀라운 은혜는 유월절 양의 피와, 또한 속죄소 위에 항상 있는 속죄의 피를 기초로 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그리스도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민수기 23:21 25: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는 말씀은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지! 이 두려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 -항상 의롭고, 항상 거룩한-를 대한다. 백성들은 극악한 짓을 범하고 있었다 높이 우뚝 서서, 열국 중에 하나로 간주되지 말아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별된 위치를 포기하고 그분과의 특별한 관계를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그들은 이방 모압 족속의 수준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모압과 미디안 여자들과 더불어 음행을 범하고 있었다그들의 행위는 발락과 그의 방백들이 보기에는 가증한 일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이 행함 같이 행하지 말아야한다( 4:17). 이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진리이다. 여호와와 직접적이고도 특별한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이 그분의 엄위한 징계의 손 아래 처했다우리는 그분께서 오랜 후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온 족속을 쳐서 이르시기를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3:1,2).

이러한 원리보다 공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총을 입은 백성들의 결함을 봐 줄리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종종 눈감아 주지만 하나님의 길은 항상 의롭다. 만일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도량을 베푸신다면 어찌 그분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는가! 아울러 우리는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이 사람의 아들들에 대한 그분의 섭리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3:10, 벧전 1:12).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는 악행들은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상 유난히 어두운 장을 이뤘으며 유난히 가혹한 징벌을 초래케 했다. 이후의 성경에서 바알 브올은 극히 엄중한 표현으로 소개된다 ( 22:17, 106:28, 9:10, 고전 10:8). 모두 합해 24천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 거기서 멸망했다!

아모스 3 1,2절에서 선언된 하나님의 원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이스라엘의 무서운 고난-열국 역사상 유례없는 고난-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최악의 고난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마지막 환란으로부터 겸비하고 부서진 상태로 나타날 때 그 백성은 여호와의 통치적인 치리의 공의로움을 시인할 것이다. 더 이상 율법 안에서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거절당하신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표현된 그분의 은혜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로써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위치인 열국의 머리를 차지하기에 적합하게 되어 열국을 의와 평화의 길로 이끌 것이다.

바알브올에서의 이스라엘의 범죄함과 그 결과 백성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오늘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 대한 경고로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극히 엄중하게 선언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구약의 역사의 영적인 가치가 이같이 강조되어 있으며, 로마서 15 4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민수기에서 발견한 동일한 진리의 두 측면-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통치 -이 고린도전서에서도 발견된다. 바울이 서신을 쓸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태는 통탄할 만했다. 분당(1), 극심한 부도덕(5), 세상 법정에의 소송(6), 우상 신전에서 먹고 마심(10), 주의 만찬에서 먹기를 탐함(11), 말씀사역의 무질서(14), 부활에 관한 위험한 교리(15)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악이 활동했다. 그 모든 것 위에,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그 헌신적인 사람(바울)을 향한 천만부당한 감정을 품는 과오를 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무서운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일컬었다(고전 1:2).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표현된 것을 본다. 3 9절에서 사도는 덧붙이기를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했다. 이 놀라운 표현들은 고린도 형제들 전체를 가리킨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 가운데 그들 모두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으로 인해 그들에게 베푸신 것이 사도의 책망과 호소의 근거를 이루었다.

6장에서 고린도인들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웁게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대다수 성도들이 이전에 이교도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 중에 유대인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 당시 헬라인들은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다. 그들의 예술작품은 오늘날도 찬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함께, 오랫동안 세상을 뒤덮은 우상 숭배의 열매인 극도의 도덕적인 타락이 뒤따랐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핍박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계속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18:10). 그는 고린도의 극심한 타락상으로부터 영원토록 그의 주님의 기쁨이 될 진주들을 끌어내었다그러나 그 어간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안정감있게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들로 교회를 이루게 하고 그들의 새로운 특권과 의무에 대해 가르쳐주고, 그리고 만일 그들이 믿음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면 성령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을 확신하며 그들 스스로의 책임에 맡기고 그들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는데 실패했으며 이에 사도 바울은 슬픈 마음으로 이 첫번째 서신을 띠웠다. 그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매우 강하게 선포했다. 6 11절에서, 고린도 시민들이 전반적으로 빠진 극히 가증한 죄악들 중 몇몇을 언급한 다음 그는 이같이 말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만일 고린도인들이 그 모든 축복 가운데 거하고 있었다면 마땅히 그들은 이렇게 찬양을 발해야 했다

오 비할데 없는 은혜의 하나님,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만 주장하실 수 있는 자리에

우리가 열납되어 서 있으니

당신의 음성을 우리가 즐거이 들으며 당신

의 자비 안에 우리가 즐거워합니다.

 

당신의 즐거움은 당신의 아들 안에 있기에

우리를 그분 안에, 당신의 그 거룩한 자 안에 두시니

당신의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고

당신의 은총이 여기에 있는 우리 위에 비추옵니다! “(한나 K. 불링험)

 

또 다른 은혜의 귀한 선포가 고린도전서 6 19절에서 발견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이 장에서 여섯번 반복된 알지 못하느냐?”는 물음은 고린도인들이 가르침받았으나 놓치고 만 중대한 진리를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무서운 위험성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발람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 148:4)-의 범죄에 분개하신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고린도 성도들, 즉 그분께 더욱 친근하고, 이스라엘보다 훨씬 풍성히 축복받은 백성의 범죄에 분개하신다. 두 경우 모두 징벌이 따랐다. 바울은 성도들이 장차올 날에 세상과 심지어 천사들까지 심판하게 될 것을 고린도인들에게 상기시켰다(고전 6:2,3). 그러한 미래가 우리 앞에 있을진대 어찌 우리가 세상의 수준으로 내려가겠는가! 골로새인들에게 육신적인 타락에 대해 경고하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그는 에베소인들에게도 유사하게 썼다( 5:6). 그들이 아무리 잘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임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리스도의 보혈이 안전히 지키는 까닭에).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판단)이 징벌의 형태로 임할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일부 성도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그들의 행실이 그들 주변의 다른 이들의 행실보다 더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방탕한 항구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 서신에서 정죄당한 모든 죄악을 범하고 있었을 것이나, 그러나 방금 인용된 구절에 묘사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 심판 때에 다뤄질 것이다( 20:12).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오래 전에 영화를 입었기에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심판은 현재 이곳에서 이뤄지는데 이는 우리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다(고전 11:32).

하나님의 통치는 베드로의 서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된 관심사이고 두번째 서신에서는 세상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룩한 삶을 권하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아비들, 청년들, 아이들, 즉 목자와 교사와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 모두가 우리의 언행심사를 주관하시는 아버지의 눈길 아래 살아 간다. 주의깊은 삶이 요청된다. 우리의 나그네로 있을 때전체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거룩한 손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마다 우리를 바로잡아 준다. 4 17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한다. “하나님의 집에-'우리가···· 그의 집이라'( 3:6)-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에스겔 시대에 여호와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심판을 내릴 수 밖에 없다고 느끼시자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9:6).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림으로 멸망을 당했을 때 모세는 아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10:3).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라는 것은 모든 세대에 있어 사실이다( 89:7) . 고린도 형제들은 이 사실을 잊었으며 이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가운데 그들에게 재난이 임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영예에 무관심하게 된다면 그분은 우리를 다루사 그분의 크신 이름을 옹호하실 것이다.

베드로는 이와 관련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4:17,18). 이 질문은 같은 기자의 두 번째 서신에서 답변을 얻는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710). 그렇게 하여 어떤 악도 무한히 용납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어떠하든 간에 죄인들과 성도들 모두에게 심판이 확실히 임한다. 죄인들에게 심판은 도리킬 수 없는 멸망이며 성도들에게 심판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분의 거룩함에 참예케 하기 위해 현재적으로 임한다 ( 12:10). 언제든지 주위의 악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악의 원리를 그 내부에 지니는 악한 세상을 지나고 있는 신자의 길은 쉽지가 않다. 그렇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요, 붙들어주는 은혜 없이는 불가능한 그런 길이다( 19:26). 그러나 겸손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영혼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그의 속에 있는 능력이 그를 대항하여 진치는 능력보다 더 크다(요일 4:4).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않는모든 이 들에게 영원한 심판이 확실하듯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영광이 확실한 것이다

 

브올의 아들 발람에 관한 이 오래 전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실로 소중한 진리의 원리들이 펼쳐 있다!

(1) 원수의 악의도, 하나님의 백성의 불충성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이 사실이 대적의 입술로부터, 대적의 땅에서, 그리고 파괴자가 듣는 중에 선포되었다!

(2) 그분 자신에게 친히 가까이 이끄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임한다

(3)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들을 향해 어두움의 권세는 뿌리깊은(그러나 아무 효과없는) 증오를 드러내고 있다.

(4) 그들이 거룩의 길에서 벗어날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깊은 관심 속에 주의깊게 살피신다. 아무 요청이 없어도, 그분은 자기 백성과, 그들을 해치려는 모

 

(199610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