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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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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5. 12:25 횃불/1997년

겸손한 전도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3).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겸손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20:19). 그는 자신이 완전한 겸손에 이르렀다고 말하기 보다는 겸손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던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하였을 것이다.

전도자가 겸손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자동차가 휘발유를 예비하지 못한 것과 비유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라 할지라도 휘발유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겸손이 없이는 하나님을 움직이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엘리야를 보라 그가 겸손하여 하나님을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일하시지 아니하셨던가? 그러나 그가 갈멜산의 대승전으로부터 시작하여 교만으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계속하면서 영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사역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소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승천 자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이었지만 사역적 차원에서 볼 때 엘리야는 중간에 임무교대를 하고 말았지 아니한가?

그가 바알과 싸울 때 백성 앞에서 한 말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남았다고 이스라엘을 송사하지 아니하였는가(왕상 18:22, 11:3,4). 하나님은 7,000명이나 되는 선지자를 예비하셨거늘 나만 남았다고 하는 자만심은 하나님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교만이었지 아니한가. 그날 이후 그는 급속도로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9 3절에서 그는 이세벨의 경고에 떨면서 생명을 위하여 도망했다. 이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전도자가 대적해야 할 사단 앞에서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였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심한 열등감으로 죽기를 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왕상 19:4). 교만으로 인하여 영력을 잃고 허약해진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사 그를 살리시고 그가 백성에게 한 말을 직접 확인해 보면서 또한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두번이나 제공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질문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였다. 다시 말해서 아합 앞에 있으라 하였는데 왜 여기 있느냐라는 뜻이다

그는 계속 나만 홀로를 말하면서 변명하기에 바빴다. 그는 결국 아벨므흘라 사람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슬픔을 맛보았다. 또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 칠천인이 남아 있다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의 일을 정리하여야만 했다. 그는 아합의 집을 온전히 심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만 했다.

사울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라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나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 9:21).

그러나 그가 왕이 된 뒤 그의 겸손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권위주의적인 법령을 발표하고(삼상 14:24)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므로 크게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마음에 근심을 주고 있지 아니한가?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나이다 하는지라”(삼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한 첫마디는 무엇인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

이후로 하나님의 신은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진 것이며 왕권도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이양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종에게 있어서 겸손은 필수적이며 수없이 강조하여도 부족하리라.

필자가 감히 겸손을 논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우리 중에 또한 겸손을 말하면서 부끄럽지 아니한 자 있겠는가 생각하며 이 부분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도자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겸손한 자 위에 머물기 때문이다. 앞의 사울이나 엘리야 외에도 수많은 선진들이 겸손할 때 하나님이 쓰셨고 교만함으로 영력이 소멸되어 연약한 모습으로 변하지 아니하였던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셨다 하였느니라”( 4:6).

전도자가 겸손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물리치심을 받으니 쓰임받기는 고사하고 자신도 서있지 못하리라.

둘째는 전도는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거역하는 죄인을 잘 섬겨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그를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야 한다. 이 모두가 겸손에 속한부분이 아닌가?

필자는 어느날 구도자를 데리고 온 성도와 대화 중에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3개월을 전도하였는데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모습을 보았다. 필자는 어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그 형제는 필자에게 복음을 듣기 시작한

3년 후에야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는 벌써 잊고 구도자의 상태만 판단하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겸손히 이 세상에 오셨고, 또 그렇게 사시고 겸손히 십자가를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지 아니했는가!

셋째로 전도지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구도자들은 전도자의 태도와 언행을 통해서 겸손과 교만을 가려내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눈에 전도자가 교만하게 보이거나 인격적으로 부족하게 보이면 전도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필자는 어느날 지독하게 자기 이론을 주장하는 구도자와 만나 교제한 적이 있다. 상당한 시간 변론하였다. 그가 상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었고 억지를 부리는 것도 있었다. 필자는 변론이 열기에 열기를 더하고 있을 때 불쑥 나 자신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제를 중단하고 자세를 고치고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제가 여러가지로 부족하여 흡족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여 선생님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즉시 구도자는 말하기를 아닙니다. 제가 교만해서 끝이 안보이는 것 같습니다하면서 말문을 닫았다. 잠시 후에 다시 대화가 시작될 때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진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 교제는 좋은 교제로 연결되어 갔다.

우리는 때때로 강하게 경고하고, 부드럽게 권면하고, 진지하게 대화해야 하지만 이 모든 교제에는 겸손이 배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도자의 겸손한 태도는 교만한 구도자를 겸손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전도자는 겸손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의 성품이 겸손이요, 주님의 사역이 겸손이기 때문이다.

전도의 지혜가 부족하여도 겸손한 전도자는 소망이 있다 전도의 지혜와 경험이 풍부하다 하여도 겸손이 없다면 그에게는 기대를 걸 수 없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아멘.

 

(1997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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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