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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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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5. 12:40 횃불/1997년

말씀의 올바른 해석

 

5. 알레고리 성경해석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많은 부분, 특히 이스라엘과 관련된 예언을 알레고리로 해석한다. 언약신학에서 주로 그러한 것 같은데 성경에 대한 이 이상한 접근은,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교단에서 주로 행해지는 비성경적 관습인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언약을 세우실 때 그 언약의 표징은 할례였다. 모든 남자는 이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려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신앙으로 개종하고자 하는 이방인 남자도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할례의식은 난지 8일된 남자 아이에게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언약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침례를 유대인의 할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여자 아이에게도 유아세례를 베푼다. 할례가 유대인 남자 아이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듯이, 유아세례는 그 세례받은 아이를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으로 데려간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교회를 영적인 이스라엘로 본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과 약속을 맺었고, 이제 신약에서는 교회와 약속하셨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을 강화하려고, 구약의 많은 예언을 알레고리로 다룬다. 그리스도의 천년왕국과 관련된 영광스러운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영해(靈解)한다. 교회의 영적인 축복들도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국가에게 한 약속이 실현된 것으로 본다.

이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이스라엘 국가의 미래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없어져버린다. 20세기에 국가 이스라엘이 다시 수립된 것은 이 같은 해석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구약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교회가 아니며, 교회도 이스라엘이 아니다.

 

구약의 알레고리 해석은 2개의 잘못된 주장을 한다.

첫째 주장은 유아세례가 유아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어릴 적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고 착각하는 비극이 생겼다. 이는 로마 카톨릭이 저지른 잘못이며, 상당수의 기독교인도 이 잘못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둘째로 교회가 이스라엘이므로 민족으로서의 유대인,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미래는 없다는 주장이다(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셔서 지상에서 통치하시는 것, 즉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다가 다시 높아지셔야 되는 것을 없애버린다).

우리는 이같은 알레고리에 반대한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알레고리 해석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알레고리가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이 한 것처럼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삼각형( 4:2931)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깊은 의미는 2차적이지, 구약의 1차적 해석은 아니다. 바울이 창세기의 이 사건을 알레고리 방식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예로 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중요한 질문,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는가?”에 대한 다섯번째 설명일 뿐이다( 2:1921, 3:13, 3:25,26, 4:46, 4:931을 보라). 즉 알레고리 예화는 이 문제를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바울이 알레고리를 이렇게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알레고리의 1차적 기능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창세기 16:15 21:2의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알레고리로 택했다는 것은 이 구절의 문법적 해석을 훼손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구절의 더 깊은 2차적 의미를 찾았다. 바울이 이 구절을 알레고리로 사용한 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성경구절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올바른 방식이다. 즉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있는 명백한 교리적 설명 ?을 예로 들 때 사용될 수 있다.

 

구약에 알레고리가 올바로 사용된 예를 들어보자.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의 창조가 나타나 있다. 이 구절은 명백히 그리고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표면속에 알레고리가 숨겨져 있다. 이 구절은 2차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있다. 즉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의 어두움 위에서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 빛을 어두움에 비추게 하시는 것, 어둠과 혼돈스러운 곳에 빛, 생명, 사랑을 창조하시는 것, 고린도후서 4:6이 이 알레고리의 힌트를 주고 있다.

이같이 숨겨진 알레고리가 발견되었을 때 사건들이 맞아 떨어지기때문에 우리가 알아볼 수 있다. 이 알레고리 예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어서는 안되며 강요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완벽해서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

좋은 예가 에스더서에 나와 있다. 에스더서의 문자적 해석은 표면상의 줄거리에 나와있다.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왕은 대신(大臣) 하만의 영향을 받아 자기 나라에서 모든 유대인을 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모르드개와 그의 조카 에스더에 의해 계획은 좌절된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섭리적으로 역사하고 계심이 나타나 있다. 출애굽 때 모세가 행한 것 같은 기적은 나와 있지 않으나(에스더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도 나오지 않는다. 히브리 원어에서는 각 행의 첫글자를 모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되긴 한다) ,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 사건들 가운데 개입하고 계셨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찡그린 얼굴 뒤에 웃음을 감추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해 시각적인 효과를 띤 운문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에스더서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표면적인 스토리 배후에는 잃어버린, 멸망당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알레고리가 숨겨져 있다.

이 이야기는 네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 된다. 첫번째 인물은 물론 가장 중요한 아하수에로 왕이다-그의 이름은 180번이나 나온다. 그는 죄인을 나타낸다. 둘째는 유대인 모르드개이다. 그는 구원자로 나타난다.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세째는 하만이다. 그는 적대자이며 사단이다. 마지막으로 구세주 모르드개를 알고 사랑하는 에스더가 있다.

이같은 열쇠로 이 알레고리의 문을 열면 쉽다. 에스더 1장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자부심, 기쁨, 열정, 세속정치로 통치하고 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 야망 실현, 허영, 쾌락만을 추구한다. 에스더는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모르드개의 딸로 입양되고 왕과 결혼한다. 에스더는 남편에게 모르드개가 마련한 구원을 말해주나 무시당한다. 왕은 구원의 메시지를 오히려 무시하고 하만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여 악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하만은 모르드개와 모르드개의 민족을 미워해서(왕과의 개인적 관계를 이용해) 죽이고자 한다. 그 때 모르드개는 이해는 가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에스더의 침묵을 다룬다. 에스더는 남편에게 그를 위해 마련해 놓은 구원, 그의 생활 가운데 악한 자의 영향을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자기의 영향력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그녀의 게으름을 책망하자, 에스더는 다시 한 번 왕에게 증거할 것을 약속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와 금식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왕을 개인적으로 다루신다. 어느 날 왕은 잠이 오질 않아 내시를 침실로 불러 역대 일기를 읽게 한다. 내시가 아무 책이나 골라 읽는데 그 내용은 모르드개가 왕을 암살에서 구해냈다는 것이다. 모르드개의 위대한 행위는 잊혀지지 않고 책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한 밤중에 침실에서 두 명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중 하나가 구원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었다.  왕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왕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했다. 그 때 나타난 사람은 하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왕은 이미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자기를 구해 준 자를 위하기로 결심하고 모르드개를 존귀케 하며 합당한 직책을 날이 새면 내리고자 했다. 에스더는 이제 남편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을 설명하는 기쁜 일을 떠맡는다. 모르드개를 죽이려 준비한 교수대에 스스로 달려 죽은악한 하만이 꾸민 계획을 그녀는 왕에게 말한다. 왕은 자신의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이 일을 처리하도록 한다.

왕의 생애에 일어단 이 변화는 곧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알려진다. 구원은 모르드개에 의해 유대인에게까지 퍼지게 되고 부흥이 일어난다. 이는 이방인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8:17). 에스더서는 모르드개의 위대한 행적을 잊지 않도록 부림절을 정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낸 알레고리이다. 아가서도 이처럼 해석할 수 있다(이 책의 저자가 쓴 아가서 연구참조). 이같은 알레고리 해석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통해 보증해 주신 이스라엘 국가를 무효화시키는 알레고리 해석과는 완전히 다르다.

 

(1997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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