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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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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14. 10:29 횃불/1997년

말씀의 거울에 비쳐본 사역자상(1)

이 춘 원

 

견지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은 국민들의 총체적인 타락 이전에 그 나라 지도자들의 도덕적인 심한 부패에서부터 연유합니다. 마찬가지로 모임의 영적 성장은 사역하고 있는 인도자들 내지 장로들의 영적인 상태와 정비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인 견지에서 볼 때 목자들의 영적, 도덕적, 인격적인 상태에 따라서 그 지역 모임들의 상태가 좌우된다는 의미입니다.

양들은 목자들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인도하고, 먹이고, 다스리고, 치고, 돌보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들이 달라지고 변화되고 닮습니다.

양들이 청순한 풀을 뜯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따스한 햇빛과 시원한 그늘 아래 편히 쉬면서 건실하게 성장하여 주인 되신 대목자장께 영광과 기쁨을 돌리느냐, 못돌리느냐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양들을 돌보는 목자로서의 일꾼들의 큰 책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 스승의 인격적인 가르침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양성되듯이 선잔 목자의 영적인 생명 안에서의 양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신령한 일꾼들이 배출이 됩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종들은 인간의 자질과 어떤 여건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만세 전부터의 절대적인 택정함을 입어 쓰이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명하여 불러내 쓰시는 일꾼들은 하나 같이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소명하심의 거룩하신 뜻과 영광스런 소망에 조금도 손색함이 없도록 부응하기 위하여 항상 어디서나 간절한 기도와 근신과 피땀 흘리는 최선의 경주자로서의 노력을 다하는 모범적인 선수들입니다.

사역은 소명감 하나로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사역의 길에 나간 후에 있어야 할 자기 헌신과 자제력, 날마다 엎드리고 날마다 자기 몸을 쳐서 죽이고 모나는 성격을 깎아 내고 주님의 참 종답게 행동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경건한 영적 삶을 계속 하기 위한 뼈저린 훈련과 근신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은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책임져서 온전히 틀림없이 이행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주님이시여!

성경적인 주님의 말씀에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비쳐볼 때 정말 나 자신은 너무나 부족하고 글자 그대로 자격미달임을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3:115과 디도서 1:69의 말씀에 자신을 비교해 보니 그 무엇 하나 제 점수가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C학점은 고사하고 F학점을 맞는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고 하셨는데요, 나 자신은 선한 것이 없고 주님께만 선과 의와 신이 있으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피를 믿음으로 영원한 속죄를 받은 이후로는 나 자신도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거룩함과 선량해졌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성화된 인격과 그 삶에 힘쓰고 있습니다.

정말 이 감독, 장로, 목자의 일은 얼마나 영광스런 직분입니까! 이 일은 참으로 선하고 존귀하고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주님을 믿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교회를 섬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계획이나 야심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택정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셔서 쓰시는 일이시기에 이 위대한 일을 사모합니다. 주님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자신을 부르셨을 때의 간절함과 그 때의 절실한 사모심이 요새는 평범하게 간주하고 있는 육신을 관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다시 불일듯이 새롭고 뜨겁고 감사히 여기면서 나아가겠습니다. 거룩한 소명을 주신 주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시 새로운 사명감에 불을 붙이고 열렬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격려에 힘입어 믿음으로 선한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이것은 신앙 생활은 물론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남에게 비난 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덕성을 갖추지 않고 비인격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상식 내지 예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을 하여 이웃과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사람은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다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끄러운 추문과 비난이 따른다면 교회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때로 뺑소니 교통사고에 관한 뉴스를 듣고 문득 필자가 운전하다가 사람을 쳐서 죽이고 죄의 본능이 발동하여 순간적으로 도망을 가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상상을 했는데 그런 죄를 짓는다면 감독의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거룩한 교회 안에서 장로의 일을 하고 있는 형제가 본처 이외에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거나 음행과 축첩하는 죄를 범했다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나 희랍 문화권에서 사는 이방인들 사회에서는 보통 그런 성적방탕과 남성 위주의 죄악들이 자행되었으나 오직 기독교 안에서는 일부일처의 도리를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잔 자리가 없는 것 같지만 음행의 죄는 자기 몸과 남의 몸과 교회라는 몸까지 더럽히고(성령의 전을 더럽힘으로) 그런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멸하시고 교회가 출교를 선언합니다(고전 3:16,17, 6:18, 5:113).

사단이 그리스도인들 특히 형제들을 넘어뜨리는 무기는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성적인 유혹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남자는 여자에게 약했습니다. 미혼이나 기혼이나 간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 만남이 정욕이나 악의가 전혀 없는 것일지라도 남과 여는 반드시 거리를 두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서로 조심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고 상대를 위한 것입니다.

필자가 오십 여년 동안 직접 목격한 일꾼들의 성적 도덕적 타락은 처음부터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상적으로 볼 때 주님을 열심히 섬길 때 그런 죄악이 저질러졌습니다. 마귀가 그것을 이용하여 주님의 일꾼과 사업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남녀 지간에 계속 만나 같이 의논하고 같이 다니게 되었을 때, 자매가 은밀하고 진실하게 봉사하지 않고 눈에 보이게 전도자를 계속 정적으로 돕고 추종할 때, 공적인 장소에서 여럿이 빛 가운데서 교제를 나누지 않고 남녀 사이에 단둘이 교제가 계속될 때, 아무도 없는 방이나 호적한 곳에서 교제 시간이 길어질 때, 자매들이 무조건 무방비 상태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남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할 때, 과부 자매들을 가깝게 사귀게 될 때, 자기 배우자와의 성적인 원만한 관계가 이뤄지지 않을 때 등등 마귀가 틈을 타고 올무를 놓고 정욕을 자극하여 범죄케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수십년 간 주님을 섬긴 노종이나 젊은 일꾼이나 동일한 인성을 가지고 있고 정욕이 육신에 깃들어 있습니다. 사단은 수천 년 동안을 죄인의 정욕 특히 성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타락시켰고 또 사역자들의 발목을 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사단의 술책과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십시오. 사단에겐 기회를 준다거나 타협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허용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성경 지식이 많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거나 남을 가르치는 자는 잘못하면 외식하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남의 죄는 잘 지적하고 엄하게 다루면서 자기 자신의 죄는 너그럽게 간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구약의 제사장의 범죄가 일반 백성들의 범죄보다 더 무섭고 더 두렵고 더 큰 징벌을 받았듯이, 은혜 시대에 사는 사역자들의 범죄는 더 뚜렷이 나타나고 더 엄히 치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죄일지라도 신자들의 범죄보다 사역자의 범죄는 그 중량이 더 크고 그 비판의 화살이 더 맹렬합니다.

그 죄가 얼마나 두렵고 무섭고 큰지 그런 음행 죄를 범한 자를 멸하고 출교로 징계하고 또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까지 단죄를 했습니다.

주여, 이런 죄악에서 건져주시고 이런 침륜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건져주십시오. 어떤 장로 일을 하는 형제님 필자에게 고백하기를, 처녀 자매의 결혼을 주선하려고 호젓한 곳에서 만났는데 그 형제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합당치 않다고 거부하셔서 그 후부터는 환한 대낮에 공적인 장소에서 교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주님의 이름과 믿음과 기도와 말씀으로써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고.” 사단은 죄인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고 죄를 계속 짓게 만들고 정욕의 노예가 되게 하고 지옥에 가도록 미혹의 길로 이끌고 항상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항상 조심하되 특히 장로의 일을 하는 일꾼들이 주의할 것은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는 일입니다. 구원 받고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결코 지옥에 가는 멸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우를 범하는 경우를 필자는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육체의 정욕과 개인의 쾌락을 누리는데 쓰는 것은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없습니다. 정말 정신을 차리고 주의하지 않고 되는 대로 무엇이나 먹고, 어디나 가고, 무슨 말이든 다하며, 근신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세상 사람처럼 행하게 됩니다.

감각 없는 세상 사람들은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지만 신자는 그런 헛된 생각과 경박한 태도와 음란한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심령과 인격이 근신하는 것이 없고 외적인 생활 태도가 아담하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잃은 사람으로서 남을 실족시키고 교회에 부덕이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닐지라도 신자가 불신자처럼 행동하고 모든 생활 태도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다면, 특히 일꾼들이 언어구사가 거칠고 태도가 천박하고 의식주 생활이 세인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향락에 기울고 있다면 교회에 사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주여, 기도 드리고 말하며, 또 두세번 생각하고 말하며, 또 그리고 말씀에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나 상고한 후 말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되는 대로 말하고, 심사숙고 하지 않고 급히 말하고, 내 주관적인 생각대로 말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 않고 말하고, 주의하지 않고 이 말 저 말 늘어놓고, 은근히 남을 헐뜯는 말을 하고,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고, 남의 비밀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조용한 침묵의 필요성을 모르고 잡담을 하고, 반드시 가부를 내려야 할 때 적당히 말하고, 말다툼과 싸움과 분내는 것이 있고, 농담을 하고, 감정적인 말로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한 나 자신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여, 항상 좋은 말 곧 덕담을 하게 하시고, 말을 가려서 구사하게 하시고, 적당한 때에 합당한 말을 하게 하시고, 쓴 물과 단 물을 한 입에서 내지 말게 하시고, 나의 언행심사와 온갖 삶의 자세와 인격에 절제와 근신과 아담함이 없는 연고로 남이 실족하고 심지어 지옥의 길로 간 일도 있겠사오니, 이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십시오.

, 주여, 정말 나에게 주님의 마음과 인격을 닮고자 하는 간절함을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입술과 경건하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태도를 본받게 하소서. 경외심과 근신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게 하시고, 섬기는 사역자의 자질과 위신을 잃지 않게 하시고, 곤핍한 자를 말로 잘 도와주고 상담하는 학자의 혀를 내게 주시옵소서( 50:4).

나 자신이 모든 일에 절제와 근신을 하지 못하고 정결하고 아담한 자세를 갖지 않음으로 주님께 귀히 쓰임을 받을 수 없고 성도들에게 부담을 끼치게 되고 복음 전파와 말씀 증거의 권위를 잃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경건의 모습은 잠시 꾸밀 수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결코 숨길 수도 꾸밀 수도 없는 인격의 발로입니다. 주님의 인격을 본받아 갖추지 않고 주님을 전한다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벧전 2:9) 자기의 십자가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운다는 말은 주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마음과 인격을 본받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11 :29).

주님의 마음과 인격을 본받은 자가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합당한 도덕이요 예절이었습니다. 참된 이웃 사랑의 발로입니다. 피곤하게 지친 나그네에게 손발을 씻을 물을 내놓고 음식과 쉴 곳을 제공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행실입니다.

특히 영혼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는 전도자들, 목자들, 장로들과 같은 사역자들이 선행에 힘쓰고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큰 복이고, 자신과 교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풍성히 실천할 때에 얻는 큰 기쁨과 위로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가지않는 복음 전파는 교리적인 변론이나 인간적인 지론과 같이 무익한 것입니다.

필자 자신부터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거기에 관한 설교를 때때로 설파하지만 자신의 사랑의 실천은 아주 미미한 것을 고백합니다. 사역자들이 주의할 것은 자신이 받는 것보다 주는 사랑이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남에게 사랑과 봉사와 호의를 베풀수록 현세의 믿음생활에 풍부한 성장과 축복을 받고 내세에 큰 상급과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현세에 내가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현세에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싶고 내세에 손해를 많이 볼 것입니다. 남에게 주는 사역이 위대하고 이웃을 위한 봉사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열심히 나그네를 대접했고, 동방의 의인 욥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행인에게 대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31:32). 그렇게 하여 그들은 이웃과 성도들과 천사들과 우리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형제는 셋집에 살면서 작은 방 하나를 완전히 나그네 된 형제 자매들과 때로는 불쌍한 이들이 묵었다 가는 처소로 체공한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방문에는 나그네의 방이라는 표시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나그네의 방에 들어가 하루를 쉬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무정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연락이나 약속없이 내 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무례하게 생각하고 또 대접하는 것을 힘들게 생각하고 있는지···· 필자의 좁은 마음이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있어 나그네이겠습니까? 형제가 곧 나그네라고 하셨으니, 그를 신실하게 대접하고 합당하게 전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삼 :5). 주님이 자신이 나그네 생활을 하셨다고 하셨으니,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을 섬기고 영접하는 것이라고 교훈하셨습니다( 25:3540).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아신대로 선택하시고 성령님으로 거룩함을 입어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얻게 된 자들이 곧 여러 지역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벧전 1:1,2).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셨고,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은 항상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벧전 1:17, 2:11).

성도가 두렵게 지내는 방법은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심판과 상급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방법은 주님의 이름과 말씀과 성령님과 피 공로와 기도입니다마는 남을 사랑하고 남에게 주는 봉사에 힘쓸 때 그것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는 일을 힘쓰라고 교훈하셨습니다( 12:13). 그는 물질이나 의식주를 탐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일을 하여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범사에 모본을 보였습니다.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친히 돕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힘주어 증거했습니다( 20:3335).

주님의 일꾼들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됩니다. 사역자는 주님이 불러 쓰시는 일꾼이기에 절대로 나태하면 안됩니다. 근면하고 충성스러운 것이 주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사역하는 일꾼들은, 묵묵히 인내하고 순종하며 주인을 섬기다가 마지막엔 자기의 살과 피와 뼈와 가죽까지 다 내어놓는 소와 같은 농부입니다. 목회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목자장 되신 주님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마치 자기 생활을 초월하여 전쟁터에 나아가 죽음의 고난까지도 달게 받아들이는 군인과 같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운동장에 나아가 우승의 면류관을 받기 위하여 법대로 최선을 다하여 싸우는 경주자와 같습니다. 수많은 관중과 증인들과 심판관들이 주시하는 가운데서 그 한 순간의 영원한 기쁨과 없어지지 않는 영광과 상을 위하여, 오랫동안 피땀 흘려 연습하고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의식주에 관한 염려를 잊고 불철주야 쉬지 않고 노력한 후에 비로소 경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들이 엄동설한과 삼복 더위 속에서도 개미처럼 부지런히 영혼들을 찾아 다니고,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진리의 말씀을 강론하고, 봉사자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며 별과 같이 빛나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믿음의 결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나옵니다”( 5:29).

사역자는 그 심성이 착하고 청결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주님의 거룩하신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경계의 목적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교훈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딤전 1:37).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본받지 않고 믿음의 선한 사랑으로 섬기는 생활에 힘쓰지 않고 쓸데없는 신화와 족보와 율법과 교파와 자기 지식 자랑에 착념하다가 어두운 멸망으로 빠집니다. 주님의 생명의 진리 속에서 나오는 선한 사랑의 생활이 없이는 인간의 모든 업적은 배설물과 같습니다. (계속)

 

(1997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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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