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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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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5. 12:42 횃불/1997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1)

호오돈 베일리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시니라”(히브리서 8:5)

 

식양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교회가 탄생합니다.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교회는 그 불변성을 유지하고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길잡이로서 온전한 식양이 주어집니다.

참된 교회는 진리의 기둥으로서 다음의 네가지 원리를 고수합니다. 사도의 가르침, 교제, 떡을 뗌 및 기도가 그것입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2:44).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5:13). 이와 같은 연합을 위해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대적하는 자들이 이 거룩한 명령을 손상시키고 더럽힐 것을 경고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장로들에게 경고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네가 아노니”( 20:29,30) 한편 베드로는 각지에 흩어져 나그네 된 성도들에게 편지합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할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이처럼 분명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적자들은 사악한 일을 계속 도모합니다. 초대교회의 본 모습과 순전함에 종교적 먹구름을 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증거는 견고합니다. 세월이 지나도 진실된 믿음의 소유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복귀하려 부단히 노력합니다. H. 브로우드벤트의 저작 순례하는 교회는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기간 동안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한 많은 성도들이 경건한 식양으로 되돌아 가고자 갈망했습니다. 당시 H. 아인즈워드(Ainsworth)가 쓴 주석서의 서문으로부터 몇 구절을 참고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순전하고 때묻지 않은 가르치심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따라서 그들은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본래적 식양을 수호하기 위해 새로운 토대를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월터 롤리(Walter Raleigh)경의 연설내용이다. -가혹하리만치 법령은 그리스도인들을 거스려 집행됐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문서들을 금지시켰고, 가족들은 투옥됐으며 또한 많은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교회

19세기 초 영국 전역은 영적 결핍의 시대였습니다. 또 한차례의 성령의 역사가 경건한 자들 가운데 시작됩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변호사, 의사, 귀족등과 같은 유력자들이며 주님을 위한 그들의 헌신은 이들을 주목 받게 합니다.  성직자들은 성의를 벗어 던지고 보수와 급료를 포기하며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명성을 자신들이 스스로 취하기를 거부합니다(“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111:9).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 때 하나님의 계명에로의 복귀처럼 그들은 마침내 깨닫습니다. 교회(에클레시아)란 벽돌이나 돌맹이로 이루어진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그의 아드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난 무리란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1318에서 최초로 교회를 언급하십니다. 그분은 가이사랴 빌립보로 오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엘리야입니다, 예레미야입니다 다른 선지자 중 한 사람입니다.” 드디어 시몬이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경건한 계시를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관하여 언급할 만한 두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세우셔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까지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구약의 성도 중 아무라도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관한 일부분의 것이라도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생기기 이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베드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계시대로 교회는 진리되신 그리스도라는 인격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가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구약성경에 예표되긴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교회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보여주듯이 교회에 관한 진리는 신약에서 우리가 접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로를 조명해주며 먼 장래를 위해 자신들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이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교회의 불가분성과 장차 그분이 오셔서 교회를 취하여 가실 것이라는 위대한 진리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교회란 부름을 받은 무리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으로 되돌아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를 테면 이사야 44,45,60,64장과 같이, 이들은 본 장들의 표제(몇몇 영어 역본 성경 가운데 각 장의 서두에 덧붙여진 구절이나 어구들로 한글 개역본에는 나타나지 않음-역주)의 내용이 교회에 관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제들은 잘못된 것으로 영감받은 성경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개정역(RV)에서는 일절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왕국(Kingdom)은 지상에서의 축복을 강조하던 당시 선지자들의 주요 논제였습니다. 에베소서 3:5,6에서 신약의 교회가 계시됩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여기에 기록된 선지자들은 물론 신약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자들이며 하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늘과 운명을 맺었습니다. 이사야 60:11, 66:12 및 아모스 9:11,12에서 알 수 있듯이 저 이방인들은 그날에 이르러 이스라엘과 친교 가운데 계실 하나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오직 지상에서 계획된 섭리 가운데 이들 역시 성령으로 씻김을 받고 하나님의 단일체로 편입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224 및 에베소서 3:14,15의 계시처럼 하나님의 도성과 왕국 안에는 다양한 성도의 무리들과 족속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그날에 이르러 영원토록 특별한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3:21),

 

지역교회

신약에서 교회에 관한 두번째 언급이 마태복음 18:1520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능력으로 세움을 입은 지역교회를 대합니다. 신약에 연이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및 성도들의 교회라는 표현과 이따금 빌레몬서 2절에서처럼 네 집의 교회와 같은 표현도 접합니다. 이들 믿는 무리들은 다른 어떤 분파주의적 명칭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과 함께 하는 자들은 단지 제자, , 친구, 형제, 자녀, 아들, 그리스도인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장로 혹은 감독

각 교회마다 장로와 집사들이 있습니다만 모든 믿는 자들은 제사장으로서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습니다( 1:1, 벧전 2:4,5, 1:46). 장로와 감독의 직분은 이들이 지켜야 할 규율과 함께 언급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딤전 5:17). 디도서 1:5에서처럼 그들은 사도나 그의 대리자에 의해 임명됩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 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세우다(ordain)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디스테미(kathistemi)임명하다’, ‘앉히다혹은 지명하다의 뜻이며 신약에서 20회 이상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4:23에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접합니다. “각 교회마다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본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장로들이 그리스도의 권능을 덧입게 됨을 봅니다. 각 교회는 둘 이상의 장로들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사도나 그의 대리자에 의하여 세움을 입습니다. 신약은 장로 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장로 직분은 오직 주님 자신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bishop)이십니다”(벧전 2:25). 디모데전서 3:1에 관한 알포드(Alford)의 주석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감독(Overseers; 헬라어 에피스코포스로 원래 세속 관료를 지칭하는 말-역주)이라는 단어는 우리들이 말하는 감독(bishop)이라는 표현과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사도행전에서 흠정역(AV)은 일관성을 유지함으로 줄곧 bishop으로 표기했더라면 하는 생각이다. 어떤 곳에서는 overseer, 다른 곳에서는 bishop을 사용함으로 성직제도에 관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몇몇 영어 역본 성경들은 디모데후서 4장과 디도서 3장 끝부분에 영감받은 성경의 일부분으로 볼 수 없는 구절들을 덧붙였습니다. 이를테면 디모데와 디도가 에베소와 그레데에서 감독들을 임명했다

라는 내용으로 신약에서 가르치지 않은 규율을 정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곳에 첨가시켰습니다.

그림(Grimm)은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이것들은 가짜다라고 말했습니다. 개정역(RV)에서는 이같은 구절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1에서 우리는 디도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고린도후서 2:13에서 바울은 고린도 지방으로부터 디도가 속히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며 7:5,6절에서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다시 디도를 만납니다. 오랜 후 바울이 디모데후서 4:10를 기록할 당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버리고 없습니다. 본 내용들로 미루어 디도는 그레데에서 줄곧 머물러 일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이론과 쟁변을 파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복종토록 하십니다. 사도행전 14:23에서 세우다(ordain)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cheirotoneo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손(choir)과 뻗치다(teino)가 결합된 형태로 신약에서 단지 3회 언급됩니다( 10:41, 14:23, 고후 8: 19). 이 단어는 손을 뻗치어(안수하여) 장로와 일꾼들을 세우거나 임명할 때 사용됩니다. 사도행전 10:41에서 택하신’(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 하나님 앞에서 택하신으로 옮기고 있음-역주)이란 표현을 Pro-cheirotoneo란 의미로 즉 하나님 앞에서 손을 뻗치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미는 분명해집니다. 비록 사람에 의한 선출이나 세움의 외형을 빌린다 할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섭리하심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본 표현은 그 의미가 확대될 수 있으며 어떤 형태의 임명에라도 설명이나 이해가 가능합니다. 파크허스트(Parkhurst)는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어떤 외적인 행위 없이도 세우는 일이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W, E. 바인이 헬라어 사전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본 단어는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도행전 10:41은 실제에 있어서 ····앞에서 택하다’(pro-choirotoneo)의 복합형으로 적용되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8:19에서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을 보내기 위해 제자들을 동행시킬 때 이들이 선출이나 지명의 형태가 아닌, 일반적 동의의 형태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성경은 장로들을 임명했던 자들이 사도이거나 사도에 의해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들이었음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도나 사도적 대리자들이 없다는 점입니다. 신구약의 규범은 모두 완성되었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교회의 모든 필요를 능히 감당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각 지체들에게 선물을 주시고( 4:11), 성령께서 일꾼들을 세우시며( 20:28), 성도들은 세운 바 된 자들을 압니다(살전 5:12). 이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며 모임은 여기에 순종하고 따릅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안디옥 교회가 여기에 순종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모든 종 된 자들의 진실된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셨네.

저 캄캄한 광야같은 세상으로

! 이 준엄한 명령과 세움이여

못에 찔린 주님의 손길에 의함이라.

 

주님의 일꾼 된 우리들은 주지하다시피 오직 주님에 의해 인도되고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를 따르라.”  또한 그분의 명령에 응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28:19,20).

우리의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저 광야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들의 귀는 나팔소리에 익숙하고 그들의 눈은 움직이는 구름에 고정됩니다( 9:21).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가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성령께서 금지시킨 일을 알고 있습니다. 무시아를 지나 비두니아로 갈 수 없었으며 이들은 결국 드로아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한 마게도냐 사람의 음성을 듣습니다. 만일 성령께서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당시 유럽에는 복음이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수 주를 보내고 고린도에서 여러 달을 지냈으며 에베소에서 몇 년을 보냅니다. 그들이 일하도록 머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고린도 및 에베소에서처럼 손수 일을 하면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을 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어떤 정당한 보수를 바라거나 마지 못해 사역을 감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골육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원하는 바이라라는 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비춰짐으로 그의 대적자들에게 훼방할 기회를 줄까 봐 염려합니다(고전 9:18, 고후 11:712). 주님은 그분의 일꾼들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신약에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교훈하십니다.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 16:2). 개인적으로 혹은 모임적으로 드려진 재물을 주님의 사역을 위해 필요를 따라 비축해 두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는 주님의 거룩한 명령대로 주님의 일은 이루어져 갑니다. “가르침을 받은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6:6)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또한 양떼들을 먹이는 목자는 양의 젖을 얻을 권리가 있다라고 증거합니다(고전 9:7).

W. 호우스트는 말합니다. “많은 보수를 위해 많은 가르침이나 전도를 한다라는 물물교환식의 원칙은 신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굳이 이런 원칙을 고수한다면 한 예로써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볼수 있겠다. 요나단과 관련한 얘기는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저 위대한 입법자 모세와 요나단과의 관련성을 애써 부정하려 했다. 그들은 모세(Moses)의 이름에 ‘N’을 삽입함으로 변형된 므낫세(Manasseh: ‘잊게 만드는이란 뜻-역주)라는 이름을 요나단에게 부여했다.”  사사기 18:30,31의 개정역(RV)을 참고하십시오. (계속)

 

(1997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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