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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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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6. 16:14 횃불/1997년

노아 - 그의 생애와 그 시대

사무엘 W 제밍스

서문

노아의 방주, 홍수 등 노아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어린 아이들에게 이야기된 것이 통례적이다. 이것은 아마도 동물들에 대한 아이들의 흥미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수년을 거듭하여 노아의 이야기는 부모님들과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어린 아이들에게 반복하여 들려졌다 위층에는 가족이 거할 수 있도록 집이 마련되었고, 아래 층에는 많은 동물들이 성벽같은 그 배의 창 밖으로 내다보는 모습, 그리고 방주를 짓는 길고 흰 턱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으로서 노아를 묘사하는 무수한 이야기 책들이 발간되었다.

노아에 관한 대목이 어린 아이들을 위한 낭만적인 이야기를 제공하거나 성도들의 사역과 읽을거리, 혹은 개인적인 연구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러한 유치한 상태를 벗어난 청년들의 흥미를 제공하고 보다 성숙한 이들에게 적합한 자료를 공급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대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교육받은 사회에서 단순한 신화로 널리 간주되고 심하게 비평이 가해진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그같이 취급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신실한 신자들은 노아에 관한 말씀이 단지 어린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만 간주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실상 노아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네 장이나 할애된다. 그것은 골로새서와 빌립보서, 그리고 주의 백성들에게 그토록 소중한 요한복음 1316장까지의 다락방에서 하신 우리 주님의 담화와 마찬가지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사실 창세기 5장의 마지막 구절과 창세기 69장 전체가 포함된 101구절이 노아의 이야기로 사용되었다.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영감으로 기록된 그 같은 길고 상세한 구절이 큰 상실의 고통없이 무시될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매혹시키고 전율케 하는 놀라운 몇 가지의 진리를 생각해 보고 동시에 보다 근신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1)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심판이 전세계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는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관한 과거의 한 예일 뿐이다.

심판은 종종 행해지는데 그 중에 어떤 것은 큰 규모로서 염병으로 한꺼번에 24,000명이 죽은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은 경우가 있다( 25:19). 또한 포로시에는 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심판들은 가나안에 거주했던 어떤 족속들의 멸망처럼 국가적인 규모로 행해진 것이었지만 노아홍수에 관한 창세기의 기록은 모든 생물을 포함하는 전세계적인 재앙이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6:12,13).

이 심판의 정도가 어떠한지 창세기 7 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이라.” 여기 나와있는 ’(all)모든’(every)이란 단어에 유의해 보자. 방주 외에는 피할 곳이 전혀 없었다.

방주로 인한 구원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컸다.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7:1315).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 이 전세계적인 심판을 무시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거기서 그는 물로 인한 그 심판과 장차 세상에 임할 불로 인한 심판 사이의 유사성을 비교 서술했다.

 

(2) 그 심판으로부터 방주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주목해 보자. 베드로는 그에 관해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여덟 명이라고 언급했다. 창세기의 앞장들에서는 구원이 모형과 경험으로 보여지지만, 여기서의 구원은 단지 사망의 문턱에서만이 아닌 임박한 심판으로부터의 구원도 있다.  우리 하나님이 전적으로 인간을 위하신 것은 놀라운 은혜임을 인정해야 한다.

 

(3) 우리는 또한 이 점을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심지어 그같이 타락하고 포악한 사회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위해 빛을 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심중에 기쁨을 드릴 수 있었다. 빌립보서 2 15절과 같이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4) 무엇보다도 특히 우리는 그 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놀랄 뿐이다. 그분의 언약은 8회나 언급되었다. 성경에서 이 숫자는 새롭고 영원한 것을 암시하며 이는 실로 영원한 언약으로( 9:16) 언급된다. 또한 하나님이 노아를 권념하사’( 8:1)라는 아름다운 말씀을 유의해 보라.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 숨겨졌다. 방주는 거대한 물위에 한 조각 점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노아를 보시고 그의 상황을 아시고 기억하셨다.

 

(5) 또 하나의 가치있는 진술은 그 홍수가 지상의 인간과 인간의 생애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다루심에 대한 극적인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① 홍수 후에 언약을 맺은 후로 다양한 음식이 제공되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사람에게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는데 그 이전까지는 채식만 하였다.

②하나님은 인류의 유익을 위해 계절이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③ 어떤 의미에서 그 저주가 지구로부터 덜어졌다. 즉 경작함으로 보다 많은 수확을 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④ 인간의 상실과 혼란은 별도로 하고 과거 세대들과 정부들로부터 존중되어 온 사형제도가 더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홍수와 그 여파로 인한 영향을 받고 있다. 불경건한 시대에 살았던 노아의 모든 영적인 의미와 함께 홍수의 결과에 관한 역사성은 다른 성경인물들과 주 예수님 자신에 의해 다음과 같이 그 진실성이 입증된다.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라”( 54:9).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14:20).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24:3739)). 이와 유사한 구절이 누가복음 17 26,27절에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11:7).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3).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 3:6).

 

이처럼 우리는 구약의 두 선지자, 주님, 그리고 신약의 두 기자, 이들 모두의 기록을 통해 이 홍수 사건이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주의 깊게 연구함으로 중요한 영적 교훈들을 뽑아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성령으로 기록된 성경을 펼쳐 가며, 그 경건한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그 시대를 통해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유익을 거두어 보도록 하자

 

1: 창세기의 구조

창세기는 흔히 성경의 못자리로 불리워진다. 우리는 성경의 점진적 계시 가운데 있는 모든 위대한 교리들을 창세기에서 발아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모든 학도들이 기꺼이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창세기는 주로 인물 연구로 되어 있다.

창세기는 23세대를 포함하는데, 결과적으로 거기에는 많은 이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창세기의 모든 기록은 뛰어난 여덟 명으로 집약되고 그들의 겪은 경험으로 짜여져 있다. 그들은 네 명씩 두 그룹으로 배열되어 있다.

아담,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는 그 첫번째 그룹을 형성한다. 창세기 111장은 19세대를 망라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처음 시작된 민족들의 이야기를 보게 되며 그것은 노아를 통하여 홍수 이후까지 이어진다.

두번째 그룹은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생애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네 세대는 앞선 세대의 네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들의 경험에 39장이나 할애되었는데, 바로 창세기 1250장까지에 해당된다. 이 부분의 주요 관심사는 더 이상 민족들이 아닌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에 집중된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케 됨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같이 창세기를 여덟 명의 주요 인물로 구분하는 것을 반대할 것이다. 그들은 성경의 첫 책에서 수백 명의 이름들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가인, 이스마엘, 라반과 에서 등을 중요 인물로 꼽는다. 그런데 왜 앞에서 말한 여덟 명만 뽑았는가?

신약성경이 그 여덟 인물에 특히 강조점을 둔 것은 명백하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가치있는 믿음을 지닌 자들로 아벨로 시작해서 에녹과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요셉을 언급했고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이들에다가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을 꼭 넣어야 한다. 그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성격의 교리가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로부터 이끌어진다. 다음에 나오는 이러한 여덟 사람에 관한 흥미 있고 중요한 참고들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아담은 머리됨과 타락에 관해 말한다. 그는 오실 자인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모형이다( 5:14).

아벨은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에게서 우리는 역사하는 믿음의 첫 케이스를 보며,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자였다. 히브리서 12 24절을 보면 그의 형 가인에 의해 피 흘려 죽은 아벨은 그의 민족에 의해 의도적으로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와 대조된다. 아벨의 피는 보응을 호소했지만, 하나님은 죄를 위한 희생제사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를 보셨다. 그리스도의 피는 이스라엘에게 은혜, 평안, 그리고 구원 등 더 나은 일들을 말해 주었다.

에녹은 히브리서 11 4절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유다서 14,15절에서 그는 성경에서 첫 설교자(예언자, 전파자)로 언급됨을 주목해 보라. 그는 주의 다시 오심과 주의 심판하는 큰 날에 대해 처음으로 증거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 올리운 것이 기록된 첫번째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했다”( 5:22)고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사람이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라는 말로 시작한 바울은, 아마도 이때 에녹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15절에서 에녹에 대해 묘사할 때 사용된 말이고, 그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하고 계시한다. 이 과정 또한 에녹의 경험과 유사하다.

앞에서 이미 보았고 앞으로 한층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노아는 신약의 기자들에 의해 설명될 많은 중요한 주제들의 기초를 형성한다.

신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아브라함은 삼중적인 면에서 성령님에 의해 사용된다.

● 세대적으로 -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에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 3:9)이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이스라엘은 그 나라의 권리에 대해 주장할 수 있었다. 마태복음 8 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에 천국에 앉으려니와····마태복음에서 메시아의 족보 또한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점을 유의하라.

● 교리적으로 -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4,5장 갈 3). 삭개오는 믿음의 원리를 따라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주님은 사단에게 매였다가 풀려난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로 묘사하셨다( 13:16).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또한 유사한 믿음을 구사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다( 3).

● 도덕적으로 - 요한복음 8 39,40절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행사와 자신을 대적하고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대조하여 언급한다. 또한 주께서는 5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러한 모든 참고 구절들은 도덕적 의로움의 한 예로서 아브라함을 부각시킨다. 야고보 또한 아브라함의 행사에 대해 언급하며 그를 하나님의 벗으로 언급함으로 그같은 사실에 동의하였다( 2:2123).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이삭에 내해 이중적 관점 즉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816),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의 모형으로 인식함을 발견케 된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4:28,29).

히브리서 11 20,21절을 보면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나그네도 칭한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한다.  비록 다른 서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위대한 본이 된다.

요셉은 비록 신약에서 명백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의 놀라운 모형이다. 그도 또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유명한 그 믿음의 장에 언급되었다( 11:22). 그는 부활에 관한 위대한 믿음을 가진 자로 제시된다. 그는 애굽에 묻혀 있기를 원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특별한 약속의 땅에서 부활되기를 원했고, 그의 뼈를 약속의 땅에 묻어주기를 명했다.

이처럼 그 여덟 사람은 신약에서 설명될 때, 신자에게 고귀한 진리의 정수를 밝혀 주었다.

창세기의 열쇠를 입증해 주는 사실을 더 깊이 추구하면서 다른 모든 일들을 배제하고 이 여덟 명의 특별한 사람에게 주목하고 창세기의 구조 자체를 상고해 보자.

그와 병행되는 여덟 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여러 가지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고, 두번째와 일곱 번째도 그와 유사하다. 이같은 사실을 설명해 주는 몇 가지 요점을 생각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여덟 명 중 첫째와 마지막 사람인 아담과 요셉을 생각해 보았다.

(1) 전자는 에덴동산을, 후자는 애굽을 통치했다.

(2) 전자는 하나님에 의해 쫓겨났고, 후자는 형제들에 의해 쫓겨나는 슬픈 경험을 했다.

(3) 둘 다 두 아들들을 가졌는데, 각각 어린 자에게 축복이 주어졌다 아벨이 가인보다 나았고, 에브라임이 므낫세 보다 나았다.

(4) 각각 한 아내만을 가졌는데, 그 두 여인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모형이다.

(5) 각각 그를 위한 한 의복이 주어졌다. 아담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을 입었고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그를 위해 만든 채색옷을 입었다.

(6) 흥미로운 방식으로 각자에게 죽음이 요구되었다. 아담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319). 요셉은 그의 몸이 아닌 그의 뼈들에 대해 언급한다( 50:25). 그리고 창세기 3장에서는 흙의 원리가 언급된다.

(7) 그러나 가장 현저한 대조가 되는 것은 여자의 유혹에 관한 일이다. 아담은 그를 유혹하는 여자를 인해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그 유혹에 굴복하여 자신과 세상에 파멸을 초래하였다.  요셉 또한 한 여인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는 꿋꿋이 견뎌내었다. 그는 도망침으로 그의 인격을 구원했고, 하나님을 향한 간증을 지켰다.

분명코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그것을 연구함으로 우리의 유익을 얻도록 그분의 말씀 속에 지혜를 나타내신 사려 깊고 전지한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주의깊은 독자라면 그같은 사실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며, 이밖에 또 다른 대조와 비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둘째와 일곱째인 아벨과 야곱 또한 비교될 수 있다.

(1) 아벨은 제사를 드렸고, 야곱은 그 지팡이 머리에 기대어 경배했다.

(2) 아벨은 매우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야곱은 매우 긴 생애를 살았다. 이같은 대조는 신약에서 두 가치 속에 보여진다. 야고보는 생애 초기에 죽임을 당했고, 그의 형제 요한은 원숙한 삶에 이르도록 노년까지 살았다.

(3) 아벨은 그의 형 가인에게 핍박을 받았고, 야곱은 그의 인생 후기에 그의 형 에서를 두려워하였다.

(4) 아벨은 히브리서 11 4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다. 야곱은 그의 재물 중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28:22). 그리고 에서에게 풍성한 예물을 줌으로 끝마쳤다.

(5)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이 둘에 대한 유사성에 있어서 매우 결론적인 요점을 이끌어 낸다. 거기서 각자는 일종의 경고의 구절로서 직접적으로 인용된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야곱의 속임수에 빠져),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2:16,17).

그 장에서 좀더 내려가 보면 24절에 아벨의 피와 그리스도의 피가 대조된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처럼 이 둘은 서로 수세기가 떨어져 있고, 그들의 생애도 홍수에 의해 분리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같은 양상으로 세번째 사람인 에녹 그리고 다섯번째 사람인 이삭이 있다.  이들에게도 명백하게 유사성이 있다.

(1) 7이라는 숫자가 그 둘에게 연관 된다. 에녹은 아담의 칠세손이었고( :14), 이삭은 아담의 이십일세 손이었다.

(2) 둘 다 아버지가 늙었다. 많은 진리가 이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므두셀라는 969세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데, 그의 죽음은 곧 홍수를 도래할 하나님의 정한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신다(33:11). 그러므로 하나님은 므두셀라를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오래 살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에서 악한 날을 연기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비 아브라함은 너무나 나이 많은 상태였기에, 그것은 매우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다. 주의 사자가 사라에게 전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18:14). 후일에 신약은 이삭의 출생에 관하여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밝혔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가르침은 바로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기업으로 얻고자 하면, 육적 출생으로는 충분치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3) 에녹은 휴거됨으로 홍수를 면했고, 이삭은 감사하게도 수풀에 걸린 그 양이 대신 죽임을 당하므로 아버지의 칼을 면했다. 둘 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관계로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 주 예수님의 두 번 오심이 바로 이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을 통해 미리 보여진다. 이삭과 양은 십자가에서 죄인의 입장을 대신하게 될 그분의 초림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에녹의 승천은 교회가 그분을 만나기 위해 들려 올라갈 주의 다시 오심, 즉 재림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다.

이 밖에도 성경을 더 부지런히 연구하는 학도라면 이처럼 대조와 비교를 통해 더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덧붙임은 재미가 없어지고 불필요하며, 영혼의 양식을 공급해 주기 보다 도리어 호기심만 충족시키려는 것으로 유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히브리서를 이해하고자 열망한다면, 신구약을 이처럼 대조하고 비교하는 방식이 받아들여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를들면 아론의 제사직과 멜기세덱의 제사직분에 관한 비교등으로, 이는 신약 성경에서 사용된 성경연구 방법 중 하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복음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사복음서를 조화시키려 애쓰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 대조, 비교함으로 인해 아름답고 위대한 영적 교훈들을 볼 수 있다. 그분의 모든 행하신 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질서정연하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양한 모형과 구조가 질서 있게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연구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놀라운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여덟 명 중 한 가운데 있는 두 사람인 네번째의 노아와 다섯번째의 아브라함이 그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1) 두 사람 다 열번째 세대 즉 노아는 아담의 십대손이요, 아브라함은 이십대 손이라는 점은 분명치 않다. 성경에서 십이라는 수는 출애굽기 20장에서 주어진 십계명처럼 책임감에 대해 말해준다. 다른 예는 누가복음 19장의 열명의 종들에 대한 것이다. 각자는 한 므나씩 받았는데, 주인의 부재시에 장사하여 이를 남기도록 명해졌다.

실로 위의 두 인물의 어깨에 맡겨진 책임은 막중한 것이었다.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아브라함은 한 민족을 형성했다. 이것은 그들이 감당했던 많은 책임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했다( 11:719).

(2) 노아는 홍수 이전의 네 사람의 마지막 사람이었고, 아브라함은 홍수 이후의 네 사람의 첫번째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자는 한 세대를 마감한 반면, 후자는 약속으로 말미암는 다른 한 세대를 열었다.

(3) 둘 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성별되었다. 노아는 물로 인해 옛 세상(벧전 3:20)으로부터 구별되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그의 본토 친척 아비집으로부터 구별되었다( 12:1).

(4) 경외감(두려움)이 노아를 행동하게 한 동기였음을 관찰하는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영광의 하나님을 목도한 결과였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7:1,2)라고 스데반은 증거했다.

구원의 산돌이신 그분께 나아오는 우리 경험의 다양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얼마나 참된 사실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는 은혜와 영광의 하나님께 매료된 것이 동기가 된다.

성령님은 여전히 오늘날도 복음 가운데서 이같이 역사하신다. 영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흑은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동기가 된 것이든 간에,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찾도록 움직이는 요인이다.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 또는 습관과 권세에 대한 피곤함이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더 나은 것과 참된 평안을 갈구하도록 이끈다.

이 두가지 면이 사도 바울에게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다소의 사울로서 그는 다메섹에서 보았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그리스도께 매료된 후에, 그는 빌립보 간수가 두려움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리고, 그들 둘 다 떨었고 둘 다 구원의 은총을 입었는데, 전자는 정오, 후자는 한밤중에 그러하였다.

(5) 창세기의 모든 인물들 중에서 오직 이 두 사람만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갔다. 노아의 언약은 땅과 그 열매의 풍성함에 관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가나안 땅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의 약속의 자손을 통해 그 땅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약의 증표가 각자에게 주어진 점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노아에게는 하늘에 무지개가 주어졌다. 아브라함은 몸에 할례가 행해졌다. 창세기에는 그에 대한 또 다른 정보는 없다. 하나님은 명실상부하게 하늘에 무지개를 두심으로 약속한 첫 표적에 대한 책임을 지셨다. 사람은 몸에 할례를 함으로 또 하나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분과의 관계의 기초를 암시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 두 표징은 모두 주의 오심을 말하고, 그 역사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신실하신 창조주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사람의 삶은 타락의 과정들도 겪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다. 그리고 노아는 술취하여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냄으로, 그의 미래의 후손들에게 부분적으로 그 징계를 초래했다(이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6) 우리는 그들 둘에게 각각 그들을 실망시키는 한 아들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노아는 함에게 실망했던 반면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실망했다.

(7) 신약에서 그들 둘에 대해 밀접하게 언급하면서 종종 대구를 이루는 모습 또한 주목해 보자. 베드로전서 3장은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가정에서 하나님이 남자를 머리로 세우신 것을 인정하는 모든 경건한 아내들의 본이 된다. 노아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끝맺는데, 이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로 인정하는 것을 나타내는 침례에 관한 하나의 본이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2). 그분은 모든 이의 주이시다.  그렇다면 하물며 침례받은 신자의 주가 되시지 않겠는가?

(8) 이 두 성도들에게 제단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네 번, 노아는 한 번 제단을 쌓았다. 그렇지만 노아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최초의 사람이다. 노아는 길을 닦은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노아가 시작했던 것을 발전시켰다. 아브라함이 네 번 제단을 쌓았지만 노아는 단 한 번 제단을 쌓았다. 하지만 그 단 한 번은 최초라는 점에서 영광스럽다. 아마도 아벨 또한 그의 제물을 드릴 때 제단을 쌓았을 것이지만, 성경은 그에 대해 침묵한다. 우리는 성경의 침묵과 첫번째로 언급된 법칙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 각자에게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위대한 사건을 떠나 특히 노아에 대해 연구함으로 유익을 얻도록 하자. 그것이 바로 앞으로 창세기에서 발견코자 하는 우리의 주제이다. <다음 호에 계속>

 

(1997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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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