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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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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3. 17:24 횃불/1998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6)

C. H. 매킨토쉬 지음

6. 심판

  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견해에 상충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특별히 고통스러운 데가 있다. 기독교의 여러 주제와 위대한 표준 교리 그리고 강령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일은 주제넘은 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만일 그것이 단순히 인간의 견해에 관한 문제라면, 교회가 견지해온 신앙, 즉 수세기 동안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왔던 신앙에 대하여 한 사람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아주 무모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독자들의 마음 속에 새겨두고자 했던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혹은 최상의 사람들 중에서 그들에 대한 심판의 차이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권위에 대한 문제이다. 교리상의 분파나 의견의 다양한 유형들 그리고 사상의 어두운 면들이 이제까지 있어 왔고, 또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들이 성경을 공경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만일 그것이 인간의 권위에 대한 문제라면, 단순히 그것이 지닌 가치를 인정해 주면 된다. 반면에,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문제라면, 모든 논쟁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본분은 또한 모든 사람들의 본분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믿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동시에 부활하는 총체적 부활과 같은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살펴 보았다. 초대교회 시대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독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 보았을 것으로 믿으며, 심판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함께할 준비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제기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성경이 과연 총체적 심판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지만,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이와 같은 문제를 살펴 보도록 하자.

  우선, 개인적으로는 성도에게 그리고 집합적으로는 교회와 관련해서, 신약성경은 심판이 전혀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신자와 관련하는 한 심판은 지나갔고 끝나버렸다. 심판의 무거운 구름은 대속자이신 주님의 머리 위에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주님은 진노와 심판의 잔을 우리를 대신하여 비우셨고, 어느 심판이라도 전혀 미칠 수 없는 부활의 새 땅에 우리를 옮겨 놓으셨다. 머리가 되신 거룩하신 주님이 그럴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몸의 한 지체가 된 성도가 심판에 이를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 말에서 대단히 강한 어조를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진술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그 강함은 그 사실이 지닌 도덕적인 가치와 영광의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그의 백성들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짊어지셨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표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곳에 서셨다. 우리에게 돌려져야 할 모든 것을 담당하셨다. 우리의 모든 상태와 그에 따른 모든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처리되었다. 처리 되었기에, 어떤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지고 계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지체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제는 거룩하고 완전하게 처리되었으며, 그 증거로 주님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하늘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이 심판에 이른다고 상상하는 것은 어느 때에든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어떤 목적에서든지, 기독교의 기초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기를 믿는 자들과 관련해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5:24) 하고 확실하게 선언하신 주님의 명백한 말씀을 반대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적합한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생각은 비성경적이며 모순된 일이다. 예를 들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에 대해 심판 받기 위해 사도 바울과 회개한 강도가 함께 섰다고 하자. 이미 이천 년 동안 지나온 터에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총체적 심판 이론이 진리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만일 하늘에 들어 갈 자격을 가름하는 중대한 문제가 심판 날에 해결된다면, 그 일이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만일 그 문제가 십자가에서 이뤄지지 않았다면, 분명히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만일 우리가 심판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며, 그런 심판의 유일한 가능성은 불 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정결하게 되었음을 나타낼 목적으로만 심판 날에 서게 된다면, 심판 날은 단순히 형식적인 모양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말씀을 따라 기다려온 경건한 모든 심령들에게 생각만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실상 그 점에 대해 추론할 필요가 없다. 성경말씀 한 문장이 설득력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논쟁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말씀으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하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신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다시 심판에 넘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효과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도 않으실뿐더러, 그렇게 하실 수도 없다. 그러므로 가장 나약한 성도라도 이렇게 감사와 승리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 관한한, 심판 받아야 할 것이 이미 심판 받았으며,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 심판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나의 행한 일이 시험을 받고, 나의 봉사가 평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자신의 인격, 신분, 자격, 이 모든 것이 거룩하게 해결되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짐을 지신 인자께서는 이제 영원한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분이 쓰신 관은 내게 심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런고로 나는 생명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

 

  이런 말을 제외하고서 달리 그리스도인이 할만한 합당한 말은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체험한 바를 간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역 덕분이다. 그런 사람이 영원한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속죄를 위한 희생의 효력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의심하면서 머뭇거리는 것이 겸손한 듯이 보이고 경건한 모습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심을 품는 사람들과 불확실한 상태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 받기 위하여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있다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 더 얽매여 있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와 본성에 십자가를 왜 적용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심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부활의 새롭고 영원한 기초 위에 굳건히 선 자들에게는 결코 심판이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모든 심판은 영원히 끝이 나고,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서 찬란한 영광과 축복에 대한 소망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5:3146의 말씀이 총체적 심판 이론을 가르치는 게 아닌가 하고 마음에 품어 온 독자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잠시 그 엄숙하고 중대한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동시에 성경의 어떤 가르침도 상호 충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 우리의 신성한 임무라고 여긴다. 신자들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진술이 기록된 요한복음 5:24을 읽어 본다면, 마태복음 25장에서 성도들이 심판에 이른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가 없다. 그럴지라도 마태복음 25장을 살펴 보도록 하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이제 이 말씀에 사용된 용어에 똑바로 주목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본문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크게 손상시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큰 혼란으로 빠뜨렸던 요소들, 즉 흐트러진 생각, 성급함, 부주의, 그리고 부정확 등을 다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라는 말씀대로 소환된 부류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이것은 아주 분명해서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당시에 존재하는 나라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들의 문제, 즉 모든 이방 국가들에 관한 문제이다. “내가 바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 심판의 국면에 포함된다면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은 민수기 23장과 분명히 반대 입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어떤 근거에서나 어떤 목적에서나 이방인과 함께 취급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홀로 설 것이라는 점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정치적인 다스림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이방 국가들 가운데 흩어지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이방 족속의 하나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다.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만일 마태복음 25장에 언급한 심판에 이스라엘이 해당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도 없이 총체적 심판에 대한 생각은 꺼리는 것이 마땅하다. 모두 포함되지 않는다면 전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부류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경은 세 개의 명백한 부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유대인”, “이방인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그것이다. 이들은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마태복음 25장에 언급된 심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해야겠다. 이 진술은 교회가 이미 심판을 면한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단순히 기초할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예루살렘 공회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교회가 열방 중에서 불러냄을 받았다는 위대한 진리에 역시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한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14).

  만일 교회가 열방 중에서 불러냄을 받았다면 그 이방인과 함께 취급될 수 없는 일이고 이는 마태복음 25장의 심판이 총체적 심판이라는 이론을 무너뜨리는 증거를 하나 더 추가하는 셈이 된다. 유대인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교회도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총체적 심판은 전혀 옹호할 수 없는 것으로서 버려져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심판에 포함되는가? 말씀 자체가 그 해답을 제공해 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32). 확실한 말씀이다. 이는 개개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이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심판의 대상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요한계시록 20:1115의 심판 장면과 생생한 대조를 이룬다. 요컨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산 자에 대한 심판을 그리고 계시록 20장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다.

  이 두 사항은 디모데후서 4장과 관계 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현존하는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천년 통치가 끝날 무렵에는 무론대소하고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잠시 마태복음 25장의 심판에 소집되어 있는 무리의 형태를 살펴보자.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33).

  모든 시대를 통틀어 대부분의 교회가 말씀 중에 기록된 양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고 있다.  반면에, 염소는 줄곧 사악한 죄인을 말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여기 내 형제 중에”(40)라는 명칭으로 언급된 이 세번째 부류는 어떤 자들일까? 왕은 이 세번째 무리에 대해 양과 염소에 해당되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심판은 실로 왕의 형제들에 대한 대접에 기초한다. 양 자체가 그 세번째 무리와 동일하다고 한다면 모순이 생긴다. 그리고 말이 전혀 달라진다. “여기 내 지체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 대신에, “서로가 서로에게혹은 너희 중에서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 점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다른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 주제에 대하여 달리 말씀하는 성경도 없다. 이것은 총체적 심판 이론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장면에서 세 부류가 나타나고 있음을 누구라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과 염소 그리고 나의 형제들이다. 세 부류가 있다면, “이 나의 형제들이 양에도 염소에도 포함되지 않는 까닭이기에 총체적 심판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 독자여, 심판은 부분적이고 특별한 것이지 전체적인 심판이 아니다. 그것은 천년 통치가 시작되기 전에 당시에 존재할 국가에 대한 심판이다. 성경은 교회가 지상에서 떠난 후 증거의 말씀이 열방으로 들어갈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는 유대 증인들의 증거하는 천년왕국의 복음으로서, 멀리 세계 곳곳으로 넓게 퍼져서 이교도의 어둠에 덮여 있는 지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증거자들을 받아들이고 친절히 대한 나라들은 왕의 우편에 있게 될 것이다. 증인들을 거절하고 박대한 나라들은 왼편에 앉을 것이다. “이 나의 형제들은 유대인들이요, 메시아의 형제들이다.

  유대인을 어떻게 대우했는가가 장차 그 나라를 심판하는 근거가 된다. 이것이 총체적인 심판을 부정하는 요지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죽은 자들이 왕의 형제들을 박대한 것보다 그에 따른 책임을 더 물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에, 하늘의 영광 중에 어린양 주위에 둘러있게 될 자들은 행위에서 난 것과는 전혀 다른 자격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요컨대, 그 현장에는 단 하나의 특징도, 그 역사에는 단 하나의 사실도, 그리고 그 대화에는, 총체적 심판 개념을 부정하지 않는, 단 한 마디 말도 없다. 그 뿐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역시 더욱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특성과 인격 그리고 목적과 권고하심과 생각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사역과 영광을 더욱 알게 되며, 교회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지위와 교회의 완전함, 그리고 인정하심에 대해 더욱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더욱 철저히 연구하면 할수록 그 내용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되며, 성경에 총체적 심판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음을 더욱 분명히 확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오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의롭게 하시고 내일은 심판하신다는 것을 또, 오늘은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고 내일은 그들의 행한 일대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랑의 주님 예수께서 그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를 자기 죄 가운데 죽은 자들과 함께 심판대 앞에 세우신다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다시 너희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말씀하신 그 죄와 불법 때문에 자기 백성과 함께 심판에 들어간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독자들은 이제 혼합 부활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듯이 총체적 심판이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했을 줄로 믿는 바이다.

  요한계시록 20:1115의 심판은 천년왕국이 끝난 후의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심판에는 가인의 때로부터 천년왕국의 영광 중에서 나타날 마지막 배도자가 포함될 것이라는 정도까지 말해 둘 수 밖에 없겠다. 그 자리에는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그 행위에 따라 심판받지 않을 사람, 그리고 백보좌 심판대의 무시무시한 실재로부터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두려움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뿐인 불못에 떨어지지 않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으리라!

  독자들이여, 이와같은 일을 두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깨끗이 씻김을 받았는가? 다가오는 심판 앞에서 예수께 안전하게 피하였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간청하노니, 다가오는 진노를 당장 피하라! 사랑의 품으로 맞으시려 그대를 기다리시는 구주시요,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더없이 존귀한 이름으로 그대를 하나님께 드리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지금 곧 피하라!

(1998 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