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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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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9. 11:09 횃불/1998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

 

7 : 노아의 믿음의 일곱 가지 요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11:7).

 

앞장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구절에는 일곱 가지 진술이 있고 그 모두는 노아의 믿음과 어떤 면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 보면 연구하는 이에게 보다 풍성한 것을 얻게 할 것이다.

그 구절은 믿음으로 노아는이라는 진술로 시작하지만 믿음의 자격이 요구 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역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노아에게 말씀하셨음에 틀림없고, 창세기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6:13, 14). 노아는 이 메시지가 아무리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할지라도 믿었다.

후일에 그 동일한 원리가 아브라함에게서도 보여졌다. 하나님은 그 나이 많고 자식이 없는 그에게 하늘의 뭇 별을 세어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하고 말씀하셨다. 그같은 말씀이 자연인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였겠지만,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그 똑같은 약속을 직면했을 때 사라가 했던 것처럼 의심하며 이유를 달거나 비웃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는 그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었는데, 이것이 그의 의로 여겨졌던 것이다.

노아는 멸망이 임박했음에 대해 분명하게 전파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이 바로 노아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즉 그 메시지를 믿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오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3 24,25절에서 주님은 오직 두 문제에 대해, 두 길에 대해, 두 운명에 대해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들이 이것을 진정으로 깨닫기만 한다면!

그들은 계속적으로 거기에 어떤 중간 노선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노아 시대에 그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구원 받았고 그 방주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멸망을 당하였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주님은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였다. 만나를 거두는데 있어서 순종하는 백성과 그렇지 않은 백성 둘로 나누어졌다. 주께서는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16:4)고 말씀하셨다. 그처럼 오늘날은 만나가 아닌 그 만나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주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은 시험하시며 인류를 나누신다.  복음은 생명을 얻게 하는 구세주를 전하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사망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의 원리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그의 믿음의 기초를 보게 된다. “아직 보지 못한 일에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증거는 없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는 믿었다. 그는 그 좋은 토대 위에 서 있었다. ‘아직 보지 못한 일이란 구절은 1절의 끝부분과 유사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노아는 홍수나 전 세계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전에 결코 본 적이 없었다. 혹자는 그가 심지어 비가 내리는 것조차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때 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땅은 창세기 2 6절의 말씀처럼 젖어 있었을 것이다.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하지만 노아는 믿었고, ‘경외하심으로 인해 감동되어그 증거를 보았던 것이다. 분명히 그는 자신이 증거로 삼았던 그 동일한 말씀을 그의 전파시에 제시했을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이처럼 1절에서 정의된 믿음을 노아는 7절에서 입증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는 오직 한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어떤 만질 수 있는 것도, 어떤 환상을 본 것도, 환상 비슷한 어떤 꿈도 아닌 오직 말씀만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 말씀을 믿었기에 두려워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다. 그는 비록 거기에 아직 아무 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아주 분명히 보았다. 노아는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20:29).

경외함으로 감동됨은 믿음의 확신에 이르게 한다. 그 말씀은 이미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의 마음이 반응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속적인 지혜는 전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읽혀지고 설명되어질 때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불신자에게나 구원받은 자에게나 반응하기를 원하신다. 만일 그 말씀에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아무런 축복이 주어질 수 없다. 경외함, 감사,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태도들이다.

우리는 이제 나머지 부분의 모든 축이 될 수 있는 방주를 예비했다는 중심적인 진술을 대하게 된다. 여기에 믿음의 증거가 있다. 그의 믿음은 이제 행위로 보여진다. 그는 그가 들은 것을 믿었고 즉각적으로 행했다. 그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2:26).

야고보는 그의 짧은 서신에서 그 사실을 매우 철저히 탐구했다. 그는 또한 참된 믿음은 항상 그 믿음의 모습이 어떤 면으로든 나타나게 됨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다. 히브리서 11 8절에서 동의한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만일 노아가 믿는다고 말했으면서도 방주를 짓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 홍수로부터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만일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이들처럼 멸망했을 것이다. 만일 노아가 그 방주를 짓지 않았더라면 노아 시대 사람 중에 누가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겠는가? 만일 사람들이 그가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을 그러한 모습에서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러하시겠는가? 그러면 아무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증거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히브리 신자들에게도 얼마나 적절하였던가. 그들은 믿는다고 말하였지만 믿음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들 중 몇몇의 마음은 그들이 이미 떠나왔던 유대교로 다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참이었을까? 히브리서 전체가 그들의 믿음의 실재를 나타내며 유대교의 영문 밖으로 나와서 전진하도록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다.

이처럼 방주는 노아가 진실로 믿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였으며, 그의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견고한 것이었다.

그 집을 구원하였으며라는 다섯 번째의 진술에서 우리는 믿음의 구원을 볼 수 있다. 그의 집이란 물론 그의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세 아들의 아내, 그의 세 아들과 그의 아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일곱 모두가 그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많은 짐승들이 구원받았다는 언급은 없다.  이제 방주 안에 들어간 그 짐승들은 땅에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8:17). 하나님은 살아있는 영혼과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된 관심을 갖고 계시며, 만일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양심은 새롭게 될 수 있고,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으며, 둘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개발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짐승에게는 없다.

짐승들은 영리하며 놀라운 본능적인 재주를 가질 수 있다. 그들은 훈련받아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일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은 인간들과 얼마나 다른가! 인간은 그 안에 하나님이 친히 불어넣으신 영이 있고, 첫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양, 즉 하나님을 닳은 성품을 상실하였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분과 같은 도덕적 닮음이 상실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노아에 대한 기록을 볼 때, 그 홍수의 멸망으로부터 짐승들이 아닌 사람들만이 구원받는 것으로 언급한 것이다. 사실 창세기 69장을 제외하고는 짐승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별로 없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라는 대목은 믿음의 증거인데, 우리는 이를 두번째 결과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세상을 정죄하였는가? 그것이 그가 한 설교에 대한 언급일 수 있을까? 물론 그가 한 설교는 그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그 설교 자체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홍수가 정죄한 것이 되겠는가? 분명히 그들은 그들의 죄악된 상태를 알았고, 홍수가 임하여 그들을 쓸어갔을 때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끔찍한 순간에 그들은 노아가 옳았다는 것을 보았고, 그들은 그의 설교를 기억하며 그들이 마땅히 심판으로 정죄됨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방주를 지음으로 세상이 그 때 정죄당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방주를 예비하여라는 구절은 중심적인 것이며, 이 정죄는 그 중심 구절로부터 발생되는 세 가지 결과 중의 하나에서 주목되어 진다. 그 방주는 홍수 훨씬 전부터 오래도록 사람들을 정죄했으며, 어쩌면 그가 설교하기도 전에 상당히 커다란 정죄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 방주의 형상은 마치 큰 음성과도 같았고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방주에 붙여지는 배 널판과 못자국은 부주의한 사람들의 정죄감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노아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르게 살았고, 그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방주를 짓는 것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어야만 했다. 왜 그들은 의문도 갖지 않고 회개도 하지 않았던가? ! 슬프게도, 부주의한 사람은 이미 정죄받은 것이다( 3:36).

그 아들들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면으로든 도왔다는 언급이 없다.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개념이 암시되어 있지 않다. 노아 자신이 그 모든 방주를 친히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일하며 애씀으로 그 방주를 완성했다. 바로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는 개인적으로 그의 가족을 구원하고 세상을 정죄하는 통로가 되었다. 우리 주 예수님과 얼마나 유사한가. 주 예수님은 홀로 갈보리의 그 위대한 사역을 통해 구원을 베푸셨으며,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이들을 정죄하신다. 베드로전서 3 20절이 바로 그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그 경고는 분명했고 오랜 기간이었다. 그 홍수가 임했을 때 모든 이들은 올바르게 심판을 받은 것이었다. 목수였던 노아가 세상을 정죄했다.

믿음의 보상은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라는 대목이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물려받았다. 홍수 이후에 모든 것은 아주 달라졌고, 하나님의 언약이 그에게 세워졌다. 그 새 세계는 매우 번창하였는데, 많은 성경의 예언 연구가들은 그것이 다가올 천년왕국 시대의 그림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믿는다.  놀라운 점은 여기에서 상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음의 의는 아브라함의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15:6). 행위에 의하지 않는 믿음의 원리에 의해 전가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원리가 로마서 3,4장에서 바울에 의해 잘 설명되어 있다.

노아 또한 아래의 말씀에 포함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1:13). 16절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나타내준다. 그분은 그들을 위해 한 성 곧 하늘의 도성을 준비해 주셨다. 노아는 그의 시야를 홍수 이전의 세상에도 홍수 이후의 세상에도 고정시키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믿음으로 모든 이에게 주어질 유업을 얻고자 했으며 영원하고, 온전하고, 영적이며, 영원한 실체를 추구했다.

이처럼 믿음은 그를 홍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오게 했다. 그는 그의 시대의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일했고, 아무의 도움도 없이 방주를 짓는 굉장한 일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내세를 위하여 그 일이나 다른 어떤 행위를 의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그의 모든 축복의 기초였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이 또한 노아에게도 잘 해당될 수 있다. 구원을 경험하고 새로운 질서 가운데로 옮겨진다는 약속은 그가 행한 어떤 율법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때문이었다( 4:13). 노아는 실로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었다”( 4:18). 그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19). 그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20).

노아는 그가 가진 모든 축복을 하나님의 경고하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재빨리 말할 것이다. 그는 믿었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의로 계산된 것이었다.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도 그 동일한 원리 위에서 축복을 받으며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그 믿음의 대열에 더해지게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노아의 경험에서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그 위대한 구원을 엄중한 경고 가운데서 말씀하신 당신의 아드님에게로 주의를 돌리게 하신다( 2:14).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의 인격과 그분의 하신 일에 대한 진술인 복음을 믿는 모든 이는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 그러한 신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인한 의의 후사가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기에 적합하게 된다. 그같은 확신이 로마서 4 24,25절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그같은 놀라운 진술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에게 하셨고, 또한 그분을 믿는 모든 이에게도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목마른 영혼들을 위한 생수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11장에서 노아를 이와 같은 사람으로 제시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가족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었고, 그의 이웃들에게 경고했으며,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다. 실로 믿음은 모든 것이 된다.

마지막 구절의 부분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의 원리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믿음의 기초

경외함으로 ‥‥‥‥‥‥‥ 믿음의 확신

방주를 예비하였으니 ‥‥‥믿음의 증거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믿음으로 구원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의 증거

후사가 되었느니라…‥‥‥믿음의 보상

<다음 호에 계속>

 

(1998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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