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9. 29. 19:46 횃불/1998년

노아-그의 생애와 그 시대(9)

9: 베드로후서에 언급된 홍수

모든 후서들은 말세에 대해 언급하는데, 베드로후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베드로는 노아의 시대에 지배했던 동일한 상태들에 대해 언급했다. 첫 번째 언급은 베드로후서 2장에 나타나는데, 거기서 그는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의 태도로 그 주제를 다룬다. 그 특성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방식들이 나타나는데, 특히 죄악과 불신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심판에서 잘 보여졌다.

그의 화제는 하나님을 알고자 추구하는 많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해로운 가르침을 유포하는 당시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가르침은 또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 아무런 보응도 하지 않고 또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런 처벌받음 없이 그렇게 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며, 실제로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이었다.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벧후 2:3).

개정역은 이렇게 번역한다.

그 심판의 선고는 옛적부터 오늘까지 자지 아니하며.”

그 선고는 아주 오랜 옛적부터 내려졌는데, 하나님은 어느날 갑자기 그것을 실행하실 것이다.

이제 이 진술을 뒷받침 하기 위해 베드로는 범죄자들에게 갑자기 행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과거의 세 엄중한 심판을 예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랜 기간이 지난 것처럼 보인다. 오래 참으심이 끝났을 때, 심판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 되었다.

하나님의 세 심판의 예가 창세기의 첫 부분에 모두 나와 있다.

(1) 창세기 6장의 천사들의 범죄.

(2) 우리의 주제인 노아의 날.

(3)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 원리는 항상 남아 있는데, 죄와 패역은 마침내 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수행된다. 그처럼 노아와 그 홍수는 마침내 범죄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한 예이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과거의 심판에 대한 세 가지 예를 제시하는 유다서의 병행구절을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로, 베드로는 그의 예들을 창세기의 기록으로부터 취하고, 그것들을 연대기적인 순서로 설명한다. 반면에 유다는 그러한 유형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노아의 경우를 남겨두고, 민수기 13장의 이야기를 포함시키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실패한 사건이다. 이 실패는 불신의 결과였고,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광야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분의 기뻐하지 않으심을 나타내셨다.

둘째로, 그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관한 그 마지막 일을 첫 번째에 둠으로 연대기적인 순서를 무시한다.

그가 제시한 세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1) 불신 이스라엘 :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실패함( 13).

(2) 천사들 :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음( 6).

(3) 소돔과 고모라 : 파멸됨( 19).

그는 여기서 역사적인 순서에 집착하기 보다는 도덕적인 순서에 집착한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베드로보다 더 깊은 관점이다.

유다는 그의 유명한 형제 야고보에 의해 그늘에 가리워져서 주로 빛을 보지 못한 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자였다. 그의 지혜는 성경을 도덕적인 순서로 제시하는 능력에서 보여진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남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세 단계를 가진다.

히브리서 3 12절의 다음 말씀처럼 떠남의 첫 단계는 불신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이것을 알게 된 유다는 불신을 첫 번째 예로 둔다. 비록 유다와 히브리서 기자가 진리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사실상 그 말씀은 모두에게 경고를 하는 엄중한 말씀이다.

만일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계속 고집하면, 그것은 마침내 배교, 즉 하나님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유다는 다음 예로 처음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떠난 천사들의 배교에 대해 말한다. 배교는 유다서의 커다란 주제이다. 그는 그 주제가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예로서 그는 패역한 소돔과 고모라를 인용한다. 그들은 로마서 1 28절처럼 패역한 자로서 하나님을 버린 자들이다. 그들의 패역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소돔에서 보여진 불결한 행위들이다. 그처럼 배교자들은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또한 그 배교자가 그 상태대로 계속 나아가면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도덕적 순서를 주목해 보자.

(1) 불신으로 하나님을 떠남 : 이스라엘의 실패의 예.

(2) 배교로 하나님을 버림 : 자기 지위를 떠난 천사들의 예.

(3) 패역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음 : 소돔과 고모라의 슬픈 예.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의를 전파하는 노아’(벧후 2:5)라고 노아에 대해 개인적으로 언급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의 주된 목적은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제시하는 것이며, 조만간 그 심판이 반드시 임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의로운 자와 불경한 자에 대한 현저한 대조가 솟아난다. 노아는 창세기 6장에서 명백히 나타나듯이 불경건한 세대 가운데서 의를 행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가 여기서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의를 전파했다. 그는 또한 이미 상고한 바와 같이 믿음으로 의의 후사가 되었다. 이처럼 의는 노아에 대한 참조 말씀에서 핵심 단어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 불경건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합당한 증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을 증거하신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시기에도 선지자들의 증거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떠날수록 하나님은 더 위대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세벨과 아합이 살았던 그 끔찍한 시대에 활동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마감될 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추악한 우상숭배에 빠졌고 회개하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포로되기 직전 그 어두운 시기에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일으키셨다.

주님이 다시 오실 마지막 날에 그 불법의 사람이 일어나 활동하며 그를 추종하는 모든 자들이 불경건한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그때 주께서는 하나님에 의해 인침을 받은 144,000( 7)과 함께 두 증인( 11)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엘리야 같이 큰 능력으로 사역할 것이다.

홍수 이전에 에녹은 예언했고, 노아는 전파했다. 이들이 아마 성경 최초의 설교자들이었을 것인데, 그들의 증거는 그들 세대의 폭력과 부패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7).

바울은 로마서 11 22절에서 하나님의 이중적인 계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위 구절과 같이 노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였는데, 하나님은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셨다. 노아는 그가 주께 쌓은 제단에서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는 주께 자신의 감사한 마음을 표했고 예배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라는 대목에서 또한 하나님의 엄위를 볼 수 있다. 거기서는 더 이상 자비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 오랜 동안의 참음이 지나가 버렸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은 아무런 치우침 없이 나타난다( 9:28). 이같은 모습은 갈보리에서 우리 죄에 대한 심판에서 보여졌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 8:32).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 하나님이 가혹하신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의로우심에 대한 계시이다. 그분은 사람들을 돌보시고 심지어 악인의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은혜는 그분의 의로우심과 함께 일관된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사랑이신데, 그 둘 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홍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위하심을 나타낸 것이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는 대목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통제를 주목하였다. 그는 이 능력에 대해 다음 장에서 보다 확대한다. 이제 그 홍수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간섭에 의한 것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노아에게 미리 알려졌고 그는 그 홍수를 대비하였다. 하나님은 심판의 성격 자체를 계시하셨고, 거기에는 한 배가 필요했다.

또한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땅에 비를 내려”( 7:4)라는 대목에서 그 때도 주님에 의해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었으며( 2:9),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으셨다( 6:19). 그분은 또한 매일의 삶에서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데 사용하실 수 있으셨다( 13:5). 구약에서 하나님은 물로 피가 되게 하셨고( 4), 홍해를 가르시며 요단강을 가르셨다(3,4). 그분은 또한 사무엘 시대에 추수 때에 비를 내리게 하셨고(삼상 12:17), 엘리야 시대에는 그분의 기뻐하지 않으심을 나타내기 위해 삼년 반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게 하셨다. 계시록에는 물을 차지한 천사가 언급되어 있다( 11:6, 16:5).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 구절에서 제시되는 또 다른 면은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로부터 경건한 자들을 구별해 내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매우 엄숙한 사실이다. 시편 1편에는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주의 깊은 독자는 그 시편의 내용이 성별로 시작되고 성별로 마쳐짐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불경건한 자들의 세속적인 지혜로부터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야 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것이다. 그 시편은 하나님이 의인으로부터 경건치 않은 자들을 영원히 갈라낼 다가올 생명에 대한 것으로 마친다.

많은 성경에서도 이러한 엄중한 교훈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마태복음 25 46절이 그러하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베드로는 9절에서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그 홍수의 물이 노아를 이전의 문명과 그 부주의하고 불경건한 그 세대로부터 분리시켰다.

휴거(살전 4:1318)는 갈보리 사건 이래로 모든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구별시키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모든 자들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들려 올려지는 사건이 뒤따를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그들이 아는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성도들을 분리하는 커다란 구별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에녹과 노아의 모습에서 미리 보여졌다.

주께서는 공생애 사역 기간에 두 종과 열 처녀의 비유, 그리고 열 달란트의 비유 등 죄인들로부터 성도를 분리해 내실 것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에 대한 비유도 이에 덧붙일 수 있다. 세례 요한 또한 타작 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는 똑같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엄중하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며 이제 언젠가는 세상 가운데 끔찍한 실재로 임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의 다음 참조는 3장에 나와 있는데, 이는 더 한층 자세한 것이다. 또다시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 놀랍고도 아름답게 진술한다. 베드로는 그 당시 기롱하는 자들에 대해 말했는데, 그는 그가 설교하던 도중에 그러한 자들을 많이 겪어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특히 주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조롱했는데, 말일에는 그러한 조롱하는 태도가 더욱 증대될 것이다. 베드로가 지적한 것처럼 그들은 과거에 대해 조롱할 수 없다. 인류 역사는 인간의 죄와 실수 그리고 그에 합당한 심판에 대한 실례로 가득차 있다.

성경의 어떤 인물들과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해 부인하고자 하며, 과거에 대해 눈을 감고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베드로가 알려 주는 것처럼 사람들은 고의로 무시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알려 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배운 적이 없기에 모른다(살전 4:13). 그러나 의도적으로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은 더욱 악한 상태이다.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하고 그들은 조롱한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 홍수는 어떠한가! 그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얼마나 놀라웠던가에 대해 밝혀주는 논평을 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케 하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이루신 사실을 증거한다. 5절에 제시된 창조는 특히 셋째날의 모습이다( 1:912). 조롱하는 자들은 창조에 대해 말하지만 베드로는 그 창조의 근원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말씀이 바로 창조의 수단이었다. 그 두 구절이 나란히 물로부터 땅이 솟아 나왔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벧후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1:9,10).

홍수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 순서가 뒤바뀌었다(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 3:6).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강력하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이루어진다.

노아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들에 대해 요약해 보자. 주께서는 그 끔찍한 날의 그 부주의한 사람들이 살았던, 노아의 날(the times of Noah, 시대)에 대해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1장은 그의 신앙의 미덕을 지닌 노아 자신에

 

(1998 5월호)

 

'횃불 > 1998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  (0) 2014.10.06
사도행전 나타난 기도  (0) 2014.10.06
레위기의 다섯 제사(1)  (0) 2014.09.29
말씀의 올바른 해석(17) - 예언  (0) 2014.09.29
우리가 진정 드려야 할 것  (0) 2014.09.29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8)  (0) 2014.09.23
모든 스승보다 명철함  (0) 2014.09.23
그리스도를 만난 윌리(7)  (0) 2014.09.23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