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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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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4. 19:50 횃불/1998년

레위기의 다섯 제사 (3)

 

3. 소 제

※ 참고 구절 : 레위기 2, 6 1423, 시편 16, 요한복음 6 33

 

소제는 다른 4종류의 제사와 달리 피흘림이 없는 제사입니다. 생명을 제하여 버림은 없지만 향기로운 냄새를 위해 소제물의 일부를 단 위에 불살랐습니다.

소제에는 짐승의 고기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거나, 바르거나, 첫 이삭을 볶아 빻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해 소제물로 삼았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 아니라, 점과 흠이 없으시고 온전하신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놀라운 예표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흠 없으신 인성을 지닌 분이셔야 했습니다. 영생하시는 아드님이시며 육신을 입으신 그분만이 그 놀라운 일을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신 아드님 안에 거한다는 것의 그 소중함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드님 안에 거함은 하나님과 친교를 맺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104:34).

우리가 함께 영광스러운 아드님 안에 거할 때 이것이 참으로 우리 마음에 확증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보여주는 것임을 항상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형제를 대속할 수 없으며, 형제를 위한 대속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49:7,8). 이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값이 지불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값을 지불할 유일한 합당한 분은 아드님 한 분 뿐이시며, 그분만을 영원히 대속자로 세우셨습니다. 이 대속의 업적을 향해 어느 누구의 어떠한 노력도 전혀 소용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도달할 수 없는 너무 큰 업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낮은 자리로 오셔서 죽음의 고난을 통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그분은 완전한 분으로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으셨습니다. 자기의 형제를 위해 하나님 앞에 대속의 예물로 홀로 고초를 겪으셨으니 이는 욥이 울부짖었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양척(하나님과 나)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중보자)도 없구나”( 9:33)라고 한탄했는데 그 해답이 디모데전서 2 5절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33: 24)라고 엘리후가 말한 것처럼 그 대속물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기쁨으로 취하시는 음식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제의 비밀을 통하여 더 밝히 알아보겠습니다.

소제는 번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인성과 그분의 이루신 일이 공존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분리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발자취와 그분의 헌신적인 생애가 죄를 없이하거나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죽음 속에 쏟아버리신 그분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잔을 들고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죽으심을 분리시켜 보면, 그분의 어떠하심과 우리의 본래 어떠함을 생생히 대비시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애는 희생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으니 그분의 생애와 죽으심의 의미가 소제와 번제를 떼어놓을 수 없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 오류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그 가르침의 잘못된 것을 알기만 하면 바른 길로 돌아섰으며, 돌아선 후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거짓 가르침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보았습니다. 꽤 오래 전에 젊은 부부를 만나보았습니다.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저를 보며 열심히 성경을 공부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맑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 그들은 종교서적 판매원으로부터 소개받은 몇 권의 책에서 많은 신앙적 도움을 받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천년왕국의 여명’(Millennial Dawn)이라는 책자에서 그들은 놀라운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 책자들 속에 축복의 말씀과 진실된 가르침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설탕을 바른 독약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분의 이루신 일에 대하여 완전히 왜곡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이 땅에 오시기 전,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우주 안에서 가장 고결하게 지음을 받은 피조물로서 그의 신성은 완전히 버린 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그의 인성이 소멸되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예수는 반드시 죽어야 하며 다시는 살아나지 말아야 하며 영원히 죽음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것은 신성을 지닌 새로운 존재로, 이제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의 신으로서 존재하며 언젠가 한 무리의 승리자들이 그와 똑같은 신성을 지니고 구속의 사업에 함께 동조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얼마 후 제가 성경과 비교하여 읽어보라고 권했던 일련의 참고서적을 읽은 후 자신들이 거짓 가르침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섰습니다. 자신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였다는 것을 알고는 그 사악한 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의 구분은 당신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다르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틀린 것입니다. 이단인지 아닌지 구분짓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것을 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옳게 알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소제의 예물

이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소제에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레위기 2 13절까지 읽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하나님의 음식인 소제가 고운 가루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1). 고운 가루란 그 속에 거친 곡식 알갱이가 조금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인성을 아름답게 묘사하신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한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또 죄로 말미암은 궁핍이나 절망의 작은 가능성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내 인간성을 묘사하신다면 옛날에 쓰던 골동품 방아에 찧은 작은 알갱이 투성이로 된 거친 가루 한 줌이리라.”

우리에게는 거칠고 투박한 알갱이들이 무수히 많다고 묘사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보여진 그 완전함이여!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놓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기름은 항상 성령을 예표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뜻합니다.

사도행전 10 3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 기름부음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직후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만족을 얻으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3:17). 이것은 유향의 향기를 말합니다.

고운 가루에는 완전함이 있으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임하셨습니다( 3:16). 이 말씀은 고운 가루에 부어지는 기름을 뜻합니다. 그와 더불어 향기나는 유향이 있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말해 주는 예표로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향취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1:3)라는 표현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3).

2절을 보면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소제물 중에서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릅니다. 불사른 소제물은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예물이 됩니다. 이것은 또한 여호와의 음식물입니다. 제사장은 남겨진 것을 먹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제사장이 함께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즐거워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교제인 것입니다.

 

414절은 예물을 준비하는 여러 형태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에는 화덕에 구운 것”, 5절에는 번철에 부친 것”, 7절에는 솥에 삶은 것등 각 예물을 여러 방식으로 준비합니다. 어느 방식이든 모두 열을 가하여 소제물을 준비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강도 높은 연단을 받는다는 예표이며, 어느 측면에서나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세상에 내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의 소제물이 나옵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경우는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몸에 잉태하여 육신을 입으신 예표이며, 신성이 결합된 완전한 인격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됨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것입니다.

또한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과,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이 두 진리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버지로 잉태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 그분의 사역이 시작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소제에는 금지된 사항이 있었습니다. 소제물은 만드시 무교병으로 만들어야 하며 누룩을 넣은 빵은 절대로 금하였던 것입니다( 2:11). 이것은 우리의 구원자의 인성에 죄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항상 죄악을 뜻합니다. 신약에서도 구약에서 나오는 누룩의 비유가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 7,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준비를 위해 집안 구석구석에서 묵은 누룩을 찾아내어 내버리듯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 믿는 자들도 우리 마음의 악을 깨닫고 십자가의 빛에 모든 죄악을 던져버립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라는 말씀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5:9)라는 말씀처럼, 정죄받지 못하고 발견되지 못한 작은 죄나 악이 우리의 전 신앙을 오염시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16:6), 그리고 헤롯의 누룩( 8:15)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위선과 자기 의()를 말하며, 사두개인의 누룩은 악한 교리나 거짓 가르침을 말하며, 헤롯의 누룩은 세상과의 타협 및 정치적인 혼합을 말합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누룩을 선으로 표현한 곳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3 33절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의 경우를 놓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복음이 전파되는 비유라고 말하고 있으나 성경 어느 곳에 그와 같이 복음을 숨기라고 한 말이 있습니까? 복음은 어느 곳에서든지 감추이지 아니하고 드러내놓고 전파되며 예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10:27)고 하셨고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 나오는 여자는 거짓 교회를 뜻합니다. 이 여자는 누룩을 세상 속에 감추지 않고 가루 서말 속에 감추었으니 누룩을 전혀 넣지 말아야 할 가루에 누룩을 넣어 소제로 삼은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말씀이 거짓 교회로 인하여 오염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누룩을 넣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은 누룩 없는 소제물로, 죄 없는 완전한 인자이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8:46)라고 말씀하실 만합니다. 여러분이나 나는 감히 이런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밖에서 꾀면 내 안에는 반역자가 있어,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반역자에게 내 마음의 빗장을 쉽사리 열어 준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임한 모든 시험은 바깥에서 왔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15)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짓는 일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죄와는 상관없이 떨어져 계시는 분입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죄로 인하여 시험을 받으신 적이 없는 그리스도가 바로 누룩을 넣지 않은 소제물이었습니다.

 

소제에는 결코 꿀을 사용해서는 안되었습니다( 2:11). 꿀은 자연의 단맛이지만 가열하면 곧 시어져버립니다. 그리스도의 품성에는 자연의 단맛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시며 신성이 부여되신 분이며 거룩한 분입니다. 그분의 모든 사랑과 정감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의 사랑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 없으니 그분의 사랑은 변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모든 간계함이나 베드로의 세 번이나 부인하는 어리석음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3:1)를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우정은 얼마나 자주 끊어져 나가며, 사랑은 얼마나 자주 증오로 바뀝니까! 그분에게는 이러한 모순이 없었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2:13).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말씀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였으니 이는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4:6)고 하셨으며, 이외에도 마가복음 9 4951절에도 소금에 관한 준엄한 말씀이 있습니다. 소금은 생명력 있는 의로움을 보존하는 힘이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이며, 위로부터 난 우리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관련된 것들을 보다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레위기를 묵상할 때 더 많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더 친숙하게 알아갈 때 오류에 빠지는 위험을 면할 수 있습니다.

소제물의 성분을 보아도 그 독특함이 있습니다. 거친 가루를 예물로 삼는 일은 없었습니다. 거친 가루는 모가 많이 나 있습니다. 소제로 드리는 예물은 아주 고운 가루로 만들어집니다. 이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인성을 묘사한 것으로, 인자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침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4복음서의 놀라움이여! 그들이 영감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그리스도의 고귀한 인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4복음서가 쓰여진 것은 기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문학 작품에 나오는 인물이 예수님의 인성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갈릴리의 가장 보잘것 없는 동네인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문화나 교육의 혜택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신 그분은 이 세상에 태어난 자 중 최고의 신사이십니다. 또 예수는 온유하고 자비하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모두에게 참되고 진실한 분이셨습니다. 격언에 이르기를 공손이란 가장 친절한 것을 가장 친절한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외에 누가 이러한 모범을 보였겠습니까? 그분의 생애는 19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상을 채우는 향기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늘로 올리워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 보좌에 앉으사 우리의 높으신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자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1416절에는 또 다른 양상의 소제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이삭을 잘라 불에 볶아 찧은 것으로 예물을 삼는 소제물이 나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바릅니다. 이것은 죽으셨다가 영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완전함을 입고 영생의 영광 속에서 하나님께로 올리우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 예식 또한 제단 위에서 행해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부활이 그분의 죽으심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그리스도가 바로 다시 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처럼 그리스도를 먹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즐거워하시고, 우리는 여기 땅 위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소제의 규례가 있는 6 1423절은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제사장은 자기의 분깃을 취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를 기쁨으로 누리며 성전에서 공급을 받으며 살아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우리의 영혼을 살찌워 갑니다.

 

(1998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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