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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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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4. 19:53 횃불/1998년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11)

 

10. 달란트 비유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부분은 목회적 책임을 다시금 강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해 보는 일이다. 주님께서 승천 하신 후, 그분이 떠나 계시는 동안, 일을 맡은 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입장은 다음과 같이 열처녀 비유를 요약해 볼 때 분명해진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2513).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14).

  마태복음 24 4551절에 있는 종의 비유와 달란트비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집 내부에 관한 일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세계 밖의 사역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일에는 모든 사역의 기초,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여해 주신 은사와 권위라고 하는 위대한 기초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주께서 자기 종들을 부르시고 자기 소유를 그들에게 맡기셨다. 종들도 그 의 소유이고 맡겨진 것도 주인의 것이다. 주님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사람을 불러 사역을 하게 할 수 없으며, 주님이 아니고는 그 아무도 영적인 은사를 줄 수 없다. 주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일을 맡기지 않고는 그 아무라도 주님의 사역자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종교적인 일꾼이 되어서 복음 설교를 하고 교리를 가르칠 수 있을 테지만,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집 안 일에 대한 문제라면 그는 주께서 주의 집을 맡아서 다스릴 자가 될 것이다. 세상 밖 의 문제라면 주께서 일꾼들을 불러 자기의 소유를 맡기셨다는 말씀이 그 해답이다.

  사역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이제까지 있어온 가장 위대한 사역자들 중 한 사람이 말한 바 그 진술 속에 매우 힘있게 구체화 되었다. 그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사역의 수단이나 특성, 흑은 규모가 어떻든지 모든 면에서 이 진술은 분명하다.

  주님만이 어떤 사람을 사역으로 이끌 수 있으며,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만일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사역을 하든 그의 동료가 하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요 성경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것 같이 참 사역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인도하심을 믿는 다면 하나님의 집 안이든 밖이든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임명과 능력으로 시행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지 않은 경우라면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더 해악한 일이다. 사람이 스스로 사역자가 되든, 동료들이 세워서 되든 그것은 전혀 무익한 일이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부터 온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무모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침범한 것이며 그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 못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이 위대한 사역의 원리를 완전히 포착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 일은 엄숙한 만큼이나 또한 단순하다. 더우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으로 순종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는 자들은 이 사역이 진실로 하나님께 그 기초를 둔다는 사실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사역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말씀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보기를 바란다.

  집을 맡은 청지기의 비유를 본다면 주께서 맡기실 자란 말씀을 읽게 된다. 그는 스스로 집을 다스리는 자가 되지 않으며 자기 동료들에 의해서 임명 되지도 않는다. 그 임명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또한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기고 있다. 사람을 부르시고 준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같은 진리에 관한 다른 면을 누가복음 19장에서 볼 수 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 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9:12, 13).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인간의 책임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말씀에 핵심적인 원리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임명하에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 유사한 사례를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다.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소원을 이렇게 아뢰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1:24,25).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의 문제나, 14장에서 장로들에 대한 문제, 그리고 지역교회의 책임에서도 바로 사도적인 임명에 의해 이뤄진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임명으로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집사로 세우지 못한다. 하물며 장로는 더욱 그럴 수 없다. 전자의 경우, 집사들은 성도 들의 재물을 관리했고 장로들은 성령의 은혜와 질서 속에서 충성된 사람들을 선택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임명하는 것은 집사들이건 장로들이건 간에 다 하나님께서 행하셨다. 그래서 은사에 관한 문제이든 지역교회 책임에 관한 문제이븐 모두가 다 순전히 거룩한 기초에 근거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다시, 서신서를 참고해 보면 동일한 진리가 온전하고 불멸의 광채로 우리 앞에 빛난다. 로마서 12장 초반부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초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36).

  고린도전서 12장에도 유사한 말씀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18,28).

  에베소서의 말씀도 참고해 보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4:7).

  인용된 이 말씀들과 또 더 인용할 수 있는 말씀들은 우리가 독자들에게 강조 하고자 하는 진리, 즉 모든 부분의 사역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사실을 진술한다.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인간의 권위로 사역을 한다는 사례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말씀은 우리가 인용하고 있는 비유인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겼다고 한 대로 이 짤막한 문장 속에 축복된 가르침을 주고 있을 뿐이다. 사역에 대하여 신약성경이 전반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가르침이 여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이 교리를 깊이 인식하여 생활전반에 그 영향이 미쳐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역의 은사를 담기에 적합한 그릇이 있는가?” 분명히 그것이 있다. 바로 그러한 적합성이 우리가 인용하고자 하는 말씀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5).

  이는 매우 흥미롭고, 동시에 놓쳐서는 안되는 요점이다. 주님은 어떻게 그것을 쓰시려는지 잘 알고 계신다. 주님은 그 그릇에 담고자 하시는 은사의 특성을 잘 알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그릇을 지으신다. 주님께서 또한 그와 같이 사람을 만드신다. 바울은 그가 담당해야 할 일과 후에 담당하게 될 역할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그릇이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경우가 다 그와 같다. 하나님께서 만일 어느 한 사람을 대중적인 설교자로 사용하시려 한다면 그에게 큰 폐활량과 목소리와 맡기실 일에 적합한 체격을  주셨을 것이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사람의 능력과 관계된다.

  이 점을 알지 못한다면 사역의 참된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요, 다른 하나는 그 은사를 담을 그릇인 사람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으며, 인간의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모든 길은 언제나 완전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망쳐 놓는다. 사람의 손이 닿기만 하면 광채 나는 하나님의 솜씨를 퇴색케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사역이 그 근원과 특성, 그리고 목적에 있어서 거룩하다는 점이다. 만일 독자들이 이 위대한 진리를 확신한다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모든 주제가 주님의 재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여러가지 면에서 깊은 관련이 있다 산상에서 하신 말씀에서 주께서는 그 문제를 거듭 거듭 소개하시지 않던가? “주의 다시 오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하고 묻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것이 그들에게 주셨던 완전한 해답이 아니던가? 특히 주님의 재림이 말씀 전체로 보나 부분적인 면으로 보나 바로 핵심적인 내용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주요한 주제가 무엇이겠느냐고 질문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역이 아니겠는가? 집을 다스리는 자가 된 종의 비유를 보라. 어떻게 그가 섬기는가? 주인이 다시 돌아온 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섬긴다. 말하자면, 사역은 그 자체가 떠나가는 것과 다시 돌아오는 것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역은 이 두 개의 큰 사건 사이에 위치하고, 그 두 사건에 의해 특징을 이룬다. 그런데 사역을 실패하도록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악한 종이 마음에 이르기를 주께서 더디 오시리라”, 그리하여 저가 종을 때리고 술친구와 더불어 먹고 마시기 시작하니라.”

  달란트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영혼에 엄숙히 경계하는 말씀은 내가 돌아오기까지맡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든 세상에서든 사역은 주님의 재림의 관점에서 수행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모든 종들은 주인 앞에서 회계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실은 사역의 모든 영역에서 종들의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줄 것이다. 주님의 한 종이 다른 종들에게 격려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18).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찍이 일했던 종, 가장 헌신되고 뛰어난 은사를 받아 효과적으로 일했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가장 탁월하게 일했던 청지기요 지혜로운 건축자요 교회의 위대한 사역자이며 복음 전파자였던 특출한 종, 진귀하고 고귀한 그릇이었던 사도 바울은 그 날을 바라보며 그의 일을 수행 했고 그의 사역을 성취했으며 거룩한 책임을 감당했다.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 의의 면류관을 씌어줄 그 엄숙하고 영광된 순간을 바라보았고,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특별한 은사를 받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한 바울에게만 아니라, 우리 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 바울은 광채나는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는 오해를 갖지 못하도록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는 축복된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이 복된 말씀을 인하여 주를 찬양하리로다! 그 영광된 날을 눈 앞에 두고, 주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일 뿐 아니라, 온 뜻과 온 마음으로 섬기는 일에,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격려해 주시기를!

  달란트 비유의 종결부에 그 두 가지 사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인용해 보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25:1623).

 

  마태복음에 주어진 달란트 비유와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 사이의 차이를 주목해 보는 것은 흥미있고 유익한 일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누가복음 19장에서는 인간의 책임을 다루고 있다. 전자의 경우, 종들이 각각 똑 같은 양을 받지만, 후자에서는 각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되 주인의 뜻을 따라 주어 진다. 계산할 날이 이르렀을 때, 누가복음에서는 일을 한 것에 따라 분명한 상이 주어졌고, 마태복음에서는 내가 더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하는 말씀이 주어진다. 그들이 무엇을 가질 것인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인지 그들은 들을 수 없다. 주님은 주권적으로 은사를 주시고 상을 주신다. 가장 값진 상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하시는 말씀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보다 더 나은 상이 없다. 열 고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자도 물론 있을 것이다. 모든 책임을 수행하고, 봉사를 다하며, 주어진 일을 다 마친 자들에게 충분하고 확실한 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들 모두가 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 바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하는 말씀 속에서 빛이 난다. 이에 비교 할 수 있는 상이 다시 있겠는가? 이 말씀 속에 살아 숨쉬는 주님의 깊은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의의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의 발 앞에 내려 놓을 것이다. 의의 재판장이 주실 바로 그 면류관을 우리는 사랑하는 구주요 주님이신 예수님의 발 앞에 기꺼이 내려 놓을 것이다. 면류관의 광채보다도 주님의 사랑의 미소가 더 깊고 강하게 우리를 감동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감하기 전에 덧붙일 말이 있다. 누가 일을 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주인의 달란트를 숨길 것인가? 누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드러날 것인가?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요,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바로 그 자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5:2430).

 

  얼마나 엄숙한 말씀인가! 두 종은 얼마나 서로 다른가! 하나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신뢰하며 섬긴다. 다른 하나는 오해하고, 두려워하며, 불신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반면, 다른 종은 바깥 어두움에 던져져 이를 갈며 슬피 운다. 이 얼마나 영혼을 압도하는 두려운 장면인가! 그러면 언제 이런 일이 이루어 질 것인가? 주께서 돌아오시는 바로 그 때이다!

 

(1998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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