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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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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4. 19:51 횃불/1998년

갈림길

 

 엄마!”

언제 불러 보아도 나의 마음 깊숙히 푸근함이 전해 온다.

그 누구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친정 엄마!”

결혼한 여자에게 있어서 친정 엄마보다 더 친근한 사람이 또 있을까. 결혼생활과 함께 이미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온 나의 엄마를 생각할 때 더 큰 존경과 함께 사랑을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친정 엄마가 살아 계신 이(나를 포함해서)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엄마!”하고 부르기만 해도, 엄만 나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계신 것 같다. 친정 엄마를 향해서는 나이가 40줄에 있으면서도 어머니하기 보다는 엄마하고 부르고 싶다.

어떤 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주님은, 시집 간 딸이 친정 엄마를 만나 엄마하고 부를 때와 같은 심정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저 엄마 얼굴을 마주 대하고 서서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지만, 엄마는 딸 자식의 지나온 세월들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감싸 안으며 이해해 주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겠지.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66:13).

많은 여자들이 결혼하여 첫 딸을 낳게 될 때, 자신이 지나온 세월이 순식간에 떠 오르게 되면서, ‘이 아이도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딸 자식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리고 자식을 키우면서 새록새록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며 철이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어찌 여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결국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결혼해야 어른으로 인정되었던 것이, 결혼 생활 속에서 자녀들과 더불어 여러 모양으로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자신을 낳아 길러 주신 부모님을 뒤늦게 이해하고 후회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런지.

전날 어렸을 때, 우리 형제들이 여러 가지 잘못하는 일들로 인하여 부모님께 꾸중을 듣게 되었을 때면, 아버지께서는 자주 우리들을 불러 앉혀 놓으시고는 엄마한테 잘 해드려라. 훗날 후회하게 된단다. 그러나 후회할 때는 이미 늦었어하며 긴 한숨을 내 쉬셨다.

그 때는 으레 부모님으로서 우리에게 바르게 살아가도록 타이르시는 것으로 듣고 그냥 지나쳤었다. 그러나 훗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북에 남겨 두고 오신, 지금은 생존해 계실 것이라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고령의 어머니를 생각하시며 피 눈물 맺힌 편지 한 장을 남기셨을 때에야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아 ― 나의 사랑하는 어머님이여, 불쌍한 어머님, 그렇게도 보고 싶은 어머니! 이 불효 자식들을 키우기 위하여 가진 고생을 하며 키워놓고 보니 이렇게 어머님 곁을 모두 떠나 40여년 동안이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지난 것을 생각할 때 어머님의 그 아픈 마음 어데다 비할 수 있으리요!’

난 어리석게도 어른 ― 특히 남자 ― 들은 감정이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버지께서 북에 두고 온 어머니 생각으로 평생을 그토록 저리도록 아파하시는지는 정말 몰랐었다. 그런데 그 글을 읽고서야 그렇게 긴 세월동안 보고픈 어머니를 그리며 전 날 더 잘 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으로 얼마나 애닳아 하셨을까 생각해 보며, ‘지금 잘 해드려라. 후회할 때에는 이미 늦은 때란다고 말씀하셨을 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경자야, 너 많이 피곤하지?”

엄마가 곁에 앉아 있는 내게 말을 건네셨다.

엄마가 더 힘드시면서 다 큰 딸을 걱정은 왜 하셔요?’라고 투정섞인 대답을 하려다가 팔십 넘은 노모가 육십 먹은 아들 걱정으로 잔소리 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대답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에 일행들과 헤어지고, 난 엄마를 모시고 전철을 탔다. 엄마는 부천으로 가셔야 하기 때문에 일행들과 동행할 수 없었다. 엄마만 혼자 가시게 할 수 없어서 나도 따라 내렸다.

수원에서 청량리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시발역이었음에도 빈 자리가 거의 없이 좌석마다 승객들이 빼곡히 앉았다. 엄마와 나도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만인가! 결혼 이후 10여 년 만에 이렇게 엄마와 단 둘이 여행하게 된 것이. 다른 식구없이 엄마와 단 둘만의 여행은 아마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하루 종일 차를 타고 다니셔서 너무 피곤해 몸살이라도 나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곁눈질로 살짝 엄마의 표정을 살폈더니 눈을 감고 계신다. 피곤함은 역력해 보이지만, 자못 흐뭇해 하시는 듯 엷은 미소를 띄고 계셨다.

언제였나. 울산에서 사는 여동생이 집에 왔을 때 딸들이 엄마를 모시고 경복궁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다. 쉬엄쉬엄 돌아보았건만 젊은 우리도 다리가 아파 자꾸 주저 앉고만 싶었으니, 연세드신 엄마야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래서 엄마, 힘드시죠?”라고 여쭈었더니, “난 괜찮다. 오늘 참 좋은걸 구경했구나. 또 너희들하고 이렇게 같이 다니니까 너무 좋구!” 하셨던 적이 있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다보니, 지금도 엄마는 눈을 감고 오늘 여행을 즐거워하고 계신 것 같다.

수원에서 구로까지 오는 전철 안에서 엄마와 나는 엄마네 집 가까이 사는 큰 딸로부터 시작해서 멀리 부산으로 시집 보낸 막내 딸네에 이르기까지 전국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 이야기로 서울과 부산을 오고 갔다.

드디어, 구로역에 도착하였다.

돌이켜보니, 엄마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이 순식간에 지나버린 것처럼 느껴지듯, 오늘 엄마와 함께한 시간들이 수분, 아니 수초처럼 여겨진다.

우린 함께 내렸다. 그리고 우린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전에는 언제나 엄마와 난 함께 있었는데…. 아니 일과가 끝나면 늘 엄마가 계신 집으로 가 엄마가 준비해 주신 저녁상을 받으며 엄마와 같이 했었는데…. 지금은 엄마와 함께한 여행이었는데 엄마와 헤어져 서로 다른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니…!’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내가 정말 부모를 떠나 한 남자에게로 시집 간 여자인 것이 실감되었다.

엄마는 부천으로 가기 위해 인천행을, 나는 서울 창동으로 가기 위해 의정부행을 타야 한다. 건너편에 다른 전철을 기다리고 서 계시는 엄마가 보였다.

거울 앞의 내 모습과 마주 선 것처럼, 저 건너편 승강장에 20여년 후의 나의 모습이 비춰져 보인다.

엄마!”

마음으로 외쳐 부르면서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난 내 앞에 도착해 있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1998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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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