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4. 10. 29. 20:59 횃불/1998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

 

12장 창세기 4장의 악한 사람들

자연인과 영적인 사람의 진행 과정은 창세기 4,5장의 족보에서 추적될 수 있다. 4장은 가인의 계보요, 5장은 셋의 계보를 담고 있다. 가인의 계보는 하나님 없이 매혹적이고도 안락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욕망의 삶을 나타낸다. 그들은 바로 그 일을 시도하고자 곧바로 도시를 지었는데, 그것은 진보적이고도 행복한 장소처럼 보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들의 창조주와의 어떠한 사귐도 가르침도 없었다. 그와 정반대적인 모습이 셋의 계보에서 나타난다. 그들에게서는 경건한 성품이 나타나고, 그같은 모습이 현저히 드러났다. 그들은 여호와의 존재하심을 인식했고, 그 같은 면에서 큰 책임을 가졌다. 성령께서는 창세기의 기자인 모세를 감동하시므로 그 계보를 가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고린도전서 15 46절의 다음 말씀의 원리처럼 가인의 계보가 먼저 나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등을 돌려 하나님의 존전으로부터 떠나갔다( 4:16). 그런데 그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임이 입증되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마음의 모든 악한 상상력이 발달되도록 하였고, 만일 그가 하나님께로 돌이켰다면 그 가운데 거했을 모든 도덕적인 제한을 제거해 버렸다. 그것은 타락된 행위에 문을 열어 놓게 되었고, 홍수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었다. 그는 유리함, 방황함이라는 뜻의 놋 땅에 거했는데, 이는 그의 불경건한 행위를 아주 잘 묘사해 주는 이름이다.

복음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도 주님을 떠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과 같으며, 그와 같은 동일한 사실이 해당된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길 잃은 양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바라로 가버린 그 아들은 가인의 태도에 대한 전형적인 모습이다.

창세기 3장은 하나님이 아담을 쫓아 내시는 것으로 끝나지만, 4장에서는 가인의 중생하지 못한 마음의 적개심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떠나갔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그와 반대의 사실이 해당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한 것은 갈라디아서 6 14절에서 사도 바울이 한 위대한 고백이다. 나는 세상을 원치 않고 세상도 나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죽었다는 것이 그가 말한 의미이다.

이 세상의 태도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경멸하고 그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가인의 태도이다. 바로 그같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으로 인한 끔찍한 유산이 된 것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더 나은 것들과 더 놀라운 기쁨들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가인의 후손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가인의 가정생활이 창세기 4 17절에 나타나는데 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자 가인은 한 성을 건설하여 그 아들의 이름을 따서 그것을 에녹이라고 불렀다. 가인이 그 아들을 높이고자 추구하는 모습은 얼마나 전형적인 모습인가! 바로 그것이 타락한 인류의 모습이다. 슬프게도 그 가정은 그토록 높아지고 하나님의 일들은 매우 희미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슬프게도 이러한 모습은 믿는 신자의 가정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의 보화와 그분의 은혜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계속적으로 그 자식들을 자랑하는 것을 듣는 것은 얼마나 합당치 않는 것인가!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죄 가운데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들 중 몇몇이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은혜로 여겨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바로 그같은 올무에 빠져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신의 자녀들에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20:2023). 그녀는 분명히 그녀의 자식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가치있고, 그러므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그같은 생각을 자녀들의 마음속에도 똑같이 심어놓았을 것이며, 그들도 똑 같은 것을 요구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시며, 내가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겠느냐?” 그러자 그들이 하도 대답했다. 그들은 베드로 못지않는 자기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음에 틀림 없다. 후일에 시험이 왔을 때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다”( 26:56).

이와 동일한 올무가 사사기 17장의 매우 흥미로운 한 이야기에서 나온다.  한 여인에게 꽤 많은 돈인 은 일천 일백세겔을 잃어버리는 불행이 임했다. 그녀는 그같이 끔찍한 일을 행한 도둑의 머리에 저주가 임하기를 선언했다. 그런데 그 도둑이 바로 자기 아들임이 드러났고, 이에 그 돈으로 한 우상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하고 그를 축복했다. 바로 자신의 친아들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악은 가인과 그의 아들 에녹에게서도 일찌기 보인 사실이다.

가인은 성을 건설했는데, 그것은 그 시대의 약탈로부터 얼마간은 지탱할 수 있는 다소 견고한 것이었다. 순례자였던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는 일시적인 거처인 장막에 거주하기 위해 그 성을 떠났다. 이에 대한 히브리서 11장의 다음 논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성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악하다. 성들에 관해서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은 심판의 말씀을 하셨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11:21).

이 성들의 사람들은 주 예수님께서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회개치 않았다. 이 세상의 마지막 큰 성은 바벨론일 것인데( 18), 그것은 첫 성이었던 가인의 그것과 비교될 것이다. 둘 다 이 세상의 성들로서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위한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둘 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가인은 그 아들의 이름을 생생하게 남기기 위해, 그 성을 아들의 이름인 에녹으로 칭했다. 사람들은 결국 죽음으로 다 사라져버릴 지식을 얻고자 애쓴다. 또한 그들은 최소한 이름만이라도 남기고자 애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세상이다. 많은 도시와 건물들과 공항들이 세상의 눈에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마치 다음과 같은 죽음에 대한 오만한 도전으로 보여진다.

당신이 비록 우리를 데려갈 수 있다 해도, 우리 이름과 우리의 업적은 이 세상에서 제거할 수 없다. “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의 이름이 이 땅 보다는 저 천국에 기록되는 것이 횔씬 낫다는 것이다. 바로 그같은 생각에서 우리 주님이 누가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

이것은 그들로 귀신들을 제어하는 그들 자신의 권세가 아니라 바로 은혜의 권세에 그들의 영광을 삼게 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이름도 없는 많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는 낯선 이가 아니요 바로 거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19절은 그 계보에서 세상적인 면에 관한 또 다른 면의 특징을 소개해 준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했다. 여기 전 세상을 곧 가득 채우게 될 부패의 시작이 있다. 그같은 상태들은 마침내 홍수를 불러 일으키고야 말았다. 육신의 정욕이 발동하여 한 아내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오늘날 부도덕한 사람들의 특징인 신실치 못함과 이혼에 대한 선구적인 모습이었다.

또 다른 일은 여성에게 현저한 지위가 주어진 것이다. 이 계보에서 세 여인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성경의 계보에서 매우 예외적인 모습이다. 마태복음 1장은 매우 다르다. 우리 주님의 계보에 네 여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여인들 각자가 오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록된 것은 놀라운 은혜의 예시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은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여인들”( 4:3)에 대해 언급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아무 여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여기 4장에서는 라멕의 아내 아다와 실라 외에도 나아마라는 제 삼의 여인까지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나아마아름답다는 뜻이다. 외모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어쩌면 화장에 관한 첫 시도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아내들과 여인들이 모든 일에서 실제적인 부분을 감당함으로 유명해졌다. 성경의 많은 실예들에서 여인들이 경제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크게 감당했던 좋은 예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테면 룻, 드보라 그리고 에스더와 같은 영적으로 유명한 여인들과 복음서에서 그들의 물질로 주님을 섬겼던 여인들이 있다. 하지만 창세기 4장의 기록은 다른 정보를 알려주는데, 이곳의 여인들은 남자의 머리됨을 대신 차지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셋의 계보는 ‘25절부터 시작되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어떠한 여인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1 2,3절과 디모데전서 2 11 15절에서 주장하는 머리됨(headship)을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여성에게 과거와 현재의 따른 이교도의 종교와 관습보다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20절에서 22절까지는 사회의 발달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세 면에서 보여지는데, 첫째는 소유물과 무역에서 보여진다(20). 야발의 장막은 가인의 성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며, 아브라함의 순례자로서의 장막과도 달랐다. 오히려 그것은 상업을 의미하며, 돈을 벌고자 사람들을 수용하는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한 곳에서 가축을 사서 다른 곳에 가서 팔므로 이윤을 얻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중동의 베두인은 이곳 저곳 이동하면서 장막에서 사는데 그들의 장막은 결코 가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계보의 사람들은 하늘에 아무런 유업이 없기에 이 땅의 소유물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 관원과 16장의 부자는 둘다 참된 하늘의 부요를 상실케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는 탐욕에 대해 우리 주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 경고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엄중하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12:15).

그리고 나서 오락의 발달이 나오는데, 유발은 모든 관현악기와 수금과 퉁소를 다루는 조상이 되었다. 음악은 신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인데, 특히 시편낭송과 성전예배시에 더욱 그러했다. 계시록에서 천상의 장면에서도 거문고와 나팔과 목소리로 부르는 찬양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없이 사는 자연인들의 기쁨을 돋구기 위해 그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음악계에서 그 기술은 유명해지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돈을 빨리 벌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섬뜩한 종류의 음악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기 위한 사단의 도구 중의 하나이다. 그 대목에서 두발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그 후손들 또한 음악을 만드는 자였음을 주목하라. 오늘날 팝송 스타들은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에 속하는데, 그들이 만드는 음악은 특히 하나님을 멀리 떠나도록 수백만의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수단이다. 오늘날 그 스타들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나란히 간다. 온 세상은 그리스도 아니면 적 그리스도를 따르는 두 부류로 나누어 진다. 그런데 신자들이 그러한 세상 음악에 심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흥미를 못느끼며 양심을 살피는 성령의 음성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의 발전을 묘사하는 세 번째 항목은 자연인을 위한 보다 즐겁고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발명과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22절에 의하면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고,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모든 일에 사용되는 도구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리고 지금도 모든 종류의 발명이 인간의 비옥한 지성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발명품들은 우리가 남용하지 않고 사용할 수도 있다. 한편 그런 것으로 인해 우리의 영적 생활이 메마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그리 심취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것이 인간 영혼의 대적의 궤계인 것이다. 좋은 음악은 아름다운데 사울왕의 경우처럼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발명품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생활을 향상시켜 주기에 받아들일 만하다.  창세기 4장의 문제는 발명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독립적인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 23절에서 말했다.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사람도 아니요 더구나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오직 물질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사람들의 생애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것을 위해 몰두되고 허비되어 버리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같은 발달이 홍수 때까지 곧장 나아갔다. 그들은 마치 길 잃고 방황하는 양처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향해 돌진해 나아갔다.

또 다른 경향이 라멕에게서 소개된다. 그는 그 좋은 발전을 없애버리는 폭력을 사용했다(23,24). 그는 그 자신이 법인 양 온통 불법과 포학을 일삼았는데, 그는 데살로니가후서 2 2절의 그 불법의 사람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한 청년이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해서, 그는 그 청년을 죽여버렸다. 그는 창세기 4 15절에서 가인에게 주어졌고 나중에 노아 시대에 공식화 되었던( 9:5,6) 그 법을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실상 그 법은 라멕의 마음에 본능적으로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한 청년이 단지 그를 상하게 했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말씀도 없이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그 징벌이 그 범한 죄 이상으로 내려졌다. 그는 어떠한 정당한 명분이 없이 그의 손으로 친히 다른 사람의 신성한 생명을 취했다.

그러나 라멕은 그의 그 끔찍한 행위를 오히려 자랑했다. 그의 징벌은 가인을 죽이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 이리로다. “

그는 마치 당신이 조금 돌이키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를 모독해도 괜찮다. 나처럼 심각한 경우도 있으니 그리 염려할 것은 못돼하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이 마침내 홍수 심판을 불러 일으킨 폭력의 고리의 시작이었다. 그같은 폭력이 오늘날 더욱 만연되어 있고 마침내 베드로에 의해 예고된 더욱 심한 불심판을 맞이할 것이다.

그의 자랑스런 발언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나 그분의 이름 조차 전혀 언급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주목해보라!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한 언어를 발달시킨 것이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10:4).

이것은 후일에 하나님을 조롱하고 그분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오늘날 불경건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오직 맹세나 저주 등을 할 때만 사용하고 그들의 목전에 도무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

지금도 라멕은 수사학이나 시 등에서 나타난다. 그 포학한 행위가 마치 옳고 필요한 것처럼 미사여구로 포장되며, 그 범죄로 인한 죄책감을 없애 버린다.  동일한 전략이 종종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 사용된다. 모든 사람을 경악케 할 끔찍한 행위를 교묘한 언변으로 포장해버린다. 정치적인 대의명분은 때로 가장 극악한 악을 아주 매력적인 말로 가리워 버리는 것이다. 그의 청중은 그의 두 아내들이었다. 그들은 그를 흠모했을 것이며, 그같이 유명한 자의 아내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 했을 것이다.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의 예술이다.  그토록 불결한 것도 예술이라는 미명으로 눈감아지고 쾌락적인 세상에서 모든 수치스런 일들이 가리워진다. 시 또한 가장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주 외설적이고 인간의 마음에 해로운 것을 전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인쇄 기술은 또한 외설적이고 위험한 많은 것들을 찍어내고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오늘날 쾌락적인 것을 제공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것으로 악용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라멕은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복수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미묘하게 조롱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너무나 부드러우시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마치 제쳐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세상은 마치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고 악한 방향으로 치달려 간다. 하지만 홍수는 바로 그 같은 통치의 결과였다. 베드로의 서신들이 앞 장에서 보여진 것처럼 홍수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인간 세상의 일에 하나님의 통치가 관여된다고 하는 것이 주제임이 무척 흥미롭다. 그는 또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하고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라멕의 태도이며, 오늘날 만연되어 있고 말세지말로 불리워질 후일에는 더욱 심할 것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가인으로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것이며, 세상은 하나님 없이 편안해져 갔다. 그리고 라멕에게서 보여진 것처럼 폭력과 부패가 더해져 갔다. 이 모든 악은 은혜의 하나님이 의의 전파자인 노아를 보내게 될 정도로 증대되었다. 하지만 그의 모든 노력은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마침내 홍수 심판에 처해질 운명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1998 9월호)

 

'횃불 > 1998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탄의 유혹  (0) 2014.10.29
주님 앞에 부서진 나  (0) 2014.10.29
레위기의 다섯 제사 (4)  (0) 2014.10.29
말씀의 올바른 해석(20)-성경의 숫자  (0) 2014.10.29
주 예수님의 친구되심  (0) 2014.10.29
영원한 지옥  (0) 2014.10.14
그리스도를 만난 윌리(10)  (0) 2014.10.14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11)  (0) 2014.10.14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