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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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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9. 21:00 횃불/1998년

레위기의 다섯 제사 (4)

 

4. 화 목 제

 

※참고 구절 : 레위기 3 711, 시편 85

 

화목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이 이루어진 면을 예표합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완성된 이 일을 간과한다면 하나님과의 참된교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종교적 감정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생하는 아드님이시라는 것과 십자가의 사역 아래 쉼을 얻는다는 믿음을 떠나서는 영적 교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요구되는 제사입니다. 인간은 본래 아담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과 교제하기가 부적합한 위치로 타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태어나면서 죄인으로 이 세상에 와서 거룩함보다는 거룩하지 못한 쪽으로 기웁니다. 의롭게 살기보다는 죄를 지으며 살고, 바르게 서 있기 보다는 넘어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부인하여 인간이 수세기를 살아 오면서 바른 길을 걸었노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지 않고 우리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도 선행보다는 악행을 저지르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51 5절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일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며 선을 사랑하시고 또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과 타락한 사람 사이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죄를 범하여 살아가며, 의도적으로 법과 계명을 범하며, 자기 뜻대로 행동합니다. 말씀에도 있듯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53:6).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화목을 이루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며 우리를 이끌어 그분 자신과 교제케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죄로 가득차고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을 이를 수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는가?”

종종 어떤 이들은 예수님 없이 화목을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람들을 완전히 기만하는 말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상태를 알게 되므로 구원자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 스스로 이를 수 없으며 다만 유일하게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내 눈물로는,

지칠 줄 모르는 내 간절함으로는,

내 죄를 씻지 못하네.

오직 홀로 그분만이 내 구원일세.

내 손에 아무것 없어

그저 주의 십자가만 의지하네.

 

죄에 거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밝히고 있는 것이 4복음서의 영예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4복음서는 말해주고 있으며, 창세 전부터 함께 계셨던 아버지의 품속을 떠나 이 세상에 오사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낮은 자리로 오셔서 죽음의 고난을 십자가에서 맛보심으로 우리를 위해 저주받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한 보화를 이루어 서로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사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생애만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사람을 하나님 앞에 회복시켜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결국 그분이 죽음으로 하나님 편에서 사람을 향한 적의가(사실 모든 적의는 사람이 품고 있는 것이지만) 전혀 없음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로 그 빛이 엄청나고, 우리의 신용도는 완전히 떨어져 우리의 빛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처지에 있던 두 사람의 예가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7:42).

이는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제물로 우리의 빛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준 바 된 것을 뜻합니다. 골로새서 1 19,20절에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화목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에베소서 2 13,14절의 이제는 전에 떨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는 말씀이 구약의 화목제가 예표하는 바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 되심을 말합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함은

그리스도께 영광이라.

하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이 말씀 전하시러

예수께서 피 흘리시고

하나님 보좌 앞에

죄인들을 이끄시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이 사역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이제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과의 화목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은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에 만족하시고 우리도 그 일에 동참됨으로 하나님과 우리들이 함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기쁨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기쁨도 그리스도시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양식이며 또한 우리들의 양식입니다. 이 향기로운 제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축복스런 교제의 관계로 맺어주었습니다.

 

레위기 3장에 세 가지 서로 다른 예물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화목제의 예물로 단 위에 올리웁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무엇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1).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희생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6).

만일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12).

번제의 경우 양이나 염소를 예물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또 화목제 제물 중에 수컷은 그리스도의 주체성을, 암컷은 종족성을 예표하며 어느 견지에서나 그리스도를 이해하면 하나님과 교제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양은 잡혀 죽기 위해 구별된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염소는 죄인을 대신하는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하신 일에 대하여 그 가치의 중요성을 다 똑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와 그리스도를 인정하면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져 교제가 열리고 그분을 충분히 알아가는 데까지 자라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인지 그분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지 우리가 알면 알수록 하나님과의 교제가 한층 깊어지고 그 강도가 더해 갑니다.

예물을 드리는 자는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자기가 직접 짐승을 잡습니다. 이는 예물을 드리는 자와 예물을 동일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예식은 대속물의 진리를 생생하게 드러내 주고 있으며, 또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을 죄 없는 속죄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이 대속물로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그 효력이 있습니다.

화목제는 번제와 달리 예물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지 않았습니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3:9,10).

예물의 일부 부위들을 취해 단 위에 불사름으로 향기로운 냄새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이 부위들을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물을 죽여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는, 심오하고 섬세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라는 말씀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화목제의 규례

레위기 8 8절부터 시작되는 제사 규례를 살펴보면 화목제에 대하여 보다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명하신 부위를 감사함으로 드리고자 할 때는 여러 가지 소제 예물을 곁들여 단 위에 불사르는데 이는 모두 그리스도의 인성을 예표하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화목제물은 단 위에 불사르는 것은 일부분이며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집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가슴 부위는 제사장 반열인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아갑니다. 모든 제사장은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사는 자들로 가슴 부위가 제사장들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오른쪽 어깨는 하나님의 강함과 그의 전능하신 능력을 상징하는 부위로 제사 예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몫이었습니다. 그 외 예물의 나머지 부위는 예물을 드리는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모아 함께 먹으며 자비와 진리, 의와 화평이 임재하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이 장면이 하나님과 화목의 교제를 이루는 예표입니다. 즉 화목제로 바쳐지는 하나의 예물에, 제사장과 예물을 드리는 자와 그의 친구들이 다 함께 모여 이 예물을 먹으며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 이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자 하면 우리의 영혼이 올바른 상태에 놓여져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에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면 하나님과 절대로 교제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7 20절을 보면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라고 하셨으니 진실로 믿는 자라면 하나님 앞에 깨끗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1:7).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얹어 놓으면, 그분은 조금도 죄가 없으시나 우리의 죄를 짊어지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죄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죄성이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빛에 내놓아 판결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7 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 여기 보면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소제를 드릴 경우는 절대로 누룩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에서는 누룩을 사용한 유교병을 함께 화목제 예물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교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리는 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물을 드리는 자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 속 사람은 가련한 죄인입니다. 내 본성 속에 죄가 들어 있습니다. 예물 없이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

예물을 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예물로 인하여 그를 용납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것을 깨닫게 됨으로 신약성경의 매우 중요한 진리를 아는 데에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자신 속(in)에는 죄가 있으나 자신 위(on)에는 죄가 없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섰던 십자가 세 개를 주의하여 보십시오. 중앙에는 아무 죄가 없는 거룩한 그리스도께서 달려 하나님이 그분에게 담당케 한 우리 모두의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분 자신의 죄는 전혀 없었지만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친히 지셨습니다.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을 그분으로 지불토록 했으니, 이는 매우 미약한 비유이기는 하나 마치 바울이 오네시모 빛을 자기에게 돌리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의 보증인이 되어서 오네시모를 대신하여 빛을 청산하겠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18).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회개하지 못하고, 자기의 죄짐을 떠맡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조롱한 강도는 자기 안팎에 죄를 지니고 있는 자로 원죄와 자기의 행위로 지은 죄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 행위대로 죄인을 심판하실 때 자기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다른 편에 달린 회개하는 강도가 있으니 그 역시 앞의 강도와 마찬가지로 원죄가 있고 그 행위가 악하고 정죄된 자이나 그리스도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이미 그 회개하는 강도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갓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받아 거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죄를 지을 가능성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는 잘못된 생각이며 그 결과는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느 곳에도 그렇게 가르치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우리의 죄성과,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또 지킬 수도 없는 육신의 성품을 지니고 삽니다. 하지만 이제 죄는 믿는 자 위에 군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축복의 진리를 이해하기만 하면 너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 6:14)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기억하여야 할 점은 희생 예물을 먹는 것과 단 위의 예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입니다. 일반적으로 희생의 예물은 예물을 단 위에 드린 그날에 먹어야 합니다.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고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을 수 있으나 그 희생의 고기가 그 이후까지 남았을 경우는 불살라야 했습니다. 이것을 명하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십자가의 업적과 분리되는 것을 절대로 허락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으므로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순히 경건한 느낌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경건한 느낌만은 일종의 망상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선한 자아에 만족감을 갖는 것뿐입니다. 이 선한 자아에 빠져드는 것은 악한 자아에 빠져드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악한 자아에 빠지는 경우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거나 무력감을 갖게 되고, 선한 자아에 빠지는 경우는 자기 자만과 영적 이기주의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위험에 처합니다.

자신을 낮추사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화평을 이루신 그분의 업적을 묵상할 때 우리의 영혼은 지성소로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을 만나 거룩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휘장이 우리 앞에서 하나님을 가리우지 않고 그분께 가까이 가

는 길을 막지 못함을 확신합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것이며,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휘장이 찢어짐은

은총의 보좌로

우리를 가까이 이끄심이라.

주의 자비가 나타나

거룩한 곳을 채우고

그분의 귀한 피로 인하여

보좌 앞에서 선포하네.

그분이 상함으로

화목이 이루어졌음을.

 

다 이루었다외침으로

우리 영혼은 쉴 곳을 찾았고

그분의 일은 실패함이 없으니

우리의 희생양,

제사장이신 그분의 은혜로

우리가 휘장 안에 들어가도다.

 

그리고 거기서, 피를 흘려 값주고 사신 바 된 그분의 백성인 우리들은 희생 예물을 먹으며 잔치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이 온전히 나타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맛봅니다. 이 사실을 외면한 채 드리는 예배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역과 연결되지 않은 모든 종교의식이나 감정은 영혼을 속이는 것이며, 이러한 일들에는 하나님과의 진실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화목제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시편 85편을 상고하여 보겠습니다. 1절과 2절에서는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711절에서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전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 혼자만이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서로 만나고 의와 평화가 어떻게 서로 입맞추는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분을 통해 나타나기 전에, 진리와 공의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빛을 청산할 것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된 틈을 메꿀 수 없으므로 자기의 죄값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스가랴 6 12,1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주인이신 하나님과 이라 이름하는 사람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신약성경의 말씀으로 풀이하면 하나님과 그의 아드님 사이에 의논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평화가 이루어졌고,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이 합당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의와 평화가 영원히 함께 엮어져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가 맺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로워졌다는 단순한 느낌 그 이상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문제가 해결됨으로 온전한 의에 거하게 되어, 죄인이지만 그분의 은총을 입게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화평을 누리며, 그리스도께서 끼친 모든 것을 누립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북군 기병대 한 무리가 어느 날 리치몬드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몹시 지치고

수척해 보이는 한 사나이가 남루한 남부군 옷차림으로 길가 숲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빵을 구걸하자 병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습니다. 그는 숲속에서 수 주일을 열매와 나무 뿌리로 겨우 연명했다고 말했습니다. 병사들이 그에게 함께 리치몬드에 가서 음식을 얻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허기에 지친 남부군이 자기는 군대에서 낙오된 자로 그곳에 가면 분명히 체포되어 감옥에 가거나 전쟁 중 낙오병으로 낙인 찍혀

총살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소식을 못들었소?”

무슨 소식 말이오

남부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리 장군이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한 것이 일주일도 더 됩니다. 이제 전쟁은 끝났습니다. “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다고요? 난 그걸 모르고 숲 속에서 굶주리고 있었군요.”

그는 놀라며 그 소식을 믿고 그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며 음식을 얻고자 리치몬드로 떠났습니다.

! 구원받지 못한 자여, 영광스런 우리 구주께서 치욕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이 축복의 진리가 당신에게도 효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전갈을 믿으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선()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평화는 당신의 몸이나 감정에 깃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완성하신 일 위에 깃드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십자가의 진리가 서지 못하면

주가 주신 평화도 설 수 없겠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부인함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을 부인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사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는 한 우리가 누릴 평화는 굳건히 서 있습니다.

 

(1998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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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