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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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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8. 16:44 횃불/1998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

 

15장 하나님의 아들들

성경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창세기 6장을 접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용어의 의미에 대한 의문점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 대답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된다. 많은 이들이 믿는 것처럼 그들이 만일 천사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홍수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그 비정상적인 결합으로 생긴 인류의 더러워진 피를 정화하기 위해 그같은 홍수로 쓸어버리는 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구절을 생각해 보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그리고 4절에서 바로 이러한 결합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해준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기서 두 부류의 해석이 나타난다.  하나는 가인의 불경건한 계보(4)에서 딸들이 태어났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유다서에서 말하듯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진짜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그리고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이며, 사람의 딸들은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이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몇몇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는 만일 이것이 그러하지 않다면 인간에 대해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러한 명칭은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분을 믿음으로 주어질 중생의 경험을 의미하는 듯하다. 물론 누가복음 3장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졌는데, 이는 그에게만 독특하게 붙여진 것이다. 실로 그는 하나님의 본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 나머지 인류는 자연적인 출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분의 아들됨은 중대한 실재이다. 또한 신자들도 믿음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 신약에서 세 고전적인 구절들이 신자의 아들됨에 대해 말해 준다.

첫째로 에베소서 1장에서는 아들됨이 하나님의 과거의 영원한 목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주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미래적인 측면이다. 세 번째 구절은 갈라디아서 4장인데 현재적인 아들됨의 축복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그러한 지위로 인해 생겨날 도덕적인 모습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약의 계시이다.

1절에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Adarm인데 창세기 1 26절과 같다.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이것은 어쩌면 첫 사람 아담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5 2절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Adarm)이라 일컬으셨더라.” 후일에 그 단어는 그로 말미암은 모든 후손의 첫 사람인 인류의 조상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창세기 6 1절의 사람은 아담 자신일 수도 있고 그 딸들은 그의 딸들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5 4절에서 아담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아들과 딸들을) 낳았으며.” 만일 이것이 그러하다면(여기서 사람이 단수로 되어 있다면), 그 사건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 발생했으며 노아의 날까지 발전되어진 것이다.

여기서 그 단어가 사람들’, 즉 아담의 후손들을 의미하고 사람의 딸들또한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인간의 딸들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장 전체에서 사람사람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이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5)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7. 다비역 창 6:1참고할 것).

왜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이 그 같은 거인들을 낳게 하는가? 오늘날의 불신 결혼은 그러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그리스도인간의 결혼이나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 그리고 불신자들끼리의 결혼으로 인한 후손은 거의 비슷하다. 만일 그것이 홍수 전에 그러했다면, 지금은 왜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비록 지식은 훨씬 더 풍부해졌지만 타락의 결과는 여전히 존재한다.

악은 점점 더 진보했음이 분명하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고(1) 노아가 500세 될 때까지 그러했고,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일은 점차로 퍼졌고, 처음에 몇몇만 그러했다가 그 후 다른 이들이 그 부정한 결합을 따랐고, 마침내 오직 노아의 가족만 순수하게 남게 되었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해 달리 해석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고 보는 것이다. 비록 설명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성경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인다.

천사들은 다음 세 구절에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운다.

 

(1) 욥기 16절에서 영적인 세계가 독자들 앞에 펼쳐진다. 하늘의 장막이 걷어지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천사들이 보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소개된다. 이들은 종들로서 각각에게 책임이 주어져 있다. 이 대목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며, 스가랴서 1 10,11절에서도 주님께 보고하는 천사가 나온다. 스가랴 6 18절에 나오는 병거들과 말들에 대한 환상도 분명히 영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2) 욥기 2 1절도 비슷한 것으로 더 이상의 논평이 필요없다.

(3) 욥기 38 7절에 보면 창조시에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쁘게 노래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문맥에서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마찬가지로 천사이다(성경의 시가서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 개념이 서너군데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은 지구를 창조하실 때, 그분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감탄하는 관중을 두셨는데, 그들이 바로 천사들이다. 천사들은 또한 주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그 놀라운 하늘 세계에서 내려오심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2:914). 디모데전서 3 16절에서 천사들에게 보이시고라고 한 대목이 이를 주석해 준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그 은혜에 대해 천사들은 또다시 감탄한다.

이제 일관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일 욥기 38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면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도 천사들이 아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명칭은 결코 사람을 지칭하지 않았다. 신약에서는 그것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으로 사용되었다.

 

(1)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 3:38)이었는데, 이는 그가 부모 없이 직접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들은 이탤릭체로 쓰여있는데, 성경 원본에는 없는 단어임을 아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말한 것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라는 것이다(JND).

(2) 주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Son)이시다( 1:35, 3:17, 1:49). ‘독생자라는 그러한 표현들은 오직 우리 주님에게만 사용되는 것이다.

(3) 신자들은 구속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이다( 8:19). 보통 사람들, 심지어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결코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우지는 않았다. 이러한 하늘의 지위는 구속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로 인하여 지금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그같은 지위가 해당된다.

 

창세기 6장의 이러한 천사들의 타락은 유다( 6)에 의해 천사들의 배교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개정역은 이것을 그들의 적합한 자리로 번역한다. 그들은 처음에 어떤 자리에 있었지만 그 후에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유다는 창세기의 이 구절, 즉 하나님의 아들들을 직접적으로 염두에 둔 것 같다.

천사들은 영들로서( 1:14) 자연인에게 보일 수 없다. 그들이 사람들을 위해 어떤 메시지를 갖고 지상에 내려올 때, 그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온다. 그들은 우리 주님처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나 제한된 시간 동안 사람의 몸을 소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영으로 창세기 18장에서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 그 중 한 분은 주님이셨고, 나머지 둘은 천사였다. 다시금 창세기 19장에서 두 사람이 임무를 띄고 롯에게 왔다. 그 때 사악한 소돔 사람들이 그들과 동성연애를 하고자 했다.  소돔 사람들은 그들을 천사들이 아닌 사람으로 보았다. 그 천사들은 그들의 첫 지위를 지켰고, 소돔성 사람들을 눈멀게 했으며, 나중에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했다. 그렇다면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로서 어떤 목적을 지닌 채 지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의 육체를 가진 이 천사들은 여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혹되어 타락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첫 지위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천사의 형태로 하나님의 종이 되기보다는 인간으로 남아 육체의 정욕 가운데 탐닉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정욕으로 인하여 배교하게 된 것에 대해 말하는 유다서의 문맥과도 일치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애굽을 향한 정욕에 이끌렸다. 이 타락한 천사들은 여자들에 대한 정욕에 이끌렸다. 그리고 소돔도 다른 색을 좇는 정욕에 빠졌다. 그 순서는 의미심장하다. 연대적으로는 마지막이지만 이스라엘이 맨 먼저 언급되는데, 이는 불신앙이 그 첫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천사들의 배교가 뒤따르는데, 배교는 계속적인 불신앙의 결과이다. 최종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패역한 마음에 따르는 일들을 나타내 준다( 1:28). 그 순서는 도덕적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불신앙을 고집한다면 그는 배교, 즉 하나님을 포기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패역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신다. 이것이 바로 소돔의 상태였다.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은 흔히 주께서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들은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성적인 구분이 없고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신 마태복음 22장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30). 그러나 주의깊게 읽어보면 그 어려움이 해결되는데, 지상의 천사들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이라고 한 것이다. 창세기 6장의 천사들은 하늘이 아닌 지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만 유혹에 굴복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에 서 있었던 그 두 천사들은 하늘이 아닌 지상에 내려온 천사로서 두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다( 24:4).

그같은 결합의 이상한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그들에게서 자녀가 나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의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힘은 폭력으로 지상을 가득 채우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유명한이란 그들의 특이한 일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파렴치한 행위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네피림의 존재로 인하여 세상은 더욱 끔찍한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고대’(4)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들의 특성이 이 사악한 후손들을 생기게 한 이전 천사들이 존재했던 때를 말하는 것 같다. 비슷한 일들이 다니엘서 2장과 요한계시록 8,9장에 언급되어 있다.

이같은 부정한 결합의 결과로 그러한 끔찍한 폭력과 부패가 수반됨은 그리 놀랄 일이 못된다. 그 배후에는 항상 사단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3:15). 그때부터 뱀은 여자의 후손을 어떤 방식으로든 파괴하고 그 왕가의 씨를 부정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한 경우가 모든 왕가의 자손(대하 22)을 다 죽였다고 생각한 아달랴에게서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요아스를 피신시켰고, 왕의 씨를 보존하셨다.

주께서 배에서 주무셨을 때, 바다 위로 불어 닥친 풍랑도 또 다른 사단의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그같은 많은 예를 덧붙일 수 있다.

바로 그같은 사단의 궤계를 이 창세기 6장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을 오염시키려는 사단의 궤계이다. 히브리서는 특히 우리 주님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바로 오염된 세대를 제거하려는 것이 바로 홍수가 일어난 이유이며, 노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작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그의 가족만이 그러한 부패한 피에 물들지 않았다.

오늘날은 노아의 시대 이상으로 폭력과 부패가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홍수나 그와 유사한 어떤 심판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때와 같은 동일한 이유가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이미 메시아가 오신 상태이다. 인간이 사악함으로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최후의 방법으로 그를 심판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거인들이 모두 다 사악한 결합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두 부류가 또한이란 단어로 구분됨을 주목하자. 거인들(여기서는 네피림이란 단어가 사용되었고 민수기 13:33은 가나안의 거인들로 기록되어 있음)이 여기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리고 나서 또한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거인들로부터 다른 범주에 속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거가 있다. 이러한 거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중에 나타난다. 그들은 언제나 바산왕 옥과 특히 가드왕 골리앗을 기억할 것이다. 네피림으로 불리워진 그들은 주님의 계명에 따라 이스라엘의 검으로 멸망당해야만 했다. 이처럼 당시의 세상은 천사들과 그들의 끔찍한 후손들로 인하여 포악한 세상의 상태가 더욱 가중되었다.

마지막으로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라라고 한 대목이 빛을 비추어 준다. 여기서 완전한이란 단어는 유월절 어린 양이 흠없다고 할 때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그처럼 노아는 주님의 눈에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옳은 자였다. 그 세대의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어떤 면으로든 그 천사들의 결합으로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시도는 처음에 창세기 3장에 나온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그 결과로 타락하게 되었다. 여기 또 다른 시도가 있다. 그것은 홍수로 끝났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한층 더한 시도였는데, 그것은 언어 혼란으로 끝났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부질없는 노력을 좌절시키신다. <다음 호에 계속>

 

(1998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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