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5. 1. 5. 10:53 횃불/1999년

도망친 노예(9)

빌레몬에게 쓴 바울의 편지

― 제2 : 실제적 교훈들 ―

8. 바울에 관한 간략한 고찰

우리는 앞장에서 바울을 죄인들을 위한 보증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라 생각해 왔다. 그리고 다른 장에서 죄수로서의 그를 살펴보았다.

이 서신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종의 절실한 마음을 간략하게 살필 수 있도록 한다. 간략하게 살필지라도 그리스도를 헌신적으로 좇는 자의 특성이 나타난다.

 

1) 감사하는 사람(4)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 모두가 감사한다는 것은 선한 일이다. 로마서 1 21절을 보면 이방인은 감사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일생동안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확실히 바울은 매일의 양식과 입을 것에 대해 감사했다(딤전 6:8). 그가 누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인해 분명 하나님께 찬양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감사했는가? 5절에 보면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었음을 본다. 바울은 믿는 자들 가운데 있는 영적인 은혜들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이 바울이 쓴 다른 서신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로마서 1:8, 고린도전서 1:4, 에베소서 1:16, 빌립보서 1:3, 골로새서 1:3, 데살로니가전서 1:2, 데살로니가후서 1:3, 디모데후서 1:3을 살펴보라.

이러한 모든 구절들이 각 서신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즐겁게 그의 서신들을 시작한다.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 하루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믿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충분히 감사드려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 안에 있는 그들의 믿음을 볼 때, 그리고 주 예수와 다른 믿는 자들에 대한 사랑을 볼 때 더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더 많이 감사할수록 우리는 그들을 덜 비난할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이 감사할 때 우리는 덜 비난하고 덜 투덜댈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향기와 같고 아름다운 꽃과 같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스럽게 한다. 감사는 성령의 충만한 한 결과이다( 5:18-20).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95:1,2).

 

2) 기도하는 사람(4-6)

바울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의 서신에서 기도에 관한 구절들을 30번 이상 찾게 된다. 이들 모두에 담긴 주된 내용은 함께 믿는 자들에 대한 영적인 축복이었다. 4-6절에 있는 빌레몬을 위한 기도를 보자.

(1) 바울은 빌레몬을 위하여 이름을 들어 낱낱이 기도했다. 우리는 적당하게 모든 곳에 있는 모두를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특별히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 아뢰되 그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기도해야 한다.

(2) 바울은 자주 기도했다. 가끔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기도했다. 그는 무심코 기도하지 않았고 계속적으로 했다.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3) 바울은 감사함으로 기도했다. 우리는 이미 이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4) 바울은 빌레몬 가운데 있는 사랑과 믿음을 들었기에 기도했다. 이것이 구원의 증거이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 2:8).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고전 16:22).

(5) 바울은 빌레몬이 사랑과 믿음 안에서 성장할 것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는 실제 생활 가운데서 사랑과 믿음의 성장이 드러나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경우에는 오네시모를 위하여 사랑과 믿음이 드러나게 될 것을 바랬다.

(6) 바울은 확신함으로 기도했다(21).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그분이 응답하실 것이라고 확신해야 한다(요일 5:14,15).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확신있게 나아가자( 4:16).

진지하고, 쉬지 않으며, 사심 없는 기도생활을 하는 바울을 우리 모두가 더욱 더 닮게 되기를….

 

3) 기뻐하는 사람(7,20)

우리가 크게 기뻐하노라.”

성령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를 간단히 살펴 볼 것이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기쁨)이다( 5:22). 바울의 성령 충만한 생활은 진정한 기쁨을 낳았다. 그의 서신 가운데는 기쁨에 관한 구절들이 많다(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전서 2:19). 그리고 빌레몬에게 쓴 이 서신도 이것을 반영한다. 빌레몬의 생활 가운데 있는 사랑을 보고 바울은 크게 기쁘했다(7). 이 기쁨은 빌레몬이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요청을 실행할 때 더욱 더 커질 것이다(20).

바울은 믿음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걸을 때 기뻐하던 사도 요한과 같았다(요이 4; 요삼 4).

바울의 서신들에서 기뻐하는 다른 구절들이 있는지 찾아 보라.

 

4) 바울의 사랑(9,12,16)

우리는 이미 사랑을 인하여라는 9절을 함께 생각했었다. 그것이 이 편지 전체의 기초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른 구절들을 통해 어떻게 바울의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하였는지 주목하라.

1절―빌레몬은 사랑을 받는 자였다.

2절―압비아는 사랑을 받았다(흠정역 참고).

12절―오네시모는 바울의 심복(마음)이었다.

16절―오네시모는 특별히 바울에게 사랑받는 형제라 불렸다.

이러한 구절들은 바울의 진심을 드러낸다. 그는 다른 믿는 자들과의 관계가 냉랭하거나 형식적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꾸밈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이 불완전하다고 상상할 수 없다. 그의 사랑은 온전히 순전하며 따뜻하고 진실했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부어 주신 것이었다( 5:5).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매혹되었음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가?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온유함은 온유함을 생기게 한다. 우리가 바울같이 되어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채움으로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기를 기도한다.

 

5) 바울의 부정(父情; 10)

내 아들 오네시모.”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영적인 아버지였다. 곧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도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네시모는 거듭났다. 그는 하나님의 권속으로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이제 진정한 그의 아버지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인간 대리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믿음 안에서 내 아들이라 말할 수 있었다(10).

바울의 마음은 자신의 영적인 자녀들에게 특별한 사랑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믿음 안에서 내 아들이라 불렀다(딤후 1:2). 디도도 또한 그의 아들이었다( 1:4). 고린도의 믿는 자들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었다(고전 4:15).

자녀들에 대한 바울의 깊은 열망은 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모든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깊이 나타내기를 원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힘썼고 수고했다( 4:19).

그의 깊은 사랑은, 그분의 자녀들을 위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동정의 마음의 반응이었다. '마음'이 이 서신에서 두 번 언급되어 있다. 12절에서 오네시모가 바울의 심복(마음)임을 말하고 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에 갔을 때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거기에 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20절에서 빌레몬에게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 일이 될 것인가? 오네시모를 바울 자신처럼 영접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순종을 뜻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또한 그의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신다. 사실 우리는 그분이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드님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신다고 요한복음 17 23절을 통해 배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라고 말씀하신다( 31:3).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의 아드님을 특별히 사랑하시는데 이는 아드님이 순종하시기 때문이다( 10:17). 그리고 이것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을 향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그에게 사랑과 순종을 보일 때 즐거워한다. 하나님께서야 얼마나 더하시랴! 우리를 향한 그분의 크신 사랑에 답하여 우리의 사랑스런 순종이 있기를!

 

6) 화평케 하는 사람

마태복음 5 9절에서 주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 있다고 하셨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과 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장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이시다. 골로새서 1 20절에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말씀을 읽는다.

거기에는 희생이 함께 하고―

거기에는 고난이 함께 하고―십자가

거기에는 부끄러운 죽음이 함께 하였다―죽음”(22).

그 결과 화목되었고, 함께 화평으로 맺어졌다!

 

바울은 그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연합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는데 그들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였다. 둘 다 이제는 믿는 자들이 되었으나 두 사람을 연합하게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불의는 의롭게 되어야 했다. 용서가 있어야 했다. 화평케 되어야 했다. 값이 치러져야 했다. 바울은 기쁘게 그 값을 담당했다(18,19). 그는 그 틈새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을 연합케 하기 위하여 중재자가 된 것이었다( 9:33; 딤전 2:5). 그들이 화평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빌레몬서 20절은 이 기쁨과 평안하게 된 마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또 다시 바울의 진정한 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동일한 마음을 발견한다. 화평케 하는 자로서 그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여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다( 4:2). 그는 로마에 있는 믿는 자들이 서로 화평하기를 바라며 그들을 방문하였다( 12:18; 14:1-7,19). 바울은 고린도에 분란이 있음을 알고 슬퍼하였다(고전 3:3,4).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그들이 평강 가운데서 마음을 같이하여 살기를 간구하였다(고후 13:11). 골로새의 성도들에 대해서도 이것에 대해 썼다( 3:2-15). 그는 디모데에게 이것을 상기시켰다(딤후 2:22).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화평케 되기를 그는 참으로 열망했다!

바울은 시편 133편을 노래하곤 했으리라 생각된다. 분명 그는 그 시편의 사랑스러운 참뜻을 깊이 음미했을 것이다. 다윗이 이 시편을 참으로 아름답게 읊조리는 바를 들어 보라. 그리고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면 다윗과 바울이 함께 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보라,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

형제(하나님의 사람들)들이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보배로운 기름 같도다.

어찌 그리 새롭고 생기 발랄한가!

산들에 내린 이슬 같도다.

얼마나 열매 풍성한지,

풍성한 복들, 주께서 명하였도다.

풍성한 생명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으리로다.”

 

우리가 귀 기울이면 그들을 따라 함께 노래하리라,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메아리로 화답하리라.

아멘, 아멘, 오 주여! 이 노래가 지금 우리에게도 있기를!

 

7) 결론

다음과 같이 바울에 대한 초상(肖像)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 그는 이러한 사람이었다.

(1) 유익한 사람

(2) 겸손한 사람

(3) 소망이 넘치는 사람

 

(1) 유익한 사람

이에 대해 이미 상고한 바 있으나 여기에서 중요성을 한층 강조하고자 한다. 필요할 때 바울은 언제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데나( 1:16), 또는 장거리를 여행하거나,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거나( 21:13) 혹은 어려움에 처한 종의 빚을 갚고자 자기의 지갑을 여는 것에 유용하였다(18,19). 그는 가난한 오네시모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다. 또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도 내어놓았다. 그는 항상 섬기며, 항상 돕고 있었다.

이것은 다음의 사랑스런 자질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2) 겸손한 사람

본 서신에서 자신을 사도 바울이라 부르지 않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의도적으로 그러한 칭호를 생략했다. 그의 권위와 위엄은 제쳐놓았다. 그는 담대히 명령할 수도 있었다(8). 그러나 그 대신 그는 두 번이나 간구한다는 말을 사용했다(9,10). 그는 명령하는 대신 간청했다. 엄히 명하는 대신 열심히 빌었다. 당당히 요구하기 보다 오히려 겸손히 요청했다. 왜인가? 이것은 그가 주와 선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친밀히 따랐는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다( 11:29).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선생님을 겸손히 따른 자였다. 이 서신에는 바로 이 두 분의 마음이 스며 있다.

나이 많은 바울이 믿음 안에서 자랄수록, 더 낮고 겸손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5 9절에서 그는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썼으며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후 그는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자신을 생각했다( 3:8). 3,4년이 지난 후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다(딤전 1: 15).

이런 일을 보는 것은 지극히 아름답다. 자신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리스도는 더욱 더 커진다. 침례 요한의 바램은 우리 모두에게도 선한 일이다. 주 예수께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다( 3:30).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께서 우리 모두를 다음과 같이 인도하시기를….

(a) 바울의 충고를 따르는 것―마음의 겸손한 옷을 입자( 3: 12).

(b) 바울의 본을 따르는 것―마음의 모든 겸손으로 주를 섬기자( 20:19).

 

(3) 소망이 넘치는 사람(22)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기를 바라니 처소를 예비하라.” 우리는 이 서신의 사랑과 믿음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제 이 서신의 주해를 마감하는 주제는 소망이다.

우리를 위한 구원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믿음으로써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제 믿는 자들은 모두 소망을 가졌는데,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이다.

바울은 언제나 앞을 바라보았다. 뒤에 있는 것은 잊었다. 그는 앞을 향하여 계속 전진했으며 앞만 바라보았다( 3:13,14). 믿는 자들에게 소망은 인생의 거센 풍랑을 가로질러 비추는 등대와도 같다. 소망은 핍박과 난관을 통과하는 바울을 지탱하게 했다. 그가 감옥에 몇 달, 몇 년씩 갇혀 있었음에도 그의 마음은 소망으로 가득 찼다.

그는 소망을 그의 서신 가운데서 40번 이상 언급하였는데, 소망이 그의 생각 가운데 언제나 있었음을 본다. 소망 가운데서 그는 기뻐했다( 5:2, 12:12). 그의 믿음은 소망의 하나님께 있었다( 15: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선한 소망을 주셨다(살후 2:16). 이 소망은 복음을 통하여 온다( 1:23).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시다( 1:27). 바울과 모든 믿는 자들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을 기대한다( 2:13).

그렇다. 하늘에 있는 '처소'는 준비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한 놀라운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 그리고 그분은 약속하시기를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14:2,3).

바울은 이 행복한 기대 가운데서 기뻐하였다. 그의 구호는 '마라나다'였다. 우리의 주께서 임하신다는 말이다(고전 16:22).

그리고 세대의 모든 믿는 자들은 이렇게 응답해 왔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20)

구주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으니,

아침의 별처럼 우리를 거기로 영접하실 것이라.

죄가 없고 한숨도 없으며

눈물도 죽음도 없으니

공중에서 만날 때

그 기쁨은 어떠하랴!

하늘의 무리들은 그분의 발아래 앉아

아름다운 곡조로

새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죄에서 이끌어 내셨도다.”

우리는 기쁨으로

온전히 그분을 찬양하리!

 

바울은 기도로 이 귀중한 서신을 끝맺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끝맺는 기도( 22:21)와 동일하다. 이것은 하늘의 귀중한 축복이다. 이것은 이러한 축복의 모든 진리들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선하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 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 아멘 <연재 끝>

 

(1999 9월호)

 

'횃불 > 1999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한 구원(9)  (0) 2015.01.05
때가 찬 경륜  (0) 2015.01.05
흑암에서 빛으로  (0) 2015.01.05
달나라 여행을 떠납시다  (0) 2015.01.05
하나님의 구원계획(1)  (0) 2015.01.05
변명  (0) 2015.01.05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0) 2015.01.05
영원한 구원(8)  (0) 2015.01.05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