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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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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지역교회에 관한 간단한 서술

 

최초 언급의 원칙은 해석의 한 방법으로써 개론에서 기술했다. 그 가치는 이제 신약성경이 지역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살펴 볼 때 보여지게 될 것이다. 지역교회의 최초 기술은 마태복음 18 15-20절에서 주어졌다. 지역교회의 최초의 실례는 사도행전 2 41-42절에서 보여지며, 지역교회의 질서를 최초로 언급한 서신은 고린도전서이다. 전체 언급 양() 원칙은 지역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특징을 이해하는데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 또한 보여질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일컬어졌다.

A. 복음서는 예언적으로 지역교회를 알린다.

B. 사도행전은 역사적으로 지역교회들을 나타낸다.

C. 서신서는 가르침적으로 지역교회들을 말한다.

이 중에 맨 마지막은 지역교회의 질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 두 서신이 말하는 매우 특이한 진리이다. 최근에 마태복음 1820절을 지역교회에 관한 설명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의 반대를 네 개의 소제목으로 놓았다.

 

1) 지역교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마태복음 18 20절의 사용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4가지 반대

● 지역교회의 기능들에 대한 모든 진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역교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태아적 형태에서 진리를 준다. 마태복음 1320절의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모임 진리에 대한 대부분의 귀한 원리들 중의 얼마를 포함하는 간결한 천명(闡明)이다. 이 본문은 지역교회가 모이는 건물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자주 발견된다. 이 구절은 지역교회에 대하여 계시된 모든 진리가 포함되었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 3 16절은 복음의 모든 진리를 포함하는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구절이 인간의 타락, 회개의 필요, 의롭다 함의 위대한 진리 갈은 큰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구절을 기꺼이 복음 진리의 간결한 천명(闡明)으로서 사용한다.

요한복음 3 16절은 복음에 관한 것이며, 마태복음 18 20절은 지역교회에 관한 것이다. 진리는 더욱더 오순절 날에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출생 이후에 계시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 안에서 가르침의 진전과 함께 지켜지는 것이다( 16:13).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지역교회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주 예수님은 지역교회들이 심겨진 다음에야 비로소 영향을 줄 것을 교훈하셨다. 주님께서 유대인 회당이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교훈하시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이 복음서 11장과 12장에서 왕의 주장은 거절되었으며, 그는 나라들을 정죄하며, 왕이 없는 현재에 관련되는 진리를 주시면서 그의 관심을 비밀인 왕국으로 돌린다(13). 장래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는 주님의 생각은 주로 주님 자신의 것에 대한 섬김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머지않아 떠나실 것이며 주님이 그들 중에 계시지 않는 동안에 그들을 강하게 해야 하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 15-20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지역교회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훈이다.

● 이것은 교회 교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교제의 문제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성경에 대한 원래적인 해석은 교회 교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인 교제 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간단한 대답은 아니다 이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문맥을 벗어나서 한 구절만 따 와서는 안 된다. 여기서 문맥은 무엇일까? 15절은 네 형제가(네게 - 한글 개역성경에는 없음) 죄를 범하거든 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주제는 개인적인 허물이다. 이것은 문제가 시작된 방향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진행됨에 따라 한 두명이 더 포함되었고, 그래서 세 명(16), 17절에서는 교회, 즉 한 지역교회가 포함되었다. 이어지는 말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은 가장 준엄하다. 그것은 이제 개인적인 교제의 영역에서 벗어났고, 문맥에서 보면 그것은 교회적인 교제이다. (너는: thee)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 구절에서 단수 대명사로 된 첫번째 사람은 피해자에 대한 언급이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주님의 말씀은 범죄자에 대한 단지 개인적인 행동이라는 어떠한 생각에도 배치(背馳)된다. 17절의 thee(한글 개역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음) 는 단수이지만, 18절의 너희(ye) 는 복수라는 것은 중요하다. 18절의 매면(binding) 은 능동동사이며, 2인칭 복수이다. 사실 이것은 지역 모임보다 더 높은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에서의 이행은 지역 모임에 의하여 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의 실행 이다. 지역교회의 장로들은 법령을 제정 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명령한 것을 수행할 엄중한 책임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19-20절의 문맥으로, 지역교회 전체가 포함되는 교회 징계의 문제이다. 주제가 바뀌지 않았고, 16절의 두세 사람과 19-20절의 두세 사람도 다르지 않다. 계속해서 기도로(19) 하나님께 나오는 죄의 문제이며,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모이는 지역교회의 징계와 관련되어 있다. 두세 사람의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그들은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그 문제를 다루는 지역교회의 신임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 후반에서 그러한 사람들은 지역교회에서 장로로서 기능했다. 어떤 사람이 길 잃은 양을 따라가서 만일 찾으면(12-14) 이라고, 주님은 길 잃은 양을 마침 다루셨다. 우리들은 이 문맥에서 목자들의 일(신약성경에서 장로들의 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봄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죄를 범한 사람은 길 잃은 양이며, 두세 사람의 목적은 그를 찾는 것이다.

● 마태복음 18 20절은 징계의 문제이다

나는 독자들이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 이 지역교회의 징계를 다루는 경우라는 것을 의미하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들은 이 구절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이는 것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듣고 놀랄 필요도 없고, 또는 이것이 지역교회의 진리라는 것을 말할 때 잘못 해석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고린도전서 5 1-8절에 거의 일치하는 조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허물이기보다 차라리 도덕적인 죄라는 것이 사실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4) 라는 대비에 주의하기 바란다. 한편 그것은 징계를 위한 모임이며, 바로 같은 소중한 진리들로서 가르쳐졌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으며, 그 징계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보다 더 나아갈 수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믿는 자들의 죄와 관련된 지역교회에 관한 첫 번째 언급일 뿐 아니라, 지역교회의 질서와 기능을 온전하게 다루는 고린도전서가 증거(간증)에서 사람의 실패로 인한 것을 교정하는 서신으로서 완전한 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의 진리가 실패와 관련되어 첫번째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겸허하게 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모든 증거는 인간의 실패의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증거를 유지하셨다. 이것은 우리들을 격려한다. 그래서 비록 마태복음 18장과 고린도전서가 인간의 실패와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거절하지 않고, 그 분명한 가르침에 기뻐한다.

마태복음 1820절의 문맥을 드러내면서, 우리들은 지금 그것이 나타내는 것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문맥의 빛 안과 교회에 관한 신약성경 전체의 빛 안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보통 방법이다. 예로써 우리들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14:3)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주님께 속한 자들을 위하여 공중에 오실 것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 13-18절의 빛 안에서 요한복음 14장을 봄으로써 알 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의 빛 안에서 마태복음 1820절을 본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 이라는 이것은 모인(모여 있는; to be gathered) 이라는 동사의 현재 직설 능동형이다. 우리는 그들이 모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여 있는(to be gathered) 이라는 동사와 함께 연결되어, 주 예수님은 수동태로 gathered 이라는 완료분사를 사용하셨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그들이 모임에서 행동주체자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모여지도록 실행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들이 이것을 지역교회의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정확하게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모임의 중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끌림이 있다. 또한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이름에 대한 구분이 있다. 가장 작은 지역교회의 모임에 있어서 주님의 임재가 주장될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지역교회가 모이는 데에는 어디에나 주님의 임재를 주장하는 것은 옳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