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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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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역교회(모임)란 무엇인가?

C.I. 스코필드는 그의 잘 알려진 관주 성경을 통하여 빌립보서 1 1절의 주해(註解)에서 지역교회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주고 있다. 그가 법률가로 교육을 받고 나중에 목사가 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뛰어난 표현이며 아주 놀랍다. 그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취한 것이지 그가 관계하는 교파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대부분의 목적들에 알맞은 간략한 정의를 주고 있다.

나는 더 자세한 정의를 했는데 너무 많아서 기억하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안내의 참고로서 유익할 것이다.

한 지역교회는 구원 받은 믿는 자들의 무리이며(2:4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며(18:20, 고전 1:1-9,5:4 ), 신약성경 사도행전 241-42절에 있는 모형에 따라 특정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며,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와 같이 그러한 서신서에 있는 그대로 충분히 성장한다. 그러한 지역교회는 한 영적인 교제이다(고전 10:16-17). 그것은 떡을 떼고, 기도하고,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모임으로써 눈에 보이게 표현된다. 그들은 성령으로 함께 모였다(14:1, 8:14). 그들의 유일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딤후 3:16-17). 그들은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18:20). 그들은 지상에 있는 성령의 거처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 있어서 거룩한 성전이다(고전 3:15-16). 그러한 한 지역교회는 경건한 감독들에 의하여 인도되며, 실제적이고 영적인 섬김에 있어서 충성스러운 집사들에 의하여 섬김을 받는다(딤전 3:1-16).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 직분은 예배, 찬송, 그리고 기도에서 실행된다. 그리고 부활하신 교회의 머리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사를(4:8-13) 성령의 지배하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전 14:23-40). 지역교회의 안과 밖에 대한 분명한 경계선이 있으며, 순전함은 주의 깊고 불쌍히 여기는 경건한 징계의 집행으로 유지된다(고전 5:1-13).

이것은 주의 깊게 씌어진 한 제시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아무 권위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위하여 증거하는 영역 안에서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일 따름이다.

 

3)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장() 이라고 불린다. 물론 이것은 지역교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역교회에 관한 서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이하게도 함께 모임 에 관한 서신이며, 그리스도의 주권과 머리 되심에 관한 서신이며, 주님의 성령에 관한 서신이다. 그리고 또한 바르게 함의 서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역 교회의 질서와 기능을 이해하는데 유익하며, 지역교회에 대하여 사용되는 서술적인 많은 용어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라 불리는 표현이 있다(고전 1:1-2).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13번 발견되며, 지역교회에 관해서만 언급된다. 바울은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믿는 자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거의 그렇지 않다. 비록 다른 지역교회들이 바울이 회개했을 때 형성되었는지 모르지만(9:31), 다른 어떤 지역교회도 예루살렘 교회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했다고 제시할 만한 증거는 없다. 바울에 의하여 주도된 핍박은 예루살렘에 있던 믿는 자들을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갈릴리로 내몰았으며, 그들 중 몇몇은 멀리 다메섹까지 쫓겨갔다.

'하나님의 교회 는 우리에게 지역교회의 목적을 말해 준다. 그것은 세상에서 총괄적으로 증거하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낮은 도구를, 한 지역교회로서, 그 자신의 증거로 택하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겸손하신가!

●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밭은 고린도에 있는 지역교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고전 3:9). 많은 수고가 그 밭에 있었으나,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 이 표현은 한 지역교회의 심음에 대하여 서술하는 것이며, 우리들은 이 심음에 대한 모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복음이 전파되어(고전 2:1-4), 영혼들이 구원 받았고(3:5-7), 모임의 원칙들이 가르쳐졌고(3:9-10), 그리고 지역교회가 형성되었다. 우리들은 사도행전 18 8절에서 이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늘 그 순서였다.

침례는 지역교회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본 안에서 그것은 문 앞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문 가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건물(GODS building)

동일한 절에서(고전3:9),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집(홈정역에는 Gods building(하나님의 건물)으로 번역되었음)(Godbuilding) 이라고 불렸다. 이 서신의 이 부분에서 지역교회의 모형이 강조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건축자들은 교사들이며, 그들의 가르침은 이미 놓여진 기초 위에 하나님의 건물 모형에 따라 집을 짓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한 소책자를 보았다. 그것은, 반드시 모형을 따라야 하는 것은 기초뿐이며, 어떠한 구조로 형성되어야 하는 것은 각 집단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집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건물의 구조라는 사실의 빛 안에서 볼 때 주장은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 하나님의 성전

모임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 이다. 그 거룩한 특성은 성령의 거하심 때문이다(고전 3:16-17). 이 점에서 고린도 서신서는 새로운 문단(丈段)이 모임의 거룩함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되며, 7장 끝까지 계속된다. 성전에 관한 생각은 찬양과 예배로 연결되기 쉽다. 이것은 빌립보서 3 3절과 일치한다. 거기서 구원 받은 영혼들은 성령에 감동되어 예배를 드리게 된다.

● 그리스도의 몸

고린도전서 1227절에서 지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난다. 여기는 다른 항목이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에 있는 모임이 몸같이 각 지체들이 서로간에 다른 지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영적인 필요에 따라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는 지역 모임을 위한 준비가 12장의 주제이다. 지역 모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사람 몸의 각 지체가 적당한 기능을 위하여 필요함과 같이 각각 믿는 자들은 그 안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주의 깊게 읽으면 넓은 의미에서 몸된교회 의 진리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13). 13절에 있는 항목은 27절에는 없는 것을 더 많이 나타낸다. 12절은 비교이다. 어떤 것을 그 자체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번째로 12절에서 몸된교회 가 언급되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의 직유로서 사용된 인간의 몸에 관하여 언급한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라는 그 비교에 주의하라. 13절은 영적인 몸을 묘사하는 그리스도 에 관한 진리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것은 14절이 12절의 처음에 있는 원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몸, 즉 인간의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는 전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15-27절에 이어지는 것에서 보면, 지체 서로간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고, 고린도에 있는 지역 모임에 이것을 적용할 수 있게 하기 위gk여 바울은 이 인간의 몸의 지체들에 관한 것들 전체를 소개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지역 모임은 그 기능들에 있어서 몸 같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15-27절이 가르치는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3절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이며, 나머지 구절들은 지역 모임의 몸 같은 특성을 다루고 있다.

각 지역 모임이 그리스도의 한 몸 이라고 하는 것은 혼란스럽다. 주님은 많은 몸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리스어 명사에 부정관사를 더할 것을 주장한다면 이 어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지역 모임은 그리스도의 한 몸(a body of Christ) 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 soma Xristos)이다.

● 정결한 처녀

바울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라고 같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썼다. 한 정결한 처녀로‥‥중매함이로다 라고 말한 한 지역교회에 대한 서술은 얼마나 놀라운가! 이 말의 서술은 순전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순결한 한 아름다운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에 대해 느끼는 질투는 하나님의 질투이다. 이것은 총체적이며, 야고보서 4 5절에 있는 개개인의 믿는 자들에 대한 성령의 시기(猜忌)와 일치한다. 성령의 시기의 목적은 성도의 모든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게 하는 데 있다.

● 적은 무리

고린도 서신서에 발견되는 6가지와 연계될 수 있는 네 가지의 다른 표현들이 지역교회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2028절은 에베소에 있는 지역교회를 서술하는 데 자그마한 무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큰무리는 요한복음 10 16절에 보인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한 적은 무리이다(벧전 5:1~4).

●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

디모데전서 3 15절에서 지역 모임은 하나님의 교회라 불릴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집이라 불린다. 하나님의 교회로서 강조점은 불러냄 에 있으나,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칙이 있는 곳으로 인도됨에 있다

● 진리의 기둥과 터

같은 절에서 또한 진리의 기둥과 터 라고 불린다. 그것은 지역교회가 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게 붙들고 있음을 나타내며, 16절에서 보이는 대로 그리스도와 관계된 진리 수호를 위하여 세워졌음을 나타낸다.

● 금 촛대

마지막으로 지역교회들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각각 그 금 받침 위에서 있으며 지역교회들 가운데 다니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책임이 있는 금 촛대들로 나타난다.

 

4) 사도행전 2 41-42절의 모본

첫 지역교회(2:41,42)가 이후에 형성된 모든 지역교회의 모본이라는 것이 지금 분명해져야 한다. 예루살렘 지역교회가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름을 느낀다고 말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 이 문제는 고린도 교회를 바로잡음이 필요했을 때 바울이 사도행전 2장에서 모본을 가져와 적용하기 위하여, 모임의 질서를 다루는 서신 안에서 첫 지역교회와 관계되는 7가지 진리 모두가 상세히 설명되는 것을 알게 되면 간단하게 정리될 것이다. 사도들의 원칙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윤곽이 드러나며, 10장에서는 교제가, 11장에서는 떡 뗌과 기도가 드러난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지역교회에 있었으며, 가르침과 전함의 짐이 그들에게 있었으나, 이것은 모본으로서의 가치를 감소시키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점진적인 서술로서 사도행전 241-42절을 제시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기 위하여, 우리들은 7가지 진리의 순서를 바꾸어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그 날 베드로의 전도를 듣고 그 말씀을 믿은 사람들은 믿는 자로서 침례를 받았고, 예루살렘에서 그 수에 더해졌으며, 그들은 그 날 첫번째 지역교회의 지체로 형성되었다. 우리는 이 책의 11장에서 이 진리를 더 전개시킬 것이다. 새로운 믿는 자들이 이미 형성된 120명의 무리인 지역교회에 더해졌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믿는 자가 그날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것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 154-6절에서 그 당시 전세계에 120명보다 더 많은 믿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만약 우리들이 몸된 교회와 지역교회를 올바르게 구분한다면, 여기에 문제가 없다. 비록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모든 믿는 자들이 그 날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아 몸된교회 안에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교회 안에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만 있었다. 사도행전 2 47절은 새롭게 믿는 자들이 그들 즉 이미 한 지역 모임으로 형성된 자들에게 더해진 것을 강조한다.

지역교회의 교제 안에서 그들은 가끔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모였으며, 사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신 거룩한 가르침을 지켰으며, 주일 첫 날에 떡을 떼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만났다(20:7). 하나님의 말씀의 전함과 가르침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서 지속적으로 모였다는 말로 표현된다. 우리들은 이 모본은 언제나 선하며, 거기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에 우리 각 영혼들에 대한 경고의 말이 필요하다. 에베소에 있는 지역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2-5)는 권면을 받았다. 분명히 그들의 질서는 옳았고, 그들의 기능들은 매우 영적이었다. 30년 정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6:24) 라는 말로 그의 편지를 끝마쳤다. 이 순전한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죽님은 모든 다른 눈으로부터 숨겨진 마음이 잘못된 것을 보셨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에 엄숙한 이 경고를 받아들이자. 우리들의 표면적 행위는 질서에서 완전할지 몰라도, 주님은 마음을 살피는자(2:23) 라고 말씀하신다.

단순한 외형적인 부합의 위험 때문에 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내적인 실재만 생각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말한 주님의 말씀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를 말할지 모른다. 우리는, 엘리암이 외형만 갖추었기 때문에 거절당했지만, 다윗은 외형과 내적인 실재 둘 다 겸비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삼상 16:12). 이것이 우리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지역교회에 대하여 말해 왔다. 그것은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증거이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내적인 실재 는 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외적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 속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증거도 있을 수 없다 외형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고, 오직 내적인 실재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대로 하거나, 내가 즐거워하는 대로 입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는 현대적인 논리 안에 엄청난 결함이 있다.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언어도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에비구레오(Epicurus) 철학자(17:18) 말이 바로 그러했다. 외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 그러나 내적인 실재가 우리들의 증거에 일치하는지, 우리들의 마음을 살피자( 139:23-24)!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