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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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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최상의 선언

-주의 만찬-

 

비록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지역교회 안에 있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이 잘못을 고쳤기 때문에 기뻐한다. 만약 그들이 고쳐지지 않았다면 고린도 지역교회는 곧 없어졌을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인식 없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바로잡는 방법 중 하나는 그들에게 주의 일(고전 7:32)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일곱 가지 주의 일이 고린도전서에서 두드러진다.

① 주의 이름(고전 1:1~10)

② 주의 상()(고전 10:21)

③ 주의 죽으심(고전 11:26-27)

④ 주의 명령(고전 14:37)

⑤ 주의 일(고전 15:58)

⑥ 주의 나타나심(고전 1:7)

⑦ 주의 만찬(고전 11:20)

여기서 마지막 주의 만찬이 본 장()에서 다루는 주제이다. 주의 일과 대조하여 세상 일이 씌어졌으며, 주의 일세상 일에 우선하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중요한 주제이다.

우리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마태복음 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을 안 믿는 자들에게 인용한다. 이 말씀의 문맥은 복음 원문보다 더 넓은 해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일(24)이든, 재물을 모으는 일(25)이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33)이든 우선 되어야 할 일이 첫 자리에 주어져야 한다. 바울은 마게도냐에 있는 믿는 자들을 칭찬했다. 주님께 드릴 때, 그들이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다(고후 8:5). 반면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강하게 책망 받았다.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2:4).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라고 명령 받았다(5). 사르밧 과부 여인은, 아사(餓死) 직전 통 속에 가루 한 움큼밖에 없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왕상 17:13)라고 말했다. 그 과부는, 만약 그런다면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논쟁했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먼저 드렸다. 그리고 그 후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충분히 공급 받았다. 고린도 성도들은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 16:2)라고 권면 받았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원칙이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20:7)는 하나님의 원칙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표현형식에서 언급된 것은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떡을 떼는(2:42) 것이라는 점이 매우 분명해질 것이다. 사도행전 2 46절의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는 말씀 그대로 식사를 한 것이었다.

사도행전 20 6-12절에서 모이는 목적이 떡을 떼려 하여(7)였으며, 그리고 제자들은 주일 첫 날에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이른 시간에 모였다라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제자들은 이 긴 모임의 처음에 떡을 떼면서 주님을 기억했다. 그리고 강론하기를 오래(9) 한 후에 식사를 함께했다(11). 11절의 떡을 떼어 먹고가 식사였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들이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 46절처럼 음식을 먹고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이 주의 만찬을 식사로 여겼을 때,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라고 썼다. 그들과 함께 일주일을 기다린 것(6-7)에서 보면 7절은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며, 11절은 식사를 함께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떡 뗌이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단순함이 주제일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주님의 죽으심의 존귀함이 강조될 때 주의 만찬이라고 한다(고전 11:20). 주님의 이름이 신약성경에서 형용사로 쓰인 곳은 두 곳5)밖에 없다. 한 곳은 고린도전서 11 20절이며, 또 한 곳은 요한계시록 1 10절이다. 주의 날과 주의 만찬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5) 그리스어의 명사형 kurios의 형용사 kuriakos(lordly)는 고전 11:20 kuriako deipnon(KJV the Lords supper). 1:10 ente kuriake hemera(KJV "on the Lords day) 에서만 사용되었음(역자 주)

그것은 창세기 43 24절에서 만찬에 대한 아름다운 실례로써 시사(示唆)되었다. 거기서 요셉은 애굽에 있는 자기 집에서 형제들과 함께 먹었다. 그 잔치는 애굽으로부터가 아니고 요셉으로부터라는 특징을 가졌다. 그래서 여기 고린도전서에서 만찬은 세상 혹은 세상 조직과 관련된 그 어떤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라는 특징을 갖는다.가룟 유다가 유대인 지도자들과 함께 음모에 가담해 있을 때, 주 예수님은 떡을 가지시고 사례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십자가에서 주님 자신의 몸이 찢어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주님이 잔을 가지셨을 때, 주님 자신의 고귀한 피를 흘림에 대하여 감사하셨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단순한 행위의 의미를 잘 아셨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보낸 바울의 말씀은 그 다락방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며, 바울은, 그 때에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교제를 통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전 11:23-24). 마태복음 26 26절에서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라고 말하고 있으나, 바울은 그것을 기록할 때, 주 예수께서····떡을 가지사라고 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제자들은 결코 주님을 예수라고 부르지 않았다.

너희가 나를 선생(Master)이라 또는 (Lord)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13). 우리들도 동일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떡 뗌의 목적은 삼중(三重)적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주님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복된 인격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 기념 속에 포함된다. 그 다음으로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는 선언이다. 우리 주님의 죽음 안에 포함된 모든 사랑, 고통 그리고 축복은 이 선언 안에 있다. 셋째로 드러난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는 것이다. 비록 연합이 10 17절에 있는 상()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또한 11장에 있는 떡과 잔에도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떼는 떡(고전 10:16)은 한 사람의 장로가 한 떡을 떼기 위하여 상()으로 나아가는 공식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 그 자신의 의지의 한 행동으로서 떡을 떼는 각 사람의 참여에 관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자신이 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원인,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53:5)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떡과 잔이 나타내는 바는 비록 간단하지만 주님 자신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것이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떡과 잔이며, 부서진 주님의 몸과 흘리신 주님의 피를 나타내는 것 그 이상이 결코 될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의 잘못인, 떡과 잔이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로 변한다는 것-화체설(化體說) 혹은 루터주의의 잘못인, 떡과 잔에 주님의 진짜 몸과 피가 함께 있다는 것-성체공존설(聖體共存說)은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교회의 다른 모든 모임에서뿐만 아니라, 지역교회의 이런 모임에 주님의 참된 임재는 약속되었다.

우리들은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일을 드물게 기억해야 할까요? 아니면 지역교회 안에서 절대적으로 우선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일년에 4주 혹은 12주만 주님을 우선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년 모든 주간 즉 매주 주님을 우선해야 할까요? 그리고 다음 질문은 물론 왜 매일 기억하지 않나요? 일 것이다. 신약성경은 안식 후 첫날에(20:7)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주일 첫날에, 그리고 그날 가운데 모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에 모여서 우리 주님을 기억하는 데 우선권을 주며, 이것이 곧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떡과 잔에 참여하는 이유인 것이다. 거의 모든 현대 학자들, 심지어 자유주의자까지도 비록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필요하다고 믿지는 않지만, 매주일 첫 날에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초기 지역교회들의 실행이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우리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1:18)라는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독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주님을 섬길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헌신된 섬김의 중요한 요소이다(6:6-10). 그러나 섬김의 주된 목적은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주님에게만 속한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가 아닌 주님께만 드리는 봉사의 종류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구속 받은 영혼들의 예배이며(3:3, 9: 14, 12:1), 하나님에게만 드려진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첫번째이자 주된 이유이다(4:23-24). 다른 어떤 봉사가 예배보다 우선권이 있다거나,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믿는 자의 마음에 주 예수님이 첫 자리를 차지할 때, 그는 매주일 첫 날에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너무 지루하다거나 다른 종류의 봉사로 대체하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만찬은 신약성경에서 정기적인 지역교회의 증거와 분리되어 지켜진 것이 아니다. 주의 만찬은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바꾸어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의 만찬은 정기적으로 모이는 지역교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은 교제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며(고전 10:16-17), 다른 모든 집회와 지역교회의 다른 모든 기능이 어떠해야 함을 나타낸다. 마치 레위기 1장의 번제가 다른 모든 레위적인 체제 안에 있는 모든 제사들이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떡 뗌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의 교제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교제가 떡 뗌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강조되는 5가지 사실이 있다.

① 만찬의 제정(制定)(고전 11:23, 22:19)

② 만찬을 위한 명령(고전 11:24)

③ 만찬의 목적(고전 11:26)

④ 만찬 안에 포함되는 사람(고전 11:18-22)

⑤ 만찬을 위한 살핌(고전 11:28)

이것은 엄숙하고 거룩한 책임이다. 그러나 만찬은 축복된 특권이며 우리들이 이 지상에서 아는 한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장소이다.

갈릴리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23:55-56)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던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주님께서 만나는 그 자리에 내어 놓을 주님 자신에 관한 귀한 것들을, 우리들의 첫 열매의 광주리에 담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며, 모여야 하겠는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 중에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가 적지 아니할 정도로 분별없이 왔고, 만찬 자리에서 주님을 욕되게 하였을 때, 그들은 영원히 죽거나 멸망 당한 것이 아니라 잠들었다. 이러한 데 빠지도록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주님의 심한 책망이 있을 것이다. 잠잔다는 말이 죽음에 대하여 사용될 때,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심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 잔을 마시고 떡에 참여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이 경우에 그 주님의 몸은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바로 그 몸을 말한다. 그것에 대하여 떡은 생생하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는 여전히 진리이다.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만찬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살피고 나서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개개인이 만찬에 참여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할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모임의 영접이 아니라, 이미 고린도에 있는 지역교회에 지체로 형성된 사람들의 자기 판단에 관한 문제이다. 고린도에 있었던 이 죽음들과, 아론의 아들들이 죽기를 면하기 위하여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물두멍에서 씻도록 명령 받은 출애굽기 30 17-21절 사이에는 두드러진 유사점이 있다. 이 장()들에서 바울에 의하여,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사용되었고,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었다. 병을 가지고 오고 그들 중 몇몇에게 죽음을 가지고 온 죄는, 이스라엘의 죄들이 나열되고 경고가 주어진 10 5-11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말라(고전 10:7).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바울은 9장 마지막과 대비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 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이 복종을 알기를 바란다!

주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주의 만찬과 연관된다. 주의 만찬은 주님의 십자가를 돌아보며 주님의 오심을 바라는 복된 특권이다. 물리적으로 참석이 가능한 한 절대 만찬에 빠지지 말자. 이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야 할 주님의 명령이다.

 

1) 뗌에 관한 서술

다음의 간단한 묘사는 떡 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장()에 덧붙이려고 씌어진 것이다.

건물은 쾌적하지만,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의 증거는 전혀 없다. 간소한 액자에 들어 있는 성경 말씀 몇 구절이 벽에 걸려 있다. 종교적인 제단도 없고, 의자는 청중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배치되어 있지 않고, 가운데 놓인 간소한 상() 주위에 원을 그리듯이 배치되어 있다. () 위에는 한 덩어리의 떡과 포도주가 놓여 있다. 뒤쪽으로 사람들이 앉아서 보도록 되어 있고 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의자들이 있다.

적은 무리들이 조용히 앉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배)찬송가라 불리는 작은 책을 보기도 한다. 정해진 모임 시간이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찬송가를 말한다. 찬송가 가사 한두 줄을 읽고 찬송가 번호를 반복하여 말한다. 오르간, 피아노 혹은 아무런 음악적인 반주 없이 찬송가가 깊은 감동가운데 불린다. 짧은 침묵이 있은 후 한 남자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위하여 일어선다. 그는 간구나 원함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은 이와같이 간소한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큰 특권을 주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모임에는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믿는 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그의 기도는 전체적으로 감사와 찬양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하여 넘쳐 있으며, 구주의 구속(救贖)적인 사역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 다른 찬송가가 불린다. 이 또한 예배 찬송가이며, 그 주제는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할데 없는 가치와 십자가에서 치르신 주님의 희생에 대한 가치의 존귀함이다.

이 모임은 계속되며, 몇몇 남자들이 이어서 감사를 드린다. 그들의 주제는 같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보고 있는 자는, 예배 분위기가 고조되며 많은 찬양과 향기로운 향이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께 감사가 드려질 때, 조용한 동의 표시가 있게 된다. 그리고 각 예배자가 그의 예배의 말을 끝마치고 자기 자리에 앉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게 아멘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특별하게 준비된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영적인 예배에 참여하는 형제는 각각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선다. 의장은 없다. 순서도 발표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는 각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표현된 감사와 예배 찬송가의 말씀에 완전히 합해지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가 주제이며,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사역이 극찬되어지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영적인 참석자는 그 감사가 개인으로서와 단체적으로 받는 축복에 대하여 드려질 뿐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기뻐하시는 것을 많이 말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예배 가운데 성경이 많이 인용되는데,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바와 같이 주 예수님의 완전함과 뛰어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본질로 말미암아 예배를 받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존귀함으로 말미암아 높임을 받으신다.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감사가 드려진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 남자가 일어서서 떡에 대하여 감사드린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몸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떡으로 말미암아 감사드리는 말을 한다. 그리고 상()으로 나아가서 떡을 떼어 주위로 돌린다. 각각 믿는 자들은 떡을 작게 떼어서 먹는다. 떡이 주위를 돌아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같은 방법으로 고귀한 피를 흘리신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선택된 것을 나타내는 포도주 잔에 감사드린다. 그 잔은 떡과 같이 손에서 손으로 전하여지고, 각각 믿는 자들은 한 잔으로부터 조금씩 마신다. 잔이 상()으로 돌아왔을 때, 둘러 앉은 사람들로부터만 헌물이 드려지며, 그것도 또한 상() 위에 놓여진다.

이 즈음에서 한 사람의 남자가 일어서서 성경을 읽고 읽은 성경 말씀을 설명하고, 기록된 진리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 말한다. 찬송가가 불리고, 기도와 함께 모임이 끝난다. 모인 사람들이 일어나서 서로 따뜻한 악수를 하면서 인사하며, 사랑과 위로의 말을 나눈다. 이와 같은 모임은 거의 전세계에서 매주일 수천 군데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팔리시던 그날 밤에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정된 주님의 만찬을 통하여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고전 11:23-29).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