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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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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래 없는 증거

-주님의 이름 아래 모임-

 

이 장은 특히 젊은 믿는 자가 읽어야 할 장이다. 그러나, 마음에 와 닿고 감동을 주는 진리는 영적으로 가장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결코 너무 단순하거나 너무 정통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이는 복된 특권을 저자와 독자가 진심으로 이해하게 하소서!

지역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유일한 증거(간증)이다. 왜 유일한가 하면, 이 시대에 하나님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증거(간증)하는 존재로 신약성경이 인정하는 것은 지역교회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계 에는 많은 대조직과 대기구가 존재하며, 거기에는 좋은 점도 있고 좋지 않은 점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우리들의 유일한 안내라고 한다면, 집단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증거는 하나뿐이다. 다음과 같이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 신약성경은 초기 그리스도교를 기술할 뿐이며, 하나님의 의도는 지역교회들이 세상 나라들로부터 인정될 조직으로 묶는 것이며, 이리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대대적인 증거(간증)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의도하는 바를 말함에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모두 주셨고, 위에서 제시된 것 같은 의도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계에 있는 모든 제도와 조직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은 한 줄도 없다.

우리는 앞 장들에서 신약성경에는 영적인 몸된교회와 지역교회라는 교회의 두 측면만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교회들이 모종의 더 큰 집단이나 동맹이나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지역교회가 언급될 때, 그들은 결코(무엇 무엇의) 교회라 불리지 않았고, 그저 성도들의 교회들 혹은 그러한 모든 지역교회들에 적용되는 신약성경에 있는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진리를 지역교회의 독립 혹은 자치로 부르지만, 어느 쪽이나 다 충분하지 않다. 지역교회는 참된 의미로 자치가 아니고 분명히 자급자족이나 자기관리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각 지역교회는 주님에게만 책임을 져야 하며, 각 지역교회 자체의 장로 이외의 관리기관이나 계급조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인도된다(요한계시록 1:12-3:22). 지역교회는 사람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이 인정되는 하나님 중심주의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 시대에 발전하는 거대한 종교적인 조직을 기술한다. 마태복음 13장 안에 있는 비유들 중 두 가지에서 가시적인 성장이 보인다. 한 비유에서, 한 사람에 의하여 그의 밭에 겨자씨가 뿌려졌다. 그것은 큰 나무로 자란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31-32). 주 예수님은 밭은 세상이라고 말씀하시며(38), 새들은 악한 자라고 하셨다(19). 여기서 큰 나무는 그리스도교계의 한 묘사이다. 누룩의 비유에서 한 여자가 가루 서말속에 누룩을 넣어 전부 부풀게 한다. 누룩은, 참된 가치나 영적인 무게가 더해지지 않는 동안에 부풀게 하여 어마어마한 크기로 증가시킨다. 화덕에서 누룩을 주의하지 않으면 그것은 빵을 대단히 시큼하게 하고, 많은 양이 되게 한다. 누룩은 도덕적인 악(고전 5:6-8)과 말씀적인 악(5:9) 둘 다를 말하는 악의 원리이다. 그래서 거대한 조직은 종교계에서 성장했으나 그 전체 조직에 악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조직을 말할 때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주 예수님께서 위하여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성도들이 조직 안에 있는 것을 생각하여, 조직과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1) 존귀한 이름

우리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이는 진리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고자 한다. 주님께서 오신 그 하늘로 돌아가실 때가 이윽고 다가온 것을 아시고 주 예수님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에 주님께 속한 자들을 위한 인도 하심을 남기셨다. 주님은 많은 영적인 유산을 주님께 속한 자들에게 남기셨는데, 그 중에서도 고귀한 주님의 이름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라는 말은 감동적이다. 그렇게 귀하다고 한 것을 발견한 것은 무슨 말씀인가? 만군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예레미야 15: 16). 비슷한 말씀이 다윗, 이사야, 그리고 다니엘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위대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명기 28:1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신명기 에 넘치고 있는 진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모이는 곳에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어 다른 것과 구별한다는 것이다(신명기 12:5,11,14,18,21,26, 16:2,6,7,11). 그러나 이것은 구약성경의 진리이다. 오늘날 여기에 필적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야고보는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야고보 2:7)라고 겸손히 믿는 자들에게 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훼방하는 그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 이름은 존귀하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 난외(欄外)존귀하다라는 말에 명예로운(honored), 놀라운(wonderful), 아름다운(beautiful), 또는 숭고한(noble), 영광스러운(glorious), 뛰어난(excellent), 가장 아름다운(fairest)이라는 형용사로 존귀하다는 말을 대신하여 덧붙이는 것은 영어 표현의 불충분함을 나타내고 있다.왜냐하면 이 이름은 어떠한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과장될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이작 와츠는 다음과 같이 했다.

모든 영광스러운 이름들을 모아 보라

지혜, 사랑 그리고 능력의 이름을

죽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이름을

천사들이 나타내는 모든 이름을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우리 주님을 나타내기에는 너무 미미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안에 주님의 인격과 사역의 비교할 수 없는 모든 가치를 가지고 있다. 주님 자신의 모든 것과 주님이 하신 모든 것으로부터 나오는 이름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이 책의 2장을 읽었다면, 마태복음 18 20절의 문맥적인 해석에 대하여 얼마나 강하게 주장했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들 또한 분명해질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는 가장 소중한 진리이다. 이 구절 안에 두 번 in(개역성경에는 으로)이 나오는데, 그것에 주의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에서는 이 두 말이 서로 다르다. 나도 그들 중 (on) 있느니라는 주님의 위치이며, 지역교회에서 주님의 자리의 뛰어남을 포함한다. 첫째 내 이름 으로(unto-eis=한글 개역성경에는 으로로 되어 있으나 아래로로 번역될 수 있다)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어 eis는 방향을 의미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한 끄는 힘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들은 지역교회의 중심이신 주님께 끌린다. 그러나 이 방향적인 동작의 생각은 eis 의 뜻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으로(unto)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이름으로(unto)는 그 이름의 모든 권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의 권위로 복음이 전해지며(4:12), 믿는 자들이 침례를 받고(10:48), 앉은뱅이가 걸으며(3:16), 믿는 자들이 죄 용서의 확신을 가지며(10:43), 더욱이 그 이름의 영역 안에 비교할 다른 이름이 없다(2:9). (그러나 한글 개역성경에는 eis으로(in)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이름의 영역을 나타내며, 거기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의 모임의 중심이기 때문이다(18:20, 고전 1:1~9, 5:4, 10:25).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중에 다른 이름에 더 끌리는 자가 있겠는가? 내 이름으로(Unto My name)는 주님의 이름의 구분에 대하여 말한다. 증거를 흐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주와 주님으로서 참으로 주님의 이름을 시인한 모든 자를 연합하게 하는 것은 그 유일한 이름이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다른 모든 이름을 배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택하여진 이름들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한 위대한 종으로서의 기억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님의 이름을 대신할 만한 이름을 가진 종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2:9)라고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의 침례 같은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을 존경하는 어떤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내가 진리요라고 하신 분에게만 속한 장소를 나눌 만한 가치를 가진 어떤 규정, 진리 혹은 실행 등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교회정부(Presbuteros, episkopos)의 형태를 나타내는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장로나 감독들이 지역교회들의 주님의 이름을 대신할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것들이 공정하지 못한 요구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이 거대한 종교적인 조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들을 구분하는 제2의 이름을 그저 선택했을 뿐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을 그렇게 나누는 것은 결코 주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며(17:22-23), 2의 이름에 대한 그 생각은 매우 악한 것이다. 주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불릴 그의 이름을 남기셨지만,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은 편의를 위하여 제2의 이름을 가지거나, 그들의 생각에 따라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인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 자신을 나누기 위하여 제2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나의 이름은 가운데 이름 앞자를 더하여 15자가 된다. 나는 주님의 일로 종종 집에 없다. 아내는 나를 대신하여 공간이 충분하지 않은 많은 서류에 이름을 기입하도록 요구받는다. 그 때마다 6자 정도 되는 제2의 이름을 쓴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그녀는 몇 년 전에 나로부터 받은 이름을 포기 한 것이 아니라 편리함 때문에 사용했을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질문하겠다. 지금 지상에 계시지 않는 우리들의 주님은, 주님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이름, 또는 그 자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사용되고 있는 이름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에만 돌릴 뛰어나게 영예로운 자리에 필적할 만한 가치 있는 이름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제2의 이름은 주님의 이름에 욕을 끼치는 것이다. 사실 믿는 자들로서 다른 믿는 자들로부터 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들에게 배타적으로 적용하려고 취한 어떤 이름도 종파주의적인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동등하게 속하는 형제들, 그리스도인들, 믿는 자들이라는 이름은 결코 교파주의적 인 의미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지위적인 교만에서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말한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다. 인칭대명사와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사용 방법에 대하여 주의했으면 한다. 주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과 주님의 주권이 중심 주제인 것이 바로 이 서신이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들에게 붙이는 이름으로부터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부인하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을 취하자(3:17).

어느 날 먼 도시로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 어떤 사람이 내 옆에 앉았다. 그와의 대화는 금방 그가 믿는 자라는 것을 나타냈다. 내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깨우치셨고 구원하셨는지를 그에게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신 놀라운 이야기를 함으로써 기쁘게 반응했다. 내 마음과 생각에, 우리들은 같은 구주와 주님을 가지고 있다는 대단히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우리들이 주 예수와 주님의 인격과 사역의 가치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에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우리는 주님 자신께서 이끄신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한 저 두 여행자의 말을 반복할 수 있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동행자는 주님 안에 있는 매우 좋은 한 형제였고, 나는 내 마음이 그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나는 그가 영적으로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의 여행 막바지에 그는 그런데 당신은 뭡니까? 하고 물었다. 그가 말하는 바를 잘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나는 한 믿는 자이며, 한 그리스도인이며, 한번 잃은바 된 죄인이었으나, 지금은 하늘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시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주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자신을 지칭할 때 어떤 다른 이름을 쓰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내가 주님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당신은 믿습니까?라고 나는 되받아 물었다.

그는 당신은 플리머스 형제들 중 하나입니까?라고 재차 물었다.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결코 그 이름을 취하지 않습니다. 나는 영국의 플리머스에 간 적이 없고, 1840년대 초기에 거기서 만났던 큰 지역교회와 역사적인 어떤 관련을 가진 적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거기에 실은 큰 지역교회가 있었고, 거기에서 플리머스 주변 모든 지역으로 복음이 퍼져나갔다고 설명했다. 믿는 자들은 교파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았고, 그들의 전도에서나 대화에서 서로 형제라 불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플러머스에서 온 형제들이라고 그들을 명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교계에서 그 이름을 제2의 이름으로 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과거에 많은 위대한 영적인 사람들을 열거할 수 있는 교파, 일부는 아직도 그 속에 있는 교파, 그가 속해 있는 교파를 나에게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말할 때 우리는 하나였고 우리 사이에 어떤 종류의 분열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지금 벽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냥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로교 그리스도인이었다. 여기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반응은 그 사건을 말하는 설명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전에 제2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독자들 각자가 그 속에 들어있는 악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소서!

 

2) 경고의

여기서 우리는 차가운 형식주의와 살아 있고 활기 있는 식별력은 구분해야 한다. 교회의 질서와 이름에 있어서 올바른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 자체가 영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며, 내가 함께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조직에 있는 다른 믿는 자들보다 위에 놓는 것도 아니다.

가르침에 있어서는 명확하지만 상태로는 죽었거나, 슬프게도 주님의 마음을 전혀 닮지 않아 강퍅(剛愎)하게 된 입장을 본 적이 있다. 올바른 영적인 입장은 내가, 상응하는 겸손과 경건, 그리고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에게 올바른 마음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사실 주님은 우리들이 취하는 바로 그 근거에서 우리들을 영접한다. 우리들은 모든 일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킴에 주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것은 지속되어야 하며, 외형적인 실행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우리들의 내면적인 면에서도 지켜야 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에 보낸 부활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 장()을 마치기에 적절하다. 주님 자신의 입술로부터 듣는 것처럼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들을 겸손하게 할 것이며, 주님의 말씀과 성령께 의지하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3:8). 우리들이 유일한 이름과 관련되는 어떠한 진리도 부인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도와 주소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