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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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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3. 14:24 횃불/ 2000년

영원한 구원(20)

- H. p. 바커 -

영원한 구원을 반대하는 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성경구절들(6)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2:1-3).

우리가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받은 그들의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하고 자기의 아내를 등한히 여긴다고 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구원을 등한히 여김으로 그들의 구원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기쁨과 복된 교제를 놓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 위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12:5-11, 고전 11:32, 2: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들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3:12)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기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구원을 놓치게 된다든지 혹은 영벌(永罰)에 처하게 되리라는 뜻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퇴보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믿음으로 죄의 형벌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소유해야 할 모든 기쁨과 축복의 세계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되는 일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3:13).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11:1-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즉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3:7-19).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4:1)

아울러 히브리서 4:1-16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곧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땅이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가나안 땅은 여전히 싸움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이 없었던 연고로(불신앙의 연고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에서 누릴 수 있었던 기쁨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 대신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소유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유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허락된 축복( 1:3)을 불신앙의 연고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6:4-8)

여기 이 말씀은 신자들의 영원한 구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구절입니다. 이 부분에 나타난 말씀 전체를 자세히 읽고 또 그 아래에 나오는 몇 구절 말씀도 읽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가 구원을 놓치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원을 놓친 자는 다시 회개하고 새롭게 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타락한 자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원받을 것을 촉구합니다. 만약 이 구절들이 믿는 자가 구원을 놓칠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와 동시에 이 구절들은 타락한 자들은 다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에서는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는 말씀이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

이 구절의 말씀은 하나의 가정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여기에서 어떤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가정하므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거기에는 이러한 결과가 따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처음의 전제()가 타당치 않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3-19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가운데서도 이 논리를 사용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먼저 부활이 없을 경우를 가정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 구절( 6:4-8)이 이와 같은 논리를 따른 것이라면 기자는 여기에서 신자가 타락한다(구원을 놓친다는 것)는 것을 가정하고, 그 결과는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가정은 사실이 아니고 신자가 타락하는 일(구원을 놓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

이 구절들은 구원의 문턱까지 왔다가 돌아서서 타락한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은사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을뿐입니다. 맛본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지( 4:14), “내가 주는 물을 맛보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맛을 본 후에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에 참예한 바 있는 자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이 보여주시기 전에는 영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그리므로 여기에서는 성령이 구원에 관한 진리를 어떤 사람에게 보여주었으나 그 사람은 진리를 알고 난 후 받아들이지 않고 돌아선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이 보여준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역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그 활동을 중단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느 추운 날 밤 어둠 속에서 길을 걷고 있던 사람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추운 밤중에 길을 걷던 이 사람은 열려 있는 문 앞까지 와서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방안에서 나오는 따뜻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으나 방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맛을 보았을 뿐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맛을 본다든지 진리를 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인들(진실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어서 말씀된 히브리서 6:9을 볼 때 분명해집니다.”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히브리서 6:4-8에 언급된 이들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여기에 나타난 인칭의 변화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6:1-3에서는 우리, 6절에서는 타락한 자들자기, 그리고 9절에서는 우리너희로 나타나 있습니다.

 

세 번째 해석

나의 견해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성장을 계속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경고를 이 구절들에서 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줄로 생각합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요청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축복과 상급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며, 다만 불에 타버릴 행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앞의 말씀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장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불신앙으로 약속의 땅(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예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그 땅의 거민들을 그들 앞에서 몰아내시기로 약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였을 때에도 그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고 결국은 그 시체가 광야에서 엎드러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3:17).

또 히브리서 4장에서 기자는 신자들을 위한 안식이 있으나 어떤 자들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바로 이 안식의 비유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늘나라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이 승리를 가져다 주는 장소이기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그 장소에는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나안 땅은 신자들에게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장소,즉 승리와 축복과 안식이 있는 장소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5장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가 영적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기자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진리가 많으나 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이들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6장 말씀에서도 계속되어 기자는 6:1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출발하여) 완전한데(영적 성숙) 나아갈지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자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떤 자들에게는 영적 성숙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4-8절의 무서운 경고가 따른 것입니다.

렌스 B. 라잠(L. B. Latham)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들에게 회개가 일어날 수 없다고 한 것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회개를 말한 것이다. ‘듣지 못하고’ ‘젖만 먹는’”이들, 즉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무서운 경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무서운 경고는 필요하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는 저들이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이것은 칭의와는 관계가 없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하여 들보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여주시고 대적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영적인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비록 거부하는 때가 있을지라도 그의 백성들을 버리지는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은 자.”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

성령에 참예한 바 된 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새의 능력을 맛본 자.”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임이 틀림없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라는 말씀에서 비췸을 얻다는 히브리서 10:32에서 빛을 받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빛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빛을 전적으로 체험한 바 있는 자들입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들.” 이들은 맛을 본 자들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단순히 구원을 시식하였다든지 혹은 실제로는 믿지 않고 구원의 문덕까지만 왔다는 그런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6:4,5에 나타나 있는 맛보다라는 말은 히브리서 2:9에서 사용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와 같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죽음을 시식(試食)만 하시고 완전히 죽음 가운데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 이 헬라어는 사도행전 10:10, 20:11, 23:14에서는 먹는다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헬라어는 체험하다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하늘의 은사를 체험하고”( 6: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체험하고”( 6:5).

성령에 참예한 바 된 자들.” 여기서 참예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서 3:1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거기에서는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히브리서 3:14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12:8에서는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로마서 8:9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 이 말씀은 저들의 생활 속에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어느 정도의 열매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6절에 나타난 타락한 자들이란 영적인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타락하고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염려가 그들로 하여금 열매를 풍성히 맺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여기에서 다시 새롭게 하여라는 말은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윌리암스 역에서는 저들을 계속적으로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렌스 B. 라잠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여기에서 회개라는 말은 구원과 관련시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회개의 정확한 뜻은 마음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회개라는 말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도 자주 적용되고 있는 말이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회개하므로 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그 인격에 직결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자아 혁신이나 율법적인 순복이 아니다(우리는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들에서 이에 대한 입증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회개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저들의 칭의(稱義)와는 조금도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의 실수에 대한 회개를 할 때는 그것은 칭의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만약 신자가 어떤 죄를 범하고 회개를 하지 않을 때는 필요한 회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다(고전 11:31,32). 그리고 또 이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행한 그대로 받는다(고후 5:10).”

영적인 성숙을 향하여 전진하기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반드시 한 지점이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인이 이제 소원한다 할지라도 영적인 성숙을 향한 전진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온전히 믿기만 했더라면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을 하나님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에게 허락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받고는 있으나 가나안으로 비유할 수 있는 그 안식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6,17에 보면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생각하고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그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의 예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이와 같은 소치로 말미암아 그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2:17). 오늘날에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세상을 사랑하므로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놓쳐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그 후에 축복을 받으려고 해보나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7,8에서 기자는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채소를 내는 땅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하지 않고 무가치한 행위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에 비유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두 가지 종류의 밭의 비유와 흡사합니다( 13:1-23, 4:1-25, 8:4-15). 좋은 땅은 많은 열매를 냈으나( 13:23) 가시떨기가 있는 땅은 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내지 못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에서 버림을 당하다라는 헬라어는 인데 이 헬라어는 고린도전서 9:27에서도 바울에 의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이 말은 버림이 될까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원을 놓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놓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6:8에서 버림을 당한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저주함에 가까웠다고 말한 것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행위(공력)를 시험하는 데 대한 말씀인 고린도전서 3:12-15을 읽어보십시오. 이 말씀은 히브리서 6:7,8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공력)는 불에 의한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13). 이때 그 공력이 불타버리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 그리스도인은 상을 받습니다(고전 3:14). 만약 그 공력이 불타버리면 그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받을 수 있었던 상급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15).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도 상급만 놓칠 뿐 여전히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히브리서 6:8에서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한 말씀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불타버리는 것은 이 아니라 그 땅에서 난 가시와 엉겅퀴 입니다.

요한복음 15:6에 보면 그 곳에도 신자의 무가치한 행위(공력)가 불타버린다고 하신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6:4-8)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여기에 나타나는 대명사의 인칭변화를 지적합니다. 1절과 3절에서는 우리라는 대명사가 나타나 있고 4절과 6절에서는 이것이 삼인칭으로 변하였다가 9절에서는 다시 우리너희라는 대명사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명사의 이같은 변화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4-6절에서 언급된 자들과 같은 그런 경지까지 뻗어나간 것으로는 믿지 않은 데서 온 것입니다. 기자는 9절에서 너희에게는 이보다 낳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여기에서의 구원은 죄와 형벌로부터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과거에 속한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구원은 현재 저들의 생활 속에 있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6:4-8의 무서운 경고를 기억하면서 6:12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을 것을그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기업을 놓칠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2000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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