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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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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역교회 간의 교제

 

지역교회 간의 교제라는 주제를 보기 전에, 우리는 모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질문인 모본(모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혹은 교훈이 모본(모형)9)보다 더 권위를 가집니까?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책의 개론에서 해석의 원칙들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지역교회의 실천에 우리를 인도하는 긍정적인 모본을 주셨음을 보았다.

우리가 그 모본이 긍정적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모든 것을 열거하지 않고서도 우리가 해야 할 것에 대하여 긍정적인 인도하심을 주시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사한 것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건축자에게 말하지 않고, 건물의 재료, 치수, 그리고 설명에 대하여 긍정적인 지시를 주는 건물에 대한 청사진에서도 취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청사진 속에 없다면, 건축자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건축주와 투자자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참으로 일하고 있다면 말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지역교회들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종류의 모본(식양)이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모든 성경 학도는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줄 뿐 아니라 우리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모본(식양)을 주신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라고 교리적으로 말할 뿐 아니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5:8-9)라는 교훈도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규정으로 된 목록 형식으로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살아 있는 실례(모본)를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5:2)라는 것을 읽는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리(원칙), 교훈 그리고 모본(모형)을 주신다.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는 일치가 있다. 이것이 긍정적인 모본의 원칙이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하나님의 본을 하나님 자신의 아들 안에 주셨고, 하나님을 본 받는 모든 자 안에 좀 낮은 정도의 본을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4:9)라고 쓸 수 있었다.

위의 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초보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러한 원칙들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에 대한 이해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인 원칙들을 다시 말할 필요가 있다. 많은 지역교회의 실천들이 신약성경 안에서 경건한 모본(모형)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한 교훈이다. 그러나, 안식 후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20:7)는 신약성경의 모본(모형)이다. 교훈과 모본 사이의 일치를 보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다. 그러한 일치가 분명할 때, 모본은 교훈과 똑같이 중요하다.

지역교회 간의 교제라는 이 문제에서 있어서, 우리는 우리들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신약성경의 교훈과 모본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한 지역교회만 있었다. 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질서와 기능에서 하나님의 모본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교회들이 생기기까지, 지역교회들 간의 교제의 모본이 될 수 없었다. 다소 사람 사울이 회개했을 즈음에 지역교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9:31). 지역교회들의 연합(연맹) 혹은 조직은 신약성경에 없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역교회들이 함께 연합해서 유대 민족교회 혹은 로마 국가교회 혹은 마게도냐 연합교회 등을 만드는 것 같은 일은 결코 없다. 우리들이 인도하심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본의 원칙을 믿는다면, 이 고찰은 엄청난 무게를 지니게 된다. 지역교회들의 그룹이 함께 조직되어 무슨 무슨 교회라고 불린 적은 결코 없다. 한 지역교회는 교회의 부분도 아니고, 교제의 부분도 아니고, 연맹의 부분도 아니며, 한 개별적인 지역교회는 그 자체의 지역 범위 안에 있는 독립적인 하나님의 증거(간증)이다. 그래서 그 표현을 지역교회라고 한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 모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지역교회들은 서로 교제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 진리는 거의 가르쳐지지 않는다.

9) Pattern은 모범, 원형, 모형. 도안 등의 의미가 있으나 이 책에서는 주로 모본으로 해석하기로 한다(역자주)

 

1) 지역교회 간의 교제의 기초

복음의 확산 순서는 예수님께로부터 미리 말씀되었다(1:8).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이 유대로 퍼지고, 유대의 범위를 넘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진다. 바울은 다메섹(다마스커스) 가까이(9:3)에서 구원 받았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교회에 영접되었다(9:26-28).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을 때, 형제들은 바울을 가이사랴에 바래다 주고, 그리고 다소로 보냈다(9:30). 사도행전 11 25-26절은, 바나바가 다소로 가서,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 거기서 믿는 자들과 함께 일년 간 모여 큰 무리를 가르친 것으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알게 한다.

안디옥에 있는 믿는 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믿는 자들에 대하여 매우 가까운 친근감을 느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안디옥까지 가게 한 스데반의 죽음이 뒤따랐다. 처음에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졌으나,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11:20-21). 말씀 전하는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왔고, 복음의 열매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까지 갔다(11:22). 그들의 관심이 너무 커서 그들은 즉시 바나바를 보냈고, 바나바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11:23).

안디옥에 있는 지역교회가 유대에 있는 믿는 자들을 어렵게 한 큰 흉년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11:29-30)냈다.

이것은 교제의 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명령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거기는 조직적인 요구가 없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해주고, 사랑하는 형제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게 한 지역교회에 대한 감사의 한 표현이었다. 같은 주님에 대한 헌신과 같은 진리들을 인정하고 실천함으로 연결되었다. 지역교회들 간에 교제에 대한 첫 언급에서, 우리는 우리가 분명한 모본을 가진 것으로 믿는다.

안디옥에 있는 지역교회로부터 바나바와 바울은 주님께서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천거 받았다(13:2). 이 첫 전도여행은 그들을 멀리 북쪽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까지 가게 했고, 이고니온, 루스드라 그리고 더베까지 갔다. 영혼들은 구원 받았고 지역교회들은 심겨졌고 가르쳐졌다(14:21-23). 그 열매 있는 여행으로부터 그들은 안디옥으로 돌아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14:27) 했다. 안디옥에 있는 지역교회에서 말씀 전하는 자들이 나가, 그들의 일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축복하셨는지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거한 모임과 새로 형성된 모임들 사이에 사랑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는 지역교회의 비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전송을 받았다(15:3).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교회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15:4) 했다. 그러나 이방 세계에 복음 전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올라온 유대인들이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15:1)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15:5)라고 말했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겼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이 되는 이방인을 얻는 수단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저 유대교의 한 종파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지역교회 간의 교제가 어떻게 되는지 보자.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교회의 장로들은 수리아(시리아), 비시디아 혹은 루가오니아에 있는 지역교회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교회에 대하여 책임을 졌다.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사도들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때에도 이것은 우리들이 계속 따라야 할 모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교회가 이 문제를 교제해야 할 이유는, 그들의 편지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15:24)했기 때문이다. 이 다른 지역교회들을 괴롭게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나갔다. 그리고 예루살렘 장로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지역교회로부터 안디옥으로 바나바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교제가운데 있었다.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의 권위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그것은 교회들의 회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로부터 나간 사람들에 대한 책임 있는 방법 가운데서 행동하는 한 지역교회에 있는 장로들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분명히 이방인 교회들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나간 일군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지역교회의 책임은, 한 일군이 멀리 수고하는 일터로 보냄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주님을 섬기고 있으므로 어느 지역의 장로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 말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들의 실행이다. 사람들은 멀리 복음을 전하도록 천거를 받는다. 본 지역교회의 교제는 기도하고, 계속적이고 실제적인 지원 가운데서 표현된다. 그리고 먼 곳에서 새 지역교회가 형성될 때, 거기에는 교제의 고리가 있으며, 상호간에 관심이 있다. 북아일랜드, 북미 그리고 지역교회가 발견되는 거의 모든 다른 지역에 있는 지역교회들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교제가 성립되는 방법인 것을 안다. 일군들이 알려지고, 역사()에 대하여 뜨거운 관심이 따르며, 같은 진리들이 가르쳐지고 행하여지며, 그리고 상호간의 사랑과 관심으로 교제가 유지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사람들이 미국으로 왔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며, 믿는 자들에게 침례를 베풀며, 성경에서 최근에 배운 모임(집회)의 진리들을 가르치므로 그들과 함께 많은 축복이 왔다.

지역교회 간의 교제는 복음이 확산되는 수단 위에 기초한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말씀(1:8)에 맞는다. 교제는 또한 상호간의 사랑과 관심에 기초되어 있으며, 결국 우리가 같은 진리를 믿는 것과 신약성경의 모본을 따라 우리들이 모이는 것 같은 경건한 단순함을 행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직적인 제휴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