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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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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구약성경에 나오는 여성들의 섬김

 

여성들은 거룩한 역사에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 만약 우리들이 신약성경 기록에서 여성들의 섬김을 평가하려면, 구약성경의 여성들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고, 그리고 이방 세계에 있는 여성의 지위와 대비하여 성경에 나오는 여성들을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신약성경은 유대인 사회에서 여성들이 결코 가지지 못했던 위치로까지 여성들을 높인다.

 

1) 구약성경의 위대한 여성들

사람과 사람이 권세를 받아 다스리는 창조물에게 사망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 아담은 믿음으로 그의 아내를 하와····산 자의 어미(3:20)라 불렀다. 타락의 그 어두움 속에서, 아담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분이 한 여성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중요함을 붙잡아야 했다. 그녀는 그녀를 통하여 구속의 대()드라마가 이루어질 도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은 순종하는 위치를 가져야 했다. 두 가지 이유가 디모데전서 2:11 이하에서 주어졌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3-14). 만일 이 사실들이 같은 장의 15절에 뒤따르는 것과 연계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자의 구원은 약속된 구속자를 세상에 오게 하는 여자의 역할이라고 믿는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여자가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여자가 아드님을 낳는 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영어 개정역>)(15). 왜냐하면, 구원의 주님을 세상으로 오시게 하는 놀라운 영예가 그 여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위대한 네 사람에 대한 책이라고 불렀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다. 그러나, 또한 네 명의 위대한 여인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사라, 리브가, 레아 그리고 라헬이다. 사라는 특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구로 사용하시는지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이 약속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보일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리고 나서,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21: 1). 인간의 연약함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행하신다.

모세와 아론의 누나 미리암은 그녀와 아론이 모세에 대항하여 말했을 때, 문둥병이 들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녀를 위해 부르짖었고, 문둥병은 깨끗하여졌다. 모세는 그녀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녀에게 생명과 쓰임의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미리암은 갈대 사이에 있는 아기 모세를 서서 지켰을 것이다.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었을 때, 미리암은 모세의 유모로 그녀의 어머니를 제안할 것을 재빠르게 생각하였다. 모세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하여 양육되어 이스라엘의 구속자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종의 하나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것이 한 어린 소녀의 지식과 지혜에 따라 정해졌는가! 미리암은 여자 선지자로 불렀고, 홍해 및 광야에서 위대한 구속의 노래를 하는 데 이스라엘 여인들을 인도하였다(15:20-21).

사사기 4장과 5장은 용감한 두 여성의 역사를 기록한다. 가나안 왕 야빈의 20년간의 포학 아래서 괴롭힘을 당했는데도 그 압제자의 바퀴에서 나라를 구해낼 사람이 한 사람도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게는 어두운 시대였다.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는 야빈의 군대가 실질적인 노예상태로 이스라엘을 붙잡는 데 도울 철병거 9백 대를 가지고 있었다. 사사였던 여선지자 드보라는, 바락을 분기시켜 이스라엘 지파들을 모집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나안 연합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인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입었다. 바락은 드보라가 싸움에 함께할 것을 주장했다. 그녀는 같이 갈 것을 동의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때, 그것이 바락에게 영예가 안될 것을 예언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스라가 전장에서 도망쳤을 때,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 시스라를 그녀의 장막으로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거기서 야엘이 시스라가 곤하여 잠들었을 때 장막 말뚝으로 그의 살쩍(귀밑 털)에 박았다.

여선지자 훌다는, 요시야 왕과 이스라엘 대제사장으로부터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질문 받았다(왕하 22:13-20). 이사야조차도 호의적인 말로 한 여선지자에 대해 말한다(8:1-3).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에 하나님과 잔존자들에게 적이었던 노아댜라고 불린 여선지자가 있었다(6:14).

이 사건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명백할 것이다. 이것은 통례(通禮)에 예외적이다. 구약성경에서 유대인 여성들은 가족에 관한 가사들을 다스리는 가정에서 존엄과 책임 있는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잠언 31:10-29에 나오는 정숙한 여인의 기술에서, 그녀는 영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존경받으며, 그 값은 진주보다 더( 31:10) 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여선지자도 아니고, 사사도 아니며, 그리고 군대장관이나 힘 있는 전사를 죽인 자도 분명히 아니었다. 구약성경의 일반적인 방침은, 여성들은 가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가솔들의 필요에 그녀가 종사하며, 그녀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훈련시킨다는 점을 지지한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명부에 어머니들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위대하고 경건한 여인은 위대하고 경건한 왕을 낳았고, 그리고 비참하게도 그 반대도 또한 사실이었다.

드보라와 야엘은 그 당시로서는 예외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공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던 암흑시대에서였다. 구약성경에서조차도 이것은 경건하다는 여인들이 따를 모본이 아니었다(벧전 3:1-7).

이스라엘 시대에 남자들이 하나님을 섬김에 뛰어나지 않았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나실인 서원을 하였다(6:2). 하나님은 그 자신을 하갈(16:8), 사라(18:19) 그리고 삼손의 어머니(13:3-25)의 경우에서처럼 여인들에게 나타내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11:35)였다고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명하신 사르밧의 경건한 과부(왕상 17:8-24)는 이 여자들 중 하나였다. 경건한 한나, 충성된 룻, 회복된 나오미 그리고 용감한 에스더에 대해서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마태복음 1:1-16에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나는 네 명의 여인의 이름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언급되어져야 한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밧세바는, 마침내 이 세상에 구세주를 오시게 하는 긴 사건들의 그 진행에서 중요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큰 영예를 얻었다.

 

2) 그리스와 로마의 여성들

주님의 여성에 대한 대우와 그리스와 로마에서 여성들이 받은 지위 사이에는 큰 대비가 있다.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 많은 여성들을 높였기 때문에 그 변화는 종종 혁명으로 언급된다. 그리스 사회는 주변의 이방나라들보다는 더 높은 존경으로 여 성들을 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적인 특권들을 전혀 갖지 않았으며, 가정에 있는 가내구역의 은둔된 데서 살았으며, 그들의 남편들로부터 거의 충성된 종처럼 여겨졌다. 위대한 시인, 작가, 화가 그리고 건축가로 알려진 사람 중에 문학, 예술 혹은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여성은 한 사람도 없다(Edersheim). 그리스 여성들의 엄청난 지식에 대한 좋은 증거가 있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여성들은 독학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가정 밖에서는 여성들은 두드러진 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로마의 법은 남편에게 그의 아내와 가솔들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규칙을 주었다. 그러나 실행에서는 로마의 여 인들은 그리스인 세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지위를 획득했다. 여성들은 자유롭게 종교활동에 참여했으며, 종종 국가 공직에 대한 영향력을 가졌으며, 공적인 추문과 부도덕에서 그리스 여인들을 훨씬 능가했다.

유대인 가운데에서 여성은 가정에서 존엄과 높은 영예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자녀들은 주님께로부터 온 산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가정 밖 공적인 영역에서는 오로지 그녀의 남편에게 속했다. 여성들의 공적인 생활은 그녀의 종교적 인 생활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 혹은 가족의 남자들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는 배제되었다. 랍비들은 여성들에 대하여 열등함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실천에서는, 그들은 남성과 같은 교육을 여성들에게 주기를 거부했고, 그들은 대부분의 종교적인 주제들은 여성들의 지적인 능력 밖이라고 생각했다(Edersheim).

 

3) 복음서에 나오는 여성들

여성에 대한 주 예수님의 태도는 그리스, 로마 혹은 유대인 사회에 있는 여성들의 지위보다 훨씬 격상시켰다. 주님은 여성들에게 높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주님을 향한 그녀들의 섬김을 받으셨고, 주님을 증거하도록 그녀들을 보냈다. 복음서 안에서 여자들이 주님을 매도하거나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종종 언급된다. 주님은 여자에게서 나셨다(4:4). 주님이 아이로서 순종했던 어머니는 주님의 행동을 지켜보았으며,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였고, 그녀의 마음에그 말씀들을 두었다(2:51). 주님의 공적인 사역에서,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은 여자들로부터 섬김을 받았다(8:3). 여인들이 주님의 십자가 옆에 서 있었고(19:25), 한 여인이 주님의 무덤에 남아 있다가 부활한 주님을 처음 보는 큰 영예를 얻었다(16:9).

주의 모친 마리아는 하나님의 가창 영예로운 종들 중의 하나였다. 마리아는 로마 교회에 의해 잘못 숭배 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반대하여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아니한다. 마리아는, 오실 구원의 주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첫 약속의 한 부분이다(3:15). 그녀는 이스라엘 모든 집의 한 표적이었다(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의 가장 겸손한 종들 중의 하나였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를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불렀을 때,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1:26-29). 마리아의 반응은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8)였다. 마리아는 종교가 그녀를 하늘의 여왕으로 나타낸 것을 알고 얼마나 충격을 받겠는가!

마리아는 주 예수님 자신을 제외한 하나님의 어떤 종에게 부여된 것보다도 더 실행하기 어려운 봉사를 맡았다. 처녀들은 출산을 하지 않는다. 누가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믿으려 하겠는가? 그 의로운 요셉조차도 천사의 방문으로 그에게 밝혀지기까지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격리시키려고 마음먹었다(1:19-20). 주 예수님은 지상 생활 내내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치욕을 참으셨는데, 그들은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8:41)다고 말했다. 죄에 대하여 관대한 오늘날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마리아에게 부과된 짐의 크기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마리아의 사촌 엘리사벳만이 이해했다(1:39-45).

마리아의 봉사는 결코 반복될 수 없다. 마리아는 하나성의 아들의 기적적(초자연적)인 수태를 위하여 하나님의 택한 도구였다. 겸손한 젊은 여자에게 주신 말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1:35)는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마리아의 이해는 그녀가 살던 시대에서 어떤 다른 사람과도 비교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한 종을 사용하셨다. 마리아는, 다윗의 집, 상속자, 보좌 그리고 왕국에 대한 위대한 약속들이 모두 그녀의 태에 있었고, 유아로서 돌보았던 아기에게 이루어질 것을 알았다.

마리아의 위대한 찬양 송가(1:46-55)는 대단히 깊은 영적인 이해를 표현한다. 마리아는 십자가 옆에 섰었고, 칼이 마리아의 부드러운 마음을 찌르는 한편(2:35),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에는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다락방에는 보였으며, 약속의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1:14).

그러나 복음서는 주님께서 공적인 생애에 들어가신 이후 마리아의 어떤 공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공적인 생애 동안에 마리아의 말이 두 번만 기록되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는 주님에게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2:3)고 말했고, 이 말이 주님으로 하여금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2:4)라는 말씀을 하게 했다.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으며, 비록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일지라도, 한 여자의 통제아래 있을 수 없었음을 예증한다.

두 번째 사건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 가운데서 마리아가 주님을 찾을 때였다. 주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주님을 찾고 있다는 말을 주님께서 들으셨을 때,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31-35)라고 대답하셨다. 마가는 이 사건을 주님의 공적인 사역의 시작에 기록하여 자연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관계가 앞섬을 보였다.

마리아에 대하여 소홀한 것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것을, 비교하여 헤아리기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로 돌아가서 보라 네 어머니라(19:25-27)라고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에게 말씀하시는 고난의 주님을 볼 필요가 있다.

주 예수님은 랍비들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하셨다. 주님께서는 여성들에게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셨다. 베다니에 있는 가정에서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Mary also sat at Jesus feet and heard His word)(10:39) 들었다. 또한(also)은 마르다도 주님의 발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보인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파악하여, 주님의 장사(장례)를 위해 미리 기름을 부은 것은 마리아였다(12:7). 그녀는 또한 주님의 부활의 위대한 약속을 이해했다(11:20-44). 마리아는 영적인 이해를 하고서, 향품을 예비하고 무덤에 간 다른 여자들과 같이하지 않았다(24:1).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마리아가 이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

주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서 사마리아 여인과 긴 영적인 대화를 가지셨다. 랍비들의 문서는 남자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어떤 여자에게도 말을 걸어서는 안 되며, 심지어 자기 아내에게조차도 안 된다라고 말한다(Edersheim). 어떤 여성을 가르치는 것 특히 어떤 사마리아 여인을 가르치는 것은 유대인 관행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이 가난하고 죄 많은 여인에게 주님은 그녀의 죄를 나타내셨고, 그리고 놀라운 은혜가운데서 주님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 때, 이 새로 거듭난 영혼에게 하늘에서 오신 주님은 성경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영적인 예배에 관한 가장 높은 진리를 가르치셨다. 주님은 주님께서 여성들이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높은 영적인 진리들을 이해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셨다는 분명한 증거를 주셨다.

복음서 안에서 주 예수님이 주님의 매일의 필요를 여성들을 통하여 공급하게 하셨다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고 다정다감한 것은 없다. 집사(일군)의 봉사(섬김)는 물질적인 돌봄(6:1-6)에서 놀라운 한 몸 진리를 선포하는 일(3:7)까지 신약성경에서는 대단히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복음서 안에서 집사의 봉사는 천사(4:11)에 의하여 나타나거나 여성들(8:15, 8:3, 10:40)에 의하여 나타난다. 이 섬김은 베드로의 장모(8:15), 마르다(10:40)또한 악귀를 몰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8:2-3)긴 여인들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공관 복음서 각각은 이 여성들을 말한다( 27:55, 15:41, 8:3). 다섯 이름, 곧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마리아와 살로메가 적혀 있다. 그러나 각 저자는 다른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각 목록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열두 제자의 모든 이름 가운데에서는 베드로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의 공동 자금에 가장 많이 기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만이 드림(섬김)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방법을 아신다. 막달라 마리아는, 두 렙돈을 주님께 드린 과부처럼(21:2),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값나가는 것을 드렸던 것 같다.

이 사람이, 제자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때, 무덤에 남아서 울던 귀한 여인이었다. 흰옷 입은 두 천사의 현란한 광경에서 그녀는 사랑에 이끌려 제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으나, 그녀는 주님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참된 한 마리의 양으로서, 그녀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주님은 자기 양의 이름(10:3)을 부르셨다. 자기 양에게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고, 그녀는 랍오니여 하고 응답했다. 주님은 마리아를,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놀라운 말씀과 함께 주님의 형제들에게 보내셨다(20:10-19).

이 밖에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2:38)한 여자 선지자 안나로부터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여인들(19:25)에 이르기까지 복음서에 나오는 여성들에 대하여 들 것이 더 많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모든 섬김에서, 각각은 여성의 봉사 영역이라고 올바르게 불릴 수 있는 것에 관여했었다. 안나의 말은 개인 대 개인이었고,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다른 여인들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하였다. 향품을 준비하고, 장사(장례)를 위하여 기름 붓는 것은 여성들의 일이었다. 여성들이 그 자신들의 일에 종사함으로써 여성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먼저 보는 영예를 얻었다. 게다가 여성들은 그 큰 사건에 대하여 세상에 전하라고 부탁받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보냄을 받았다.

이것은 주님께서 열두 제자에 여성들을 포함시키지 아니하셨으며, 사도행전 1장에서 타락한 유다를 대신할 여인을 택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바울이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할 때, 바울은 여인들을 완전히 했다. 하나님의 감동을 부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바울이 편견을 가지고 이것을 빠뜨렸다고는 거의 말하지 못할 것이다. 여성의 일(봉사)의 영역은 중요하다. 여성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거나 하려고 하지 않는 방법으로 주님을 섬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조차도 여성의 영역은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여성의 영역으로 한정된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