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15 초기 지역교회의 경건한 여성들

 

1) 초기 지역교회의 경건한 여성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성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임무, 교회의 탄생, 예루살렘에서 첫 지역교회가 시작된 것, 그리고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로마제국의 끝까지 퍼짐에 대하여 기록한 이 놀라운 책은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로 시작된다. 이 방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있었다고 믿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도들과 함께 계속 기도하는 그 방에 여인들이 보인다(1:14). 그러나, 베드로가 열두 명에서 빠진 자리에 채울 사도를 뽑는 일의 필요에 관한 문제를 말했을 때, 그는 거기에 있던 남자들을 말했다(1:15-16). 이것은, 주님께서 주님의 제자들로 열두 남자들을 택하고, 신약의 모든 저자들이 남자들이었으며, 지역교회들이 형성될 때 모든 장로들은 남자였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오순절날 즉시 뒤따른 축복 가운데서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5:14). 다소 사람 사울이 성도를 박해하는 자의 지도자로 일어났을 때,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8:3). 박해받고 순교한 성도의 가장 용감한 많은 분들이 여성이었다는 것은 오랜 증거(간증)의 역사였다. 도르가는 사슴이라는 의미이다. 그녀는 그 이름에 걸맞게 정숙함, 겸손 그리고 은혜를 소유하고 있었다(9:36-42). 그녀는 신약성경에서 제자라 불린 유일한 여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충성스럽게 그녀의 주님을 따랐다는 것 그 이상의 그 어떤 추론도 끌어낼 필요가 없다. 모든 남녀 믿는 자들은 사도행전 초기 시대에는 제자들이라 불렸다(9:26). 다비다, 혹은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9:36)았다. 그녀의 죽음조차도 하나님께 영광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결과가 되었다(9:42).

루디아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회개한 자였다(16:14-15). 구원 받은 수백만 명의 유럽인 가운데서 첫 번째는 한 귀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비록 아시아에 있는 두아디라 출신이었지만, 그녀가 거기서 하는 사업 때문에 빌립보에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사도들에게 가정을 열었고,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회개에 이어서 구원 받았다. 루디아와 같이 강가에 기도하러 갔던 여인 중 몇몇은 빌립보에서 처음 회개한 자들 중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사역에서 유명한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4:2-3).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귀부인들이 구원 받았다(17:4,12). 이 도시의 귀부인들은 그들 각각의 사회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새롭게 믿은 자들에게 오는 고난을 함께 나누었다. 사도행전 17장을 닫으면서, 아덴(아테네)에서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 중에 다마리의 이름만이 올라 있다. 그녀는 믿는 자 중에서 주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고린도에 있는 복음 사역에서 먼저 한 경건한 부부와 연결된다(18:2-3). 그들의 이름이 신약성경에 여섯 번 나오는데, 그 중 네 번 브리스길라가 먼저 언급된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글라우디오 시저가 A.D. 49년에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하라는 영을 내렸을 때, 이 부부는 로마에 있었다. 이 추방은 바로 그리스도인 박해로 이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경건한 부부는 이미 믿는 자였고,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 그들의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거했고, 업이 같으므로 함께 일했다. 그들이 바울을 위하여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것은 아마 이 때였을 것이다(16:3-4).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그들은 에베소까지 바울과 함께 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그들은 여전히 에베소에 있었고, 지역교회는 그들의 집에서 모였다(고전 16:19). 성경에 능한 유대인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거기에 거주지를 정한 지 얼마 안 되어 에베소로 왔다. 회당에서 있었던 아볼로의 힘 있는 호소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 하여금 아볼로를 그들의 가정으로 데려가게 했다. 거기서 그들이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18:26). 이름의 순서10)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이다. 가르칠 때는, 브리스길라가 남자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딤전2: 12 참조). 그러나 가정 영역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능력 있는 아볼로를 가르쳤다.

10) 한글 개역 성경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순서이나 KJV에는 when Aquila and Priscilla had heard···· (Acts 18:28)와 같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순서이다.

누가가 이 부부에 대하여 볼 때, 그는 애칭인 브리스길라 를 사용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녀에 대하여 쓸 때는, 그는 귀부인이란 의미인 브리스가라고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아마 그녀는 상류계급의 부인이었을 것이다(Wm. Ramsay).

바울의 생애 마지막에서 바울은 이 부부에게 인사를 했고, 브리스가를 먼저 거명했다(딤후 4:19), 그들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죽음 이후에 로마로 되돌아 갔고(16:3-4), 그리고 다시 거주지를 에베소에 잡은 것으로 보인다. 여행이 어려웠던 그 시대에 그들의 수많은 여행은 지역교회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었다. 바울의 그들에 대한 말 너희가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16:3-4)라고 한 곳보다 더 높은 칭찬은 주어질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굴라에게 아무런 분개도 일어나게 하지 않았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예언을 했던 빌립의 딸들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는 주제였다(21:9). 그들에 대한 말은 매우 간단하며, 그들의 은사를 공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제시 할 아무 권위도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포박과 고난에 대한 말씀을 주셨을 때, 비록 바울이 그들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나, 이 여자들을 통하여 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적인 말씀을 전하도록 유대에서 아가보를 보내셨다. 이것은 이 은사 받은 여자들이 그들의 은사를 지역교회의 영역에서가 아니고 가정 영역 안에서 사용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 서신서에 나오는 여성들

로마서 16장에 26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에 8명이 여성들이다. 우리는 이미 유명 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중요함을 보았다. 마리아는 성도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했는데(16:6), 가정 영역에서였던 것 같다. 오늘날까지 많은 여성들에 의하여 매우 부지런하게 행하여진 많은 수고는 그리스도의 날에 많은 상을 받을 것이다.

유니아(16:7)의 성()에 대하여는 의견이 나누어진다. 이 이름은 목적격 형태로 사용되었는데, 유니아스(남성) 혹은 유니아(여성)에서 왔을 수 있다. 의견의 무게는 여성이었다는 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 그러면 문제가 있다. 그녀는 사도였는가? 사도들 중에 유명히(of note among the apostle; 사도에게 유명히<한글개역성경>)사도들에게 잘 알려진이란 의미와 그녀가 잘 알려진 사도라고도 의미할 수 있다(Ryrie). 후자의 의미로 판단하는 것은 좋은 해석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어디에서도 우리는 여자 사도를 발견할 수 없으며, 두 가지 의미를 가진 것을 가지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6:12)는 이교도의 이름이다. 그것을 나타낸 여인들은 은혜의 전리품이며, 주 안에서 수고했다. 이 이름 둘 다 황제 가문과 관련된 비석들에서 발견된다.

사랑하는 버시(16:12)는 그리스도의 주목할 만한 종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그녀의 많은 수고에 대하여 별도의 칭찬을 받았다.

루포의 어머니(16:13)는 바울로부터 내 어머니라고 불렸다. 이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취하여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여인이 이방인의 대사도로부터 어머니 같이 여김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인가! 뵈뵈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16:1-2). 그녀는 여자 집사로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종(일군)이었다. 보호자(succourer)라는 말은 더 낮은 사람의 옹호자인 높은 사람의 지위를 의미한다. 그러한 지위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었으나, 바울이 이 여자 집사를 그렇게 천거 할 때, 바울은 공적인 지위를 염두에 두었다는 암시는 없다. 바울이 그녀가 갖고 있던 지위를 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행한 봉사를 천거하는 것이다. 집사의 봉사는 실제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둘 다 가진 넓은 수고의 범위에까지 미치는데, 바울에 대한 뵈뵈의 봉사가 집사의 성격에 대한 좋은 단서인 것 같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과 함께 수고했다. 바울은 글레멘드와 그의 동역자들과 함께 그들에 대하여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4:2-3)라고 썼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한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이다.

이 부분을 끝맺기 전에 두 여성이 더 언급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의 훈련과 다듬음을 위한 특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는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딤후 1:5, 딤후 3:14-15). 어린 생명들에게 그러한 다듬는 영향을 가진 어머니와 할머니가 되는 것이 얼마나 영예로운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모든 일 가운데서 이보다 더 높게 평가 받을 봉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다른 일보다 못한 것으로 경멸한다. 경애하는 많은 여성들이, 이것을 읽으면서, 그들이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이 가장 큰 일에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른 모든 봉사에서와 마찬가지로 평가받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충성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2) 주님을 섬기는 여성들을 위한 안내

●그리스도인과 현시대와의 대조

급진적인 여성해방 운동을 지지하는 곳은 성경에는 한 줄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남성을 여성보다 낫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그들 사이에 차이를 두셨다(1:27). 각각은 그들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은 그 영역에서 뛰어난다. 예를 들면, 남자는 이 세상에 주님이 들어오시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 안에서 여자들에게 주신 많은 일들을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실제적인 종류의 정의(正義)를 믿는다.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은 올바른 원칙이며, 정의가 우리 땅에서 실현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남자는 그의 아내를 돕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해야 하며, 가능하면 가사를 행해야 한다. 이것은 남자의 존엄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며,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남녀평등권 수정안 지지자들이 여성들의 낮아진 지위에 대하여 성경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역할을 보이지 않는 책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가운데 있다. 이 학교 교과서에, 특별한 역할 모델이 없는 가운데, 어머니는 일하러 나가고, 아버지는 집에 머물러 가사를 돌보기 위하여 남으며, 혹은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참된 역할 모델의 부재는 어린이의 성장에 영구적으로 해로울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남편보다 지적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으며, 아마 더 심한 경쟁적인 사업계에서도 더 잘할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한 성()이 다른 성()에 대하여 지적이지 않다거나 우등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경륜이다.

성경에 반대하는 성차별 책임이 너무 지나쳐서 전미교회회의(National Council of Churches)는 성경 원문을 시험적으로 출판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그(혹은 그녀)와 아버지(혹은 어머니)라 불렀다 마음에 생각난 말씀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관영(貫盈)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6:5-7)리라고 하신 것이다.

바울은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니라(2:4-5)라고 썼다.

 

●순종의 은혜

성경의 가르침은 여성들을 대단히 높은 수준으로 높인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5:25) 가정에서 사랑이 이와 같이 지배한다면, 아내가 그녀의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5:24). 순종은 열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은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열등하다는 모독적인 암시를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세계에 있는 우리들이 아는 여성들은, 여자들은 가정에서 그 남편에게 순종해야 되며, 혹은 여자는 지역교회에서 순종하는 자리를 취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믿으며, 그 가르침에 겸손하게 순복한다. 교정하기 위하여 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교회의 실행을 실천하기 위하여 쓸 필요가 있다.

 

● 지역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침묵

신약성경에서 세 곳은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1:3-5, 14:34-35그리고 디모데전서 2:8-15이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고전 11:5)에서 한 문제를 발견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여자들이 기도에 목소리를 내어 참여하고 예언을 할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바울의 금지를 회피하기 위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 바울이 교회에서 정상적인 참여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집회(모임)에서 여자들이 잡담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 개인적인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해석에 반대되는 첫 번째 증거는 다음 구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35)를 읽는 것이다. 아내는 그 남편에게 잡담의 내용에 대하여 묻는 것일까? 잡담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리고 어리석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아내가 남편에게 묻는 것이며, 혹은 아내가 정보를 요청하는 것일까?

고린도전서 14:35말한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사실 그것은 바로 14장에서 24번 사용되었다. 여기뿐 아니라,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그것이 잡담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바울이 이 서신의 11장과 14장 사이에서 마음을 바꾸었거나, 바울이 교회에서 여자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했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고 그것을 철회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생각들과 영감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관점은 이것은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곳에서 기도하고 예언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고린도전서 11:16 말씀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는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지역교회가 모일 때가 아니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려다보고 있는 천사들(고전 11:10)은 집회(모임)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인 바울에게는 남자들이 집회(모임)에 있을 때 여자가 여자의 순종을 나타내는 장소라는 것으로 보인 것이 된다. 이 해석은 여자가 공적인 기도에서 인도할 수 있거나 공적으로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만약 그것이 교회집회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이것은 어떠한 종류의 모임일 수 있는가? 모든 공적인 증거는 지역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여자는 기도하거나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늘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고, 남자는 같은 이유로 결코 머리에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이 설명이 유능하다는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지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1:5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길은, 여기서는 바울이 머리에 쓰는 것을 다루고 있고 그에 반하여 14장에서 바울은 자매들의 침묵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서신서 안에 고쳐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의 순서에 따라 각각 다룬다. 고린도에 있는 혼란은 자매들이 기도와 이상한 발언을 하는데, 드러내어 참여하고 있었다고 믿는 우리들의 생각에 전혀 왜곡됨이 없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들이 방언에 동참했음은 틀림이 없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4,6,9,11 그리고 14절에서 귀중한 시간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 14.34-35에 나오는 금지는, 우리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분명하며 이해가 쉽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 여자는 동일하게 중요한 다른 활동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남녀에 대한 영적인 특권은 같다(3:28). 그러나 영적인 활동은 같지 않다.

디모데서에 나오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구절에 대하여 주어진 해석을 매우 견고하게 한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상응하는 말씀은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 2:9-10)이다. 바울은 공적인 기도에서 소리 내어 참여하는 것을 남자로 한정한다. 디모데전서 2장과 3장을 주의깊게 읽으면 공적인 기도는 교회 기도임을 알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두 가지에서 교회 서신임을 안다. 첫째는 편지의 일반적인 내용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씌어진 디모데전서 3:15의 명백한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 2:12)라고 말한다. 이 분명한 말씀은 어떠한 설명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문맥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여기서 마음에 둘 것은 여자들의 관계가 믿는 남자(형제)에 대한 것이지, 어린이나 다른 여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들은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데는 남자보다 더 적당하며 주일학교 소녀와 젊은 여자를 가르치는 데 더 잘 준비될 수 있을 것이다.

디도서 2:3~5에서 늙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도록 권면 받는다. 가르침 받는 주제들은 가정적인 것이며, 모든 가르침에서처럼, 말씀을 하기 전에, 모본(모범)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가 여자들을 위하여 말씀집회를 갖도록 하는 권위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다른 여자로 말미암아 가장 잘 주어지는 주제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가르칠 책임을 여자에게 주는 것이다.

이 긴 주제에 대한 간단한 요약이 필요하다. 여자들은 시간(역사)의 시초부터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도구로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택함 받았다.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성육신(成肉身)이 일어났을 때, 한 여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경건한 여성들의 헌신된 봉사로 가득 차 있다. 주 예수님은 여성들을 치료하셨고, 가르치셨고 그리고 축복하셨다. 주님은 여인들의 섬김을 받으셨고, 여인들은 주님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서 뛰어났다. 신약성경은 경건하고 사심 없는 하나님의 여인들의 섬김으로 넘친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인 전도나 가르침이라는 영역에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의 일터에서 그리고 국내외의 않은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그 다른 영역에서 동역자가 되는 것을 포함한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