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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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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지역교회의 징계( I )

 

이 책의 18-20장에서 다루는 엄숙한 주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바울은 징계에 대하여 고린도 사람들에게 쓰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했다. 고린도후서 7:2-13의 말은 그들 가운데 있는 범죄를 바로잡는 것을 쓰도록 눌림을 받았을 때 바울의 마음의 고통이 마음에 와 닿게 기술된다. 이 주제는 고통스럽고 싫으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들이 성경을 살펴보는 가운데, 사람들의 실패에 있어서 지역교회가 최초로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보았다( 18:15-20). 우리는, 비록 이것이 가장 엄숙하고 비참하지만, 또한 격려이기도 한 것을 제시했었다. 집회(모임)를 위한 바른 질서와 합당한 지역교회의 기능은 아무튼 인간적인 죄와 실패 없는 증거(간증)를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지역교회를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러한 증거(간증)가 존재할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은 그 손댐으로 못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수세기에 걸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불완전한 도구를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에 격려가 된다. 인간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증거(간증)가 유지되어 왔다.

지역교회의 징계에 대하여 가르칠 때, 보통은 출교를 요구할 정도로 심하지 않은 내부의 징계로부터 시작해서 지역교회로부터 쫓아내는 것을 요구하는 심각한 죄로 점점 옮겨간다. 우리가 이러한 순서를 택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도덕적이고 교리적인 죄에 대한 징계가 내부 징계의 형태보다 더 심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른 종류의 징계들이며, 각각은 서로간에 연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유일한 관련은 죄는 늘 처리되지 않으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형태의 죄와 관련된 도덕적인 원칙이며, 지혜로운 왕 솔로몬에 의하며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8:11)라고 표현되었다. 악에 대한 모든 심판은 악을 움츠러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지역교회의 징계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지역교회의 교제로부터 죄지은 사람의 출교를 요구하는 죄를 먼저 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인지 거의 실행하지 않는 다른 형태의 징계를 볼 것이다.

 

1) 교리적인 죄에 대한 징계

디모데전서 1:18-20에 이름이 나오는 두 사람은, 비록 이것이 심각한 죄이긴 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문책 받는 훼방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라는 말씀을 통하여 보여질 수 있는 것처럼, 교리적인 죄악이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다. 그들의 죄가 교리적인 잘못이었다는 더 많은 증거는 디모데전서 1:3-7에 있다. 거기에는 거짓 교사들이 드러나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라는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

훼방은 하나님께 말하는 욕이다. 이 사람들은 주 예수님과 이 서신서에서 믿음, 명령, 진리, 맡김, 의무라 불리는 복음의 교리들을 욕되게 하는 훼방(모독)을 한 데 대한 죄가 있었다. 이 매우 귀한 진리의 직분은 바울에게 맡겨진 것이었으며, 후에 디모데에게 행하고, 지키고 그리고 전파하라고 맡겨진 것들이다(딤전 1:11. 딤후 1:14). 바울은 이 맡김에 가장 부적합한 자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 종교적인 소경인 가운데 훼방자였기 때문이다(딤전 1:13).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한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의 주장에 대하여 훼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훼방의 죄를 이해하는 가운데 이 문맥을 보는 것이 올바르다. 물론 이 말의 의미는 이 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6:1, 디도서 2:5, 베드로후서 2:2,2:12에서도 쓰인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단에게 넘겨졌는데, 이 표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유일한 안내는 고린도전서 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이다. 이 구절들은 적어도 지역교회의 교제에서 죄지은 사람을 제거하는 것을 포함한다. 믿음에 파선하는 것과 믿음을 훼방하는 것에 해당되는 죄는 애매한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복음 진리의 위대한 교리(원리)에 관계되는 악한 가르침으로 기술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2:18에서 빌레도라 불리는 사람과 연관된 후메내오라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 대하여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잘못은 장래 부활과 관련되었으며,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잘못에 대한 그러한 기술은 장로 형제들이 악한 교리에 대하여 고려할 때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그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견지하고 있는 한, 성경의 특별한 부분을 잘못 해석하는 것으로 그 사람을 쫓아내서는 결코 안된다. 그러나, 거기에 믿음에 대한 부인(否認)이 있을 때는 출교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러한 교리적인 잘못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5:9)에 대하여 썼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1:20 말씀으로, 사단에게 내어준 두 사람은 회복이 전혀 안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징계는 그들이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잘못에 빠진 사람들을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아니한가? 디모데에게 쓴 바울의 말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 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4-25)는 잘못된 사람들의 회복을 구하는 축복된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들을 가르칠 것이다.

 

2) (잘못) 고백하기를 거부함에 대한 징계

디모데전서 1장에 있는 모든 것을 동의하며 따르는 사람일지라도 마태복음 18:15-20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과 같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구절에 대하여 해석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마태복음 18:17-18이 출교를 가르친다는 것이 나의 이해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사람들을 제거하려는 보복적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비난한다. 지도자라 일컫는 사람들이 그렇게 심한 타락에 빠질 가능성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든간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문맥 가운데서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 범죄가 어떤 사람에 의하여 그 형제에게 저질러졌다(15). 이 문제에 대한 완전한 답은 이 한 절 안에 주님에 의하여 주어졌다. 죄 범함을 당한 사람은 죄지은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문제를 미리 말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면전에서 그 사람의 잘못을 말한다. 만약 고백이 이루어지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작은 겸손이 큰 문제를 해결한다. 이 회복은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의 회복과 연관된다(12-14).

만일 듣지 않거든(16)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되, 이 문제를 아는, 전체로 해서 두세 사람이 간다. 주님은 명백한 이유로 지역교회의 두세 장로들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장로로 알려진 사람들은 유대인 장로들뿐이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상에 육체로 계시지 아니하시고, 각 지역교회에 인정된 장로들과 함께 지역교회가 이루어질 시대를 위한 진리이다. 그러나 그 자신과 지역교회가 신뢰하는 사람들 즉 장로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만약 독자가 이 점에서 장로들이라고 인정하기가 어렵다면, 17절로 가면 그렇게 해야 될 필요가 생길 것이다. 합당하고 성경적인 장로의 역할 없이는 지역교회에서 그런 문제를 다루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세 증인이 죄를 고백하게 하는 데 실패한다. 주님께서 미리 15절에서 그 사람은 그 형제에 대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을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해두자. 장로들은 종종 주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신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양쪽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본 다음에 아무 죄도 범하지 않았든가 아니면 양쪽이 다 죄를 범했다는 확신을 가질지도 모른다. 현명한 사람은 거기에 어떤 죄가 있을 때 매우 주의 깊게 조치를 취할 것이다. 우리는 이 경우를 그러한 추가된 문제들로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사람은 죄가 있고 두세 증인의 면전에서 죄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이제 이 문제를 지역교회 앞에 들고 나온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모든 장로들과 모든 성도들을 의미 한다( 1:1). 17절 말씀의 올바른 읽기는 교회의 말조차도 듣지 않거든이다. 흠정역(KJV)듣지 않거든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parakouo를 그다지 엄하지 않게 듣기를 게을리하다(neglect to hear)로 번역하여 엄숙함을 감소시키고 있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문자 그대로 고의적으로 귀를 막는 것이다. 교회의 말을 듣기를 거절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죄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만약 그 사람이 옳고 교회가 잘못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이런 종류의 변론은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잘못했고 교회가 옳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가 잘못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문맥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결정을 교회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내리기 때문이다. 즉 그 결정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온 것이며, 전혀 이 땅의 입법권이 아니고, 이 문제에 대하여 하늘이 이미 결정한 것을 그냥 실행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l8). 우리는 분명한 구절의 분명한 의미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가정적인 문제들을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 무고한 사람을 잘못 다루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공정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아신다. 히브리서 10:30-31은 이 문맥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10:30)는 시편 50:4에서 인용한 것이며, 우리들에게 아주 친숙한 말씀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시편 50:5)가 뒤따르는 것을 생각할 때 그 관련성을 알 수 있다.

물론 마태복음 18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갖는 진짜 문제는 주 예수님께서 17절에서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너는(단수): 한글개역성경에는 없음)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단수 인칭 대명사는, 죄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죄지은 사람에 대하여 지역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 같이 대하나, 다른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대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왔다. 실제적인 면에서, 이 해석은 늘 나에게는 죄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한 심판으로 보였다. 그는 죄 범한 자에 대하여 판단을 하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교회 말 듣기를 거절한 죄를 지은 사람과 교제하는 모든 활동으로부터 죄의 피해자(무고한 사람)를 제외시키게 된다. 내가 여기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빠뜨리지 않았다면, 이것은 죄의 피해를 당한 자(죄 없는 자)가 지역교회의 교제 안에 더 이상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17절 마지막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너희(복수)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라고 하셨다. 문자 그대로 너희 즉 지역교회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다. 어떤 다른 문제와 관련지어서 매고 푸는 것을 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분명한 의미는, 그가 지역교회의 말을 들으며 그의 잘못을 고백할 때까지, 지역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범죄자를 쫓아내며, 지역교회가 그 사람에 대하여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교회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 대하여 지역교회 안에서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할 따름이다.

이 부분 바로 앞에 나오는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와는 매우 다르다. 여기(마태복음 18)에는 잃은(lost) 양이 아니고 뛰쳐나간(gone astray) 양이다. 만일 찾으면( 18:13)은 목자의 찾는 수고가 헛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죄를 범한 사람( 8:15)은 뛰쳐나간 양이며, 두세 사람은 뛰쳐나간 양을 찾는 목자들이다. 이 비유를 마음에 두는 것은 이 구절 전체에 빛을 비취게 한다. 두세 사람은 뛰쳐나간 사람의 회복을 구하며, 그들의 간절함과 기도의 제목(주제)이 되게 한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