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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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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가르치신 기도 (2)

키타무라 타다시

 

지난 시간에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전반부분을 보았습니다. 크게 나누면 하나님에 관한 기도와 우리들에 관한 기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오전 시간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였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사람들에 대한 즉 우리들에 대한 기도에 대해 교제하겠습니다. 그 순서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기도였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에 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이 질문을 받았을 때에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순서에도 하나님에 관한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여러 일들이 발생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고가 주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뒤로 하고 인간적인 것을 먼저 하는 순서를 바꿀 때에 그러합니다. 여러가지 예가 있습니다만 순서가 달라지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예수님 앞에 마리아와 마르다 둘 다 발 앞에서 말씀을 들었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기 위한 봉사를 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계속해서 예수님 발 앞에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처음에는 앉아 있었지만 예수님께 대접을 하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일을 준비하는 중에 마리아가 여전히 예수님 발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거들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불평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여러가지로 생각하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들으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먼저가 되어버렸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무슨 일을 해서 예수님께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과 예수님 그 자신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양쪽 다 놀라운 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이것을 잊어버리고 내 생각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고 생각이 우선되게 된다면 초조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을 가지면 그것을 함으로 자기가 만족하고 싶은 생각이 거기에 깃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어성경을 이용해서 "하는 믿음" "있는 믿음"이라는 말로 해석해 내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게 되면 믿음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둔다는 것, 즉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존재하게 한다는 것 자체 하고의 구별을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믿음과 무언가를 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나는 만족되었다는 믿음은 그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을 우선시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믿음이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데 거기에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나옵니다. 이 세 사람 모두가 예수님을 기뻐해서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를 생각할 때 주의할 점 하나는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데 받은 것 자체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면 받은 것이 없어지면 감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부분도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은사보다도 병 낫는 것보다도 주시는 분 주님 자신이 더 좋아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받은 선물도 놀랍지만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 놀랍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 형제님이 만찬에 관한 교제를 하셨습니다만 우리들은 만찬 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각가지 은혜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못박히신 예수님 그 자체가 더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높디 높은 신분을 가지셨으면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자체가 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찬송하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최우선으로 삼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머지 세 가지로 가겠습니다.

마태복음 6:11-13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도 세 기도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 죄를 사하는 것, 시험에 드는 것과 악으로부터 구함입니다. 사람에 대한 것으로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라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고 있는데 사는데 필요한 전부 다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을 하여 돈을 벌어 필요한 것을 산다고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내가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는 음식, 그리고 입는 옷, 이것은 사람이 어느 정도 힘을 쓰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햇빛이라던가 물이라던가, 공기라든가 이것은 절대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기술을 통해서도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잘 압니다.

입는 의복은 제쳐놓고 육체를 위해서 먹는 양식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보면 만나가 나옵니다.

16:16-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여기는 각기 식량대로 거두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적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결과를 보니까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았으며,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보면 많이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격이 큰 사람은 많이 먹을 것입니다. 위가 작은 사람은 적게 먹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이 제공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매일 거두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매일매일 하나님께 의존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과 같은 육체를 가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배가 고픈지 어떻게 목이 마른지 어떻게 피곤한지를 몸을 가지고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예수님이 피곤해서 배의 고물에서 주무신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금식하신 때는 "주리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는 목마른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그럴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것을 직접 경험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필요 또한 아셨습니다.

마가복음 8:1-3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9절에서는 사람이 약 4천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때는 떡이 일곱 개와 생선이 조금이었습니다. 다른 기적도 아실 것이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던 앞에 기적과 다른 것은 사람의 숫자가 다릅니다. 떡의 개수와 생선의 수가 다릅니다. 앞에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기적이었습니다. 여기는 유대인보다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목마름과 주림을 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불쌍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흘이나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흘이나 주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기 싫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 앞에 나오면 놀라운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흘이나 예수님 앞에 있었지만 질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 말씀을 이틀만 들으면 질릴 것입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3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도 주님은 아셨습니다. 또한 사흘이나 되었으면서도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을 알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기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4천명 되는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배가 고픈지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놀라운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도저히 여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사람들의 육체의 필요를 아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적인 필요 뿐이겠습니까? 매일 생활에 필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필요인 말씀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단에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갖고 계셨지만 육체의 필요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영적인 필요라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굶주림을 말씀에 대한 굶주림, 스포츠에 대한 굶주림... 등등으로 말들을 합니다. 한국은 어떠합니까? 오늘날은 어떤 면에서는 살기 좋은 형편이 되었다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식욕이 있습니까? 식욕 중에 두 가지 식욕이 있는데 몸에 대한 식욕과 영적인 식욕이 있습니까? 육체를 위한 점심을 먹었습니다만 영적인 양식을 어떤 양식을 드셨습니까?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육체에 관한 식욕도 생기지 않습니다. 육체의 식욕을 위한 운동이 있지만 영적인 식욕을 위한 운동도 있습니다. 저 같은 나이쯤 되어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아랫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얼른 보기에는 배가 나와서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많이 먹어 알고만 있으면서 아랫배가 나와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전혀 먹지 않아서 웅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를 제공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제공해주십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만큼 하나님께 받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만찬집회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조금 전에 말씀이 있었습니다만 만찬 때에 주님 자신과 십자가를 통해서 양육이 되는 것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기도는 "우리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6장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이지 "나에게"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양식을 위해서도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자매들이 말씀을 통해서 양육을 받고 성장하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죄에 관한 것으로 "우리 죄(-일어 성경)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우선은 자기의 죄를 사해달라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들은 죄가 있는 사람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들은 죄를 용서받기 이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 용서는 우리의 신분에 관한 것이지 우리의 상태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국적은 하늘입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땅에 있습니다. 신분으로는 죄 용서 받은 것이지만 상태로서는 죄로부터 완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죄의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죄로부터 오는 심판에서는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의 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머지않아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때가 오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되었을 때 모든 사람에게 그 상태가 올 것입니다.

 

마태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은 어떤 형제와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 하다가 형제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는 예물을 드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는 남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화목이지만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그것을 해결하고 나서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길도 분명히 예비해두셨습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십니다.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악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부터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우리의 양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지 얼마 안되어서는 자주 우리 양심이 책망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구원 받았는가 하는 때도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들의 마음을 계속 찌르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한 것이 구원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믿음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아 이것이 나쁜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죄에 관한 인식이 커서 하나님 앞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지 얼마 안된 분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죄를 자백하면 용서를 받게 되는데 죄의 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다시는 죄를 반복해서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사단이 그 죄를 지목해서 책망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대언자로 계셔서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과거의 죄,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죄를 사했다고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되지만 혹시 죄를 범하더라도 이와 같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게 된다면 죄를 범하지 않아야 되겠구나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도 나옵니다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죄 있는 사람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 사람의 죄를 진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죄는 고백할 때 완전히 사해졌습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불의한 청지기가 두 사람이 있는데 24절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왕한테 회계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일본 엔화로 계산해 보니까 6천억엔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변제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우리들의 죄는 이러한 것입니다. 25절에는 그 몸과 처와 자식들을 다 팔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 금액이 될 수 없어서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 몸과 처와 자식들을 팔기 때문에 그 자신과 처가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제가 연 수입이 1천만엔이라고 한다면 제가 10년 동안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합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집도 팔고 처도 팔고 자식들도 팝니다. 제 아내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팔아도 돈이 얼마 안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유익하다고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27절에 보면 이 종을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이 주님 앞에 100년이 되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28절에 보면 100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종을 붙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갚겠다고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네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종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이런 일을 해버립니다. 특히 믿음을 갖기 전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 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서로간에 잘못은 거기에 비하면 작은 것이 불과합니다. 용서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도록 주님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시험에 들지 말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입니다. 우리들은 종종 시험에 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는 욥처럼 여러 시험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만 바울이 가지고 있는 가시를 통해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약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통해서 자기가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으며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고자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죽는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신 다음에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높아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는데까지 가겠다고 말을 해버렸습니다. 자기는 그럴 힘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베드로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이미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시험을 당할 때에도 이러한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있을 뿐 아니라 악의 힘으로부터 건지시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태복음의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보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 17장에는 주님이 직접 하신 기도가 있습니다. 그 기도에는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라"(15)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그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달라고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우리 사람들에 대한 기도를 보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셨지만 문자 그대로 반복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파 사람들은 매주마다 똑같은 문구로 되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매일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나타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똑 같은 문구로 매일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기도를 했다고 하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이 기도의 가르침에 목적 그대로 행하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가르치신 그대로 이 땅에서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옵고, 나라가 입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이 기도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기도 세 가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 중에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실제로 여러 사람들의 죄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선언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지금 현재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2016. 10.1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