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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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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5. 10:36 여성들에게

여자의 너울과 하나님의 영광

  3. 너울

, 이제부터는 고린도전서 11:1-16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권면을 받아왔다. 따라서 예배나 기도를 위해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에게 준 숙제이다.

배경은, 주의 만찬으로 주께 경배드리고 기념하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모임이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천사들이 믿는 자들이 드리는 예배의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무질서하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기도하고 말하며 머리를 덮지않은 반면에, 몇 사람의 남자들은 기도하고 말하는 중에도 머리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바울 시대의 관습들에 대하여 주목해 보자. 유대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기도할 때에 모두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였다. 로마의 남자들과 여자들도 또한 머리에 썼다. 헬라인 남자들과 여자들은 아마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만큼, 머리에 쓰지않고 기도하고 제사를 드렸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구원받은 유대인과 로마인, 그리고 헬라인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직면하였던 상황을 설명해준다. 바울은 여기에서 타락한 남자들과 여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왜 그 시대의 관습을 뛰어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교회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는 교회가 생겨난지 이미 30년이 지난 때였다. 그는 다만 그 당시의 교회에 이미 익숙한 한 규례를 글로 써서 재차 반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각지의 모임들 가운데에서 단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규례를 상기시키고 있다. 고린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위규범을 무시하고 그릇 행하였던 것처럼, 이 규례를 또한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과 로마인 그리고 헬라인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였기 때문에 그 규례를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그 문제를 택하여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천사들 앞에서 어떻게 질서있게 예배드리고 찬양해야 할지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잠시 멈추고, 사람들이 본문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자. 아마 바울이 그의 노력을 다해 여자들에게 머리에 쓰도록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남자들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남자들은 그 명령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 단락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바울이 여자들만을 택하여 너울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바울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 모두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주님으로부터 온 그 쌍을 이룬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남자는 그의 머리에 써서는 안되고 여자는 반드시 머리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제시한 두가지 문제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1. 왜 너울을 써야 하는가?

2. 왜 여자는 머리에 쓰고 남자들은 쓰지 않는가?

(1) 너울을 쓰는 규례의 중요성

그러면 그 사도가 어떻게 설명과 논리를 전개하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로 다음을 보자.

1) 너울의 근거 - 주님

사도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이 서신서의 가르침에 대하여 나옴직한 모든 반대 의견들을 예견하고, 다른 서신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 짧은 어구를 그의 인사말 안에 적어넣었다.

진실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원의 주님께서는 우리 20세기의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이(Laodicean sprit) 믿는 자들까지도 고린도전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특별히 너울의 문제에 있어서 의심하도록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엄청난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짧은 구절이 고린도전서 1 2절의 사도의 인사말 안에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 짧은 문구 하나만으로도 이 서신서의 가르침에 대한 즉각적이고 자발적이며 겸손한 순종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것은 거의 2000년 동안 이루어졌으나 자유신학이 신앙을 고백한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자, 진정한 교회의 성도들까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로마서는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씌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그 가르침이 시대를 초월하여 각 처에 흩어져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구속력이 있으며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인다.

고린도후서는 아가야에 있는 모임에 쓴 것이고,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쓴 것으로 바울의 다른 서신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서신서들 안에 어떤 내용이 있든지 그것이 모든 시대의 모든 모임들에 관련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실 그 안에 그런 지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특별히 각처에서라고 주목할 만한 어구를 사용했지만 그 반응은 의심과 불신, 그리고 거부였다. - , 고린도전서가 모든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요, 바울이 단지 고린도 교회만을 교훈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쓴 것 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대이다. 사람들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서신서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각 처에서라는 특별한 언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서신서가 전 교회시대를 거치면서 각 처의 모든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 의해 읽혀지고, 그 말씀을 따라 행동하였고, 순종하며 그대로 따라 실행되었다는 사실보다 이 서신서가 고린도 성도들에게만 제한되거나 한정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은 없다. 아무도 제외되거나 면제되지 않았다. 시간은 이 서신서에 담겨있는 진리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교회 시대 동안 모든 교회는 그 서신서의 영감있는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였고, 그것을 쓰게 하신 주님은 그분의 가르침에 주의하지 않는 것에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 말씀의 적용의 보편성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의심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거부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 전 교회역사 시대의 모든 믿는 자들이 고린도전서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그의 서신의 말미에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고 단호하고 명백하게 덧붙여 언급하고 있다.

애찬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안에서의 은사의 활용에 대한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의 너울에 대한 것과 14장의 남자와 여자의 다른 역할에 대한 가르침도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누가 감히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 중에 누가 감히 그것에 반대하거나 저항하거나 이를 업신여기거나 부정할 것인가? 누가 감히 그것에 불순종할 것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 명령들을 내리신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 바로 그분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3:12-15, 고후 5:10, 14:10). 내가 오랫동안 이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의심하고 불신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온 몸이 떨려온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이끌어준 형제에게 매우 감사하다.

11장에서 14장에 걸쳐서 바울은 너울 문제와 교회 회중의 다른 측면들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서두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1:1)고 말하며, 그의 가르침을 시작한다.

많은 주해학자들은 이 절을, 뒤따라오는 절들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지않고, 그 이전의 단락에 이어진 절로 본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주제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Now라는 영어 부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절의 Now로 옮겨진 헬라 접속사는, 3절의 But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Arndt Gingrich는 연결을 위한 간단한 접속사가 요구될 때, 그 말은 and로도 번역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접속사는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nowbutand로 다양하게 옮겨질 수 있다.

따라서 2절에서 Now대신 And로 옮긴다면 우리는 1절의 바울의 언급 이면에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씀은 앞의 부분 즉 1:1-10:33의 말씀과 뒷부분의 11:2-16장까지 말씀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나뉘어진 양쪽에 모두 해당하는 말씀이며 사도 바울의 권위의 근원을 나타내고 있다.

본받는다는 단어는 다른 사람이 행하는 것을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이며,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 그의 가르침과 행한 것을 따르라는 말이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권위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고자 하였다. 그는 그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우리가 이에서 알 수 있다. - 사도란 최고의 모범이시며 궁극적인 권위요, 아멘(3:14)이신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열 두 서신서를 쓰도록 지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가 고린도전서라고 알고 있는 서신서를 쓰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그 말씀에 따랐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너울에 관한 말씀을 쓰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또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기록, 즉 모든 성경의 권위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주이시며 주님으로서, 그의 구속하신 교회에 행하도록 말씀하시고 그분의 명령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을 기대하실 만한 권리를 지니신 궁극적인 권세자이시다.

만일 바울의 권위가 그 자신이 스스로 세운 권위라면, 우리는 그것에 조금도 주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사도적 권위가 여전히 성도들에게 구속력이 있지만). 그러나 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며, 주님의 최고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울에 관한 교훈이 얼마나 절대적이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무시하거나 불순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2) 주님으로부터 계시와 영감

바울은 너울을 쓰는 규례에 대한 이유를 아직 다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계시와 영감에 대한 문제를 꺼낸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2).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분의 최고의 권위로 명하셨을 뿐 아니라 특별히 바울에게 그것을 나타내시고 그것을 바울에게 위임하셔서 모든 신자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 다른 사도들이 주님에게서 직접 교훈을 받았던 것처럼.

바울이 상세히 설명하고자 하였던 교리들과 규례들은 그가 받은 것들이며, 여러 해 동안 그가 가르치고 설명해왔던 것이다.

그는 이 가르침들을 어떻게 받았는가?

그는 여러 곳에서 나타내신 그리고 계시, 알게하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 1:12,16, 2:2, 고후 12:7, 3:3,5, 1:26,27.

고린도전서와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이 쓴 세 개의 특별한 단어들을 더 살펴보자.

1. 유전 - 고전 11:2, 살후 2:15, 3:16

2. 받은 - 고전 11:23, 15:3, 1:12

3. 전한 - 고전 11:23, 15:5, 3

유전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paradosis) 전하여지거나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법령(고전11:2)으로도 또한 옮길 수 있다. 그것은 전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paradidomi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그 전달하게 한 주체는 사람이거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장로들의 유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사람들의 유전을 유대인들은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 그분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이 가르침들을 교회에 전달하였다.

그는 그 보다 앞선 다른 사도나 그 누구에게서 교훈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그 교훈들을 받았다. 이 경우에 사용된 받다의 헬라어는 paralambano이다. 그것은 다른 이로부터 받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다. 너울에 관한 것뿐 아니라 주의 만찬(고전 11:23)과 부활에 관한 진리(고전 15:3)에 관하여 또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충성스러운 사도로서 그는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전해주신(paradosis from paradidomi = tradition) 가르침과 교훈들을 전달하고 전하였다(paradidomi).

이로 인해 1장에서부터 15장에 걸친 내용들은 모두 계시로 바울이 주 예수님께 받은 것이며, 성령님의 감동하심 아래 우리를 교훈하시기 위해 쓰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교리 - 즉 주님의 권위, 그분의 명령, 계시 그리고 성령의 영감 -가 이 너울을 쓰는 의식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3) 머리됨의 인식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3).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는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문제를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그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다음이 두 번째로 복종의 문제이다.

 

A. 머리됨과 구원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참된 그리스도인 -거듭난 신자- 이 아닌 사람이 과연 주 예수님을 머리 - 즉 만물의 머리, 교회의 머리, 가정의 머리, 남자의 머리-로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없다. 불신자에게는 결코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주님과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주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그를 머리로서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용서와 평안을 깨달은 사람,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오직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분이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울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암시적으로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반드시 그 가르침을 요구하며 갖고 있는 것이다! 구속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기쁨으로 그 분의 머리되심을 인정한다. 따라서 너울과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정녕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의식에 관한 주님의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된다. 그렇게 하므로 그가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이며, 주님께 속하였고, 교회의 머리요 남자의 머리로 주님을 높임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너울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너울을 쓰지 않는 사람은 주 예수님을 머리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구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비록 주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할지 모르지만 머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이다!

너울에 관한 말씀을 따르지 않는 형제나 자매는 위험하게도 이런 상황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면, 너울의 규례를 따르는 형제나 자매는 (남자는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는 머리에 쓰는 것) 그분의 권위, 계시, 영감과 구속 사역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위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세상의 사상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때, 특히 오늘날의 사회에서 너울의 규례는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며, 또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B. 머리됨과 복종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비록 세 분의 인격이 본질이 같고 모두 동등하시지만, 질서유지를 위해 머리됨과 복종의 체계가 있어야만 하셨다. 이에 세 분의 인격이 모두 본체가 같고 동등하며 영존하시지만 아버지는 아들 위에 계시고 아들은 성령 위에 계신다.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고 (믿는 자 안에 내재하는) 성령은 아들에게 복종하신다.

우리 주 예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 예수님은 사람의 머리가 되신다. 사람은 주 예수님께 복종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이를 창조질서라고 부르는데 그 안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따라서 남자 뒤에 창조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a) 남자여자- 어원 상의 고찰

복종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에 앞서 남자여자라는 단어를 살펴보도록 하자. 헬라어 aner여자와 구별되는 남자, 또는 아내와 구별되는 남편의 의미가 있다. gune여자또는 아내를 의미한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그 단어들을 서로 달리 번역하기도 하며, 같은 성경에서도 다르게 옮겨놓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번역성경에서는 그 단어들을 남편 또는 아내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 아내된 자들만이 머리에 쓰고 남편된 사람들은 머리에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암시가 있다. 그러나 너울의 목적을 살펴볼 때 그것이 아니라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들이 바울의 권고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aner gune의 좀 더 정확한 번역은 남편아내가 아니라 모든 부분에 걸쳐 남자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b) 종속에 관한 의문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고 그 다음으로 하와가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질서상 남자는 여자보다 먼저이고, 여자 위에 위치한다. 그리고 이 경우, 여자는 남자 뒤에 있어 남자보다는 하위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세상의 군대조직과는 달리,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우선 순위와 별개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

i. 하위는 열등함과 다르다.

본문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가리킬 만한 구절이 전혀 없다. -해부학적, 생리적, 정신적, 지적, 사회적, 도덕적, 영적인 면에서. 비교를 유도하는 근거가 전혀 없다. 둘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다른 한 쪽이 없다면 불완전할 뿐 아니다 이 둘은 상호의존적이다. 한 사람이 부족한 것을 다른 한 쪽이 공급한다. 비록 창조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우선적인 위치와 권위를 갖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남자라고 하여 본성적인 우월을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남자를, 앞장서서 일반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로 만드셨다.

따라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은 여자가 열등하다거나 종이나 노예, 종속물과 같이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께 복종하나 그분과 동등할뿐더러, 신성에 있어 하나님으로서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것처럼,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나 그와 동등하며 인간으로서 같은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복종은 열등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ii. 하위가 복종은 아니다.

하위와 복종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창조 때문이며 가정에 있어서는 가정의 질서를 위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곳에는 하나의 머리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의 남편에게도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비록 창조질서 상으로 남자보다 하위에 있으나, 다른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버지 외의 다른 기혼 또는 미혼의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으로서의 관계에 있어서는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 정하여져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한다 할지라도 미혼여자로 하여금 가족의 테두리 밖에 있는 다른 남자에게 복종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하위란 단지 창조의 확정된 불변의 사실로서 여자가 남자보다 나중에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종은 오직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아내가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하는 것이며, 이때 남편은 그의 아내를 지배할 것을 주장하거나, 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호간의 순종이 있어야 한다(5:21-33, 3:18,19, 벧전 3:1,5,6).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 또는 순종해야 한다는 가정 질서의 문제를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하위에 있다는 창조의 질서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중요한 문제이다.

권위, 계시, 영감, 순종, 머리됨, 하위의 원리들을 세워온 바울은 계속하여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너울의 규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2) 하나님의 영광

(남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들은 머리에 쓰는 이유들)

바울은 이제 다음 질문에 답변한다. - 왜 남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고 여자들은 써야만 하는가?

 

1) 남자의 쓰지않은 머리가 상징하는 것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4)

여기에서 머리에 쓰는 것이란 단어를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4절의 이 부분은 헬라어로 kata kephales echon 인데 이것의 문자적으로 머리 위를 덮어 씌우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덮는 것이 있음을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너울과 관계된 모든 절에서 명사 베일(veil)은 사용되지 않고 분사나 다른 말을 쓰고 있다.

현재 수동형 분사

Akatakalupto = 벗고(uncovered 5)

Akatakalupton = 쓰지 않고(uncovered 13) 현재 수동태

Katakaluptetai = 쓰지(않거든) (is covered 6) 현재 명령형 수동태

Katakaluptetho = 쓸지니라 (let (her) be covered 6) 현재 수동형 부정사

katakaluptesthai = 쓰지 (말아야) (to be covered 7)

15절에서만 너울(veil)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용어이다. – 이 구절에서 사용된 것은 peribolaiou 와는 다른 구인 (veil 대신) peribolaion이다. 여기에서 는 덮는 것으로 주신 여자의 긴 머리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베일이 온몸을 덮는 것이어서 여자의 긴 머리는 온 몸을 덮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자는 머리에 써야 했고(5,6,13), 남자는 머리에 쓰지 않아야 하며(4,7), 여자의 머리는 쓰는 것이나 베일을 대신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15).

4절의 바울의 말은 머리에 쓰고 기도를 하였던 유대 남자나 로마 남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헬라 남자들은 비록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어도 곧 잠자코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남자의 머리를 가리는 것은 그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머리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남자의 머리되신 주 예수님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단순히 해부학상의 머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머리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 그 자신의 머리를 욕되게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유대남자나 로마 남자는 그들의 오랜 관습을 버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곧 설명하겠다.

 

2) 여자의 머리가 상징하는 것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5)

히브리인 여성이나 로마 여성은 이 말씀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헬라인 중에 개심한 여성은 몇가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룩한 말씀의 인도하심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였다.

바울은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첫째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모임 안에서 말하고 기도하는 여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둘째로, 너울의 문제이다. 그는 좀더 당면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에 너울에 관하여 먼저 다루고, 나중에 예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전하면서, 예배나 기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말하는 여자들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다(고전 14:34,35).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모인 성도들의 회중에서 여자는 잠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문제에 관하여 다만 넌지시 말하고 있을 뿐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절에서 여자들이 소리를 내어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바울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잠잠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교회에서 일반적이고 적절한 행동인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 고린도인들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틀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여자들은 머리에 써야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만일 머리에 쓰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써야한다는 것이다! 그 주장은 피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바울이 남자와 여자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관습과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에 의해 준수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너울의 목적

A. 영광의 표현

7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절은 매우 중요한 절이며 본문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요절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이것이 너울을 쓰는 목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교회에 의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서로 다른 인종의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상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두시기에 기뻐하신 유일한 실체이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 외에는 어떤 집단도 따로 선택하신 적이 없다.

주님은 이사야 42:8에서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도 그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1:3) 우리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의 교회에 위탁하셨다.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17:4,5,6,10,22)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속받은 남자와 여자들,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의 교회에 두기를 기뻐하셨다.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는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중요한 요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간증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설명 만으로는 너울을 써야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불완전하다. 교회는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았으나 여전히 죄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인간들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한 영광이 교회에 존재하는 한, 교회는 완벽한 조직체가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반영하는 것은 교회의 정확한 위치가 아닐 것이다. 교회는 그 참된 본질 또한 반영해야 한다. , 구속받았으나 타락한 인간의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죄악되고 어두운 세상과 인간의 타락한 영광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책임과 특권을 갖게 된 유일한 도구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기 위해 모인 모임에서 이루어진다.

 

B. 쓰지않은 남자의 머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어떻게 이것이 나타나는가? 남자의 쓰지 않은 머리는 가리워지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여자의 쓴 머리는 인간의 타락한 영광을 나타낸다(여기에서 인간이란 남자와 여자를 가리키는데 어떤이는 이를 남자만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기에 머리에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머리를 덮는다면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어 그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야만 하며, 그것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이다. 바울의 이 명령은 유대교와 로마의 이방종교에서 개종한 남자들에게 하나의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들은 전에, 남자와 여자 모두가 머리에 쓰고 기도하는 종교적 관습을 행하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복음이 북방의 대륙으로 전파되었을 때, 추운 지방에 살면서 보온용 모자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도 또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람들 안에 내재하신 성령은 분명히 그들의 거부감을 다스리며 극복하시고,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겸손히 복종하게 하셔서, 그들은 머리에 쓰지 않고 경배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남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여자보다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며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C. 여자의 쓴 머리는 인간의 타락한 영광을 반영한다.

여자에 관하여 바울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 바울은 여자가 남자의 형상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여자는 여러 면에서 남자의 동역자로서, 남자의 옆구리 갈비뼈에서 취하여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와는 아담 안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형상대로 남자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형상에는 여자가 또한 포함된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태초에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이다.

앞 장들에서 바울은 고린도성도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 남자의 영광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1:29),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1:31),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3:21).

, 이제 그는 말하기를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요 남자의 영광은 타락한 영광이므로 여자는 마땅히 이 타락한 영광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 머리에 써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최초의 조상이 하나님을 불순종하였을 때 타락(Fall)이 없었다면 여자들은 너울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이 있었기에, 남자의 영광은 훼파되었고 이것이 여자들의 덮여진 머리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아담과 하와 모두 범죄하였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모두 타락하게 되었고, 여자의 너울은 남자와 여자 모두의 타락한 영광을 상징화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여자의 너울이 남자에 대한 여자의 복종 또는 순종의 상징이거나, 단순한 과거의 낡은 관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중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그 진리란 구속받은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다면, 남자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고 남자의 영광은 철저히 가려져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조화로운 모습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임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남자의 쓰지 않은 머리를 통해 적절히 나타나게 되는 반면에, 여자가 쓴 너울은 인간의 타락한 영광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와 여자는 영광을 드러내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여자의 너울은 남녀 모두의 영광이 가리워진 것을 상징한다. , 모든 인류의 타락한 영광이 여자의 머리에 쓰는 것에 의해 나타나고 묘사된다. 남녀 모두가 동일한 상징적 너울 아래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범죄하였고 구속받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일 때, 그곳에는 우리의 모임을 내려다보며 참관하는 천국의 천사들이 있다. 그들은 전 교회가 다음을 나타낼 때 기뻐한다.

* 남자의 쓰지않은 머리에 의해 상징되는, 밝히 드러나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 여자들의 머리를 덮은 너울로 묘사된, 구속받았으나 추락한 인간의 영광

 

4) 이유 - 창조질서

왜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나타내는가?

어찌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가? 여자는 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고, 남자는 자신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창조질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이미 3절에서 창조에 근거를 둔 이유를 언급하였다. -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이제,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말하고 있다. -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뒤에 둘지니라(8-10).

창조에 있어서, 남자(아담)는 여자(하와)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으며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다. 따라서 아담이 하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와가 아담에게 속한 것이다. , 아담은 하와가 창조된 원천인 셈이다. 더 말하자면,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돕는 자요, 동반자로서 창조된 것이다. 그들은 함께 상호보충하여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창조의 질서와 목적, 그리고 남자가 머리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 보다 남자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고 남자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의 상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바로 여자인 것이다. exousia라는 단어는 권력이나 특권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주로 권위의 의미를 갖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단어를 여자 각자의 권위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남편의 권위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타락한 인간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말씀은 이 권위가 여자의 머리 위에 있다고 명백히 말씀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여자가 무엇을 머리에 쓴다고 말하고 있는가? 너울, 바로 그것이다! 권위는 너울이다. 그것은 여자 각 사람의 권위나 남자의 권위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이 권위는 인간 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는 인간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세의 상징으로서 그 머리 위에 이 너울을 써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아래 있는 인간의 타락한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구별하여야 한다.

 

(3) 창조와 출생에 있어서의 평등성과 상호의존성

, 이것은 분명히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군요라고 누군가 분명히 이야기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미리 예견하고 11절과 12절에서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남자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바울은 남녀가 주 안에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비록 창조에 있어서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나, 출생에 있어서는 모든 남자가 여자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자 없이 지상에 남자가 존재할 수 없고, 첫 번째 사람, 아담 없이는 지상에 여자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상호관계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하나님만이 지상에 우리가 존재하게 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며,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상호보완적이다.

 

(4) 너울의 중요성

너울의 목적을 설명하고 나서, 바울은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13).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이다.

다음의 상황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자:

1) 남자는 머리에 쓰고 여자는 쓰지않음

2) 남자는 머리에 쓰고 여자도 머리에 씀

3) 남자는 머리에 쓰지않고 여자도 쓰지않음

4) 남자는 머리에 쓰지않고 여자는 머리에 씀

 

1) 남자는 머리에 쓰고 여자는 쓰지않음

예배를 드릴 때 목사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그 회중의 여자들 가운데 소수는 머리에 쓰고 대부분은 쓰지않는 종교 단체가 있다.

앞에 있는 내용을 이해하였다면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부인하거나 축소시키고 인간의 영광을 높이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며 불경과 혼동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또 다른 함축된 의미가 담겨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2) 남자도 머리에 쓰고 여자도 머리에

이 경우 인간의 영광은 타락한 후의 올바른 위치에 있으나, 하나님의 영광 또한 경홀히 여겨지고 타락한 인간의 영광과 동일시된 채로 똑같이 취급되고 있다. 이것도 역시 비성경적이며 결과적으로 불경과 혼동을 낳게 된다.

 

3) 남자도 머리에 쓰지않고 여자도 쓰지않음

하나님의 영광은 인정하나, 죄를 범하여 추락한 인간의 영광은 부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광을 들어올려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많은 교회들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남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정되고 나타난다.

여자들은 머리에 쓰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비록 뜻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지는 부인을 범하게 되는 것을 본다.

a) 인간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못함을 부인함

b) 타락을 부인함 -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인류가 범죄 하게 됨

c)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부인함

d)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을 부인함

e) 십자가의 필요성을 부인함

f) 우리의 구원을 부인함

g) 우리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를 부인함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수준으로 인간의 영광을 높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감히 이같은 생각을 눈꼽만큼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렇게 행하는 교회가 있는 한,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비록 신중하지 않은 생각일 수 있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그것은 불경스러움과 혼란이다.

 

4) 남자의 머리에는 쓰지않고 여자의 머리에는

이것이 온전히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하신 하나님 - 가려지지 않고 축소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 구속받은 타락한 인간의 영광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교회로서 합당한 모습을 지니고 성경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고 인간의 영광은 가려지게 된다. 높임을 받으실 분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주님 한 분 뿐이시다. 이러한 자세로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실추된(타락한) 영광,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베푸신 은혜를 증거하게 된다. 그럴 때, 고린도전서 10 31절의 말씀 -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너울에 관한 문제가 단순히 일시적 기분에 따라 결정을 하거나, 버려질 관습이나 의식이 아니라 너무나 중요한 분명한 진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진리란 그리스도인의 모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임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관하여 예민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이 잘못 나타나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실망하게 될지 우리는 가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5) 여자의 개인적인 영광

바울은 이제 두 가지 사항을 더 말한다. 긴 머리가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서, 그는 설명하기를 긴 머리는 여자에게 중요하며, 그 이유는 그것이 여자의 개인적인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14,15). 본성 자체가 남자의 긴 머리가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자가 머리를 기르도록 허락하신 특별한 상황이 있었다. 그것은 나실인(하나님께 구별된 자 - 6:2)의 경우였다. 나실인의 율법에 따르자면 (나실인은 남자와 여자 모두 될 수 있었다.) 그 자신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의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본성과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 안에서 그의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찾기 때문이었다. 나실인의 완전한 모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긴 머리가 남자들에게는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긴머리가 여자 개인의 영광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자 자신이 남자와 여자, 다시 말해서 모든 인류의 영광을 나타냄과 동시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그녀의 긴 머리에 개인의 영광이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동안 여자는 두가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그녀의 긴머리는 그녀에게 영광이요 너울이고, 머리에 쓴 너울은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영광을 상징하게 된다(여자 자신의 타락한 영광을, 그녀에게 영광이요 너울인 긴 머리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된다는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베일(veil)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eribolaion이다. 그것은 너울(head covering)이라고 쓰인 말과는 다르다(너울은 헬라어로 kata kephales echon이다). 베일은 여자와 남자를 구별해 주는 것으로, 여자의 긴 머리는 비유적으로 여자의 베일이 되어 그녀를 남자와 구분하게 한다.

 

(6) 규례가 확립되다(The Custom Established)

마지막으로 바울은 변론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 이것은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 그것을 해야합니까?. 16절은 다양하게 번역되어졌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다른 규례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다른 규례를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번역이 있다.

그 의미는 전부터 그 규례가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전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생겨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타락된 영광과 주 예수 안에서의 구속의 계시가 발현하면서 이 계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전에는 유대 사회나 로마나 그리이스 사회에서도 이러한 관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은 그것을 규례로 행하여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성도들의 모임 안에서 나타내는 일에 있어서 이 규례가 아닌 다른 규례나 방법이나 양식이 따로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 요약

너울의 중요성과 교회의 집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그것을 준행하여야 하는 지, 바울이 그 교훈의 근거로 전하여 준 커다란 교리로부터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규례는 다음의 교리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권위, 그 말씀의 권위, 주님의 계시, 성령의 감동하심, 머리됨과 그것이 구원에 관하여 지니고 있는 내재적 의미들, 주님께 대한 복종과 순종, 하나님의 영광, 남자의 영광, 여자의 영광, 창조에 관한 사실, 남자와 여자의 평등과 상호의존성, 천사들, 그리고 주님의 명령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

너울을 쓰는 규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겸손과 순종에 있어서 한 성도의 자발성을 나타내는 가장 간단한 증명이 되며, 최소한의 외적인 증거이고 표현이다. 그것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규례에 대하여 등한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명령하신 신약의 다른 진리와 규례에 대한 무시와 거부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신약의 모든 진리들을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문을 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발단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우리 시대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고, 교회 역사의 마지막 국면에 처해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가고 있는 바벨론주의의 그릇된 사상에 동화되어서 결국 커다란 음부에 던져지게 될 그 길에서 교회를 지켜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4. 실제적인 적용에 대하여

교리적인 측면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실제적인 적용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 예를 들어, 여자는 언제 너울을 써야하며 너울의 모양은 어떠해야 하는가?

 

(1) 여자들에 관하여

1) 너울은 누가 써야하는가?

우리는 이미 gune라는 헬라어가 여기에서는 아내가 아닌 여자를 가리키는 말임을 살펴본 적이 있다. 따라서 주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에 합하게 된 모든 여자 성도들은 그들의 머리에 써야 한다. 믿고 침례를 받은 사람은 나이가 적든지 많든지 상관없이, 기혼이든 미혼이든 관계없이, 그리고 남편이 믿는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관계없이 교회의 믿는 자매라면 모두 너울을 써야하는 것이다. 성령의 그 명령에서 제외되는 자매는 아무도 없다. 이것은 인간의 영광이 타락한 것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어떤 교회들은 이 규례를 철저히 실행에 옮겼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매우 반갑게 여기고 높이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죄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고, 또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에 아무리 어린 소년과 소녀라도 영광을 나타내는 역할을 분명히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아직 구원과 침례를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어린 딸들에게도 너울을 쓰게하고 어린 아들들에게도 교회의 집회에서는 모자를 벗도록 격려한다. 이는 남자, 여자, 어린 소년과 소녀등 모든 사람들에 의해, 구속의 측면에 있어서 보다는 창조의 측면과 관련하여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2) 상황들(the circumstances)

바울은 머리에 쓰지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여자들이 성도들의 공식적인 집회에서 말하도록 허락된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성도들에게 지적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이 두가지 잘못을 범하였다고 말한다.

* 여자들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점

* 여자들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서 머리에 쓰지 않은 점

고린도 교회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많은 문제들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바울로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그는 먼저 너울의 문제를 다루었고 고린도전서 14장에 가서 여러 사람들이 모인 회중에서 말하고 기도하는 여자들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단호하게 말하는데, 여자는 잠잠해야하며(헬라어로 sigatosan = let them be silent), 말하는(헬라어로 lalein = to speak) 것이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lalein)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디모데전서 2:11-14에서 바울은 또 여자들로 하여금 가르치지 말고 잠잠하라 하시는 성령님의 명령을 상기하게 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는 en hisuchia(=in silence)이다. 바울이 전한 이유로는 창조와 타락에 근거한 두가지 이유가 있다. (a)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고 따라서 남자에게 권위가 부여되었다. (b)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기는 하였으나 아담이 꾀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꾀임을 받았다.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유혹을 받기 쉽고 따라서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그외에도 여자들이 남자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을 할 때 그릇된 가르침을 전할 가능성이 증가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가르칠만한 남자 교사가 없는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고 지도할만한 많은 자매들을 두셔서 교회를 축복하셨다. 하지만 남자교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여자 교사들은 가르치는 역할을 남자에게 양도해야 한다. 여러 성경 말씀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여자는 일반적인 교회의 모임에서 너울을 써야하며, 소리를 내어 기도하거나 말하지 말며, 권위를 행사하거나 남자들 앞에서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여자들이 가르칠 수 있는가? 자매들을 위한 모임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모임, 그리고 청년들을 위한 모임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매회, 주일학교, 그리고 가르칠 만한 남자 교사가 없는 상황에서는 가능하다. - 방금 살펴본 상황을 가리켜 어떤 이들은 선교사적 상황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는 여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검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여자의 영역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매우 넓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을 위해서나 가족의 수입을 위해 일을 해야한다면 그녀가 일하는 자리에서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들이 모여 예배드리거나 기도하는 모든 상황에서 여자들은 너울을 써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는 여자들이 예언하거나(설교하거나) 가르칠 때도 포함되어있다.

 

3) 너울의 모양

너울은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영광의 상징이기 때문에 단순한 모양이어야 한다. - 특히, 머리를 덮을 수 있는 재료로 된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얼굴 전체를 가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남자들은 머리에 쓴 것을 벗어야 한다. 유대 남자들은 기도할 때 기도용 숄(prayer shawls)이나 머리의 위, , 뒷 부분을 덮는 탈리스(talliths)라는 것을 쓴다. 로마 남자들도 동일하게 행한다. 아랍 남자들도 머리의 위, , 뒷 부분을 덮기 위해 케피예(keffiyeh)를 사용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베일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습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예배 안에 내려진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는 머리는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중요하지만 얼굴은 중요하지 않다. 본문 말씀과 그 상징하고 있는 것이 머리를 덮을 만한 단순한 형태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얼굴을 가리는 베일은 필요하지 않다. 게다가 여자의 참된 베일은 그 긴 머리이다. 그것은 쓰는 것으로 주어졌다. 단지 머리를 덮는 것 안에 상징적 의미는 충분히 담겨있다. 많은 자매들이 평범한 스카프나 머리와 어깨를 덮어 쓰는 큰 스카프(mantilla)와 같은 모양의 것을 사용한다.

모자는 어떤가? 모자도 또한 머리에 쓰는 것이지만 유행과 취향에 따라가기 쉬워서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형태나 크기가 제각각일 것이다. 그러면 예배드릴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는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색채나 모양에 있어서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 가장 간단한 요구 사항이지만, 예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의 규정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영광의 상징물로서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 남자들에 대하여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남자들 - 연장자뿐 아니라 10대도 포함되었다 -은 주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예배와 기도를 위해 주님의 백성들이 모인 집회에서 머리에 쓰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 또는 직업적 배경이나 과거에 갖고 있었던 종교에서, 머리에 무언가 쓰도록 요구하였을지라도 (: 군인모, 노동자의 안전모, 케피예(keffiyeh), 야멀케(yarmulke), 두건(skullcap), 터번(turban) ) 또는 공직에 있거나 어떤 단체나 교파 교회에서 일정한 지위에 있다 할지라도, 머리에 쓰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사막지대에서 흙 먼지를 피하기 위해 케피예(keffiyeh)를 쓰거나 열대 기후에서 태양과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토피(topi)를 쓰거나 또는 온대지역에 살면서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모자와 스카프를 쓰는 환경 가운데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남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머리에 쓴 것을 벗어야 한다. 때로는 곤란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짝을 이룬 명령을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3) 장로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안내자로서 장로들은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이 명령을 지키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만찬 예배와 교회의 집회에서는 모든 남자 성도들로 하여금 모든 형태의 머리에 쓴 것을 벗도록 하고, 모든 여자 성도들은 단순한 너울을 쓰도록 분명히 이끌어야 할 것이다. 여분의 너울을 준비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칠 책임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너울에 관한 문제는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들은 다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을 것이다. 비판적이거나 불쾌하게, 또는 불친절하거나 형식적인 마음으로 할 것이 아니라, 아무도 거스림이 없게 하기 위하여 웃으며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태도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용기를 얻어 따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격려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한 채 계속하여 무지와 불신과 불순종 가운에 있다면 강요하지 않도록 하라(고전 14:38). - 그저 계속하여 가르치고, 우리 스스로 그 진리를 행할 것이며, 그 형제나 자매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주님께 맡겨라. 주님 그분께서 그분의 심판대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5. 결론

하나님의 영광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 주님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인 교회의 형성을 낳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의 가시적인 표현을 허락하는 인장을 그 위에 두셨다. 남자는 그가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되었고, 반면에 여자는 남자와 여자의 타락한 영광을 반영한다. 그러나 둘은 주님 안에서 동등하며 서로 의존한다. 그 이유는, 창조 때에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지만 출생에 있어서 남자는 여자에 의해 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은 머리에 쓰지 않고 예배드리는 남자들에 의하여 나타나고 상징화된다. 반면에 남자(구속받은 남자와 여자를 대표하는)의 타락한 영광은 머리에 너울을 쓰고있는 여자들에 의하여 상징되어진다. 이는 예배와 기도를 위해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여러 모임에서 실행되며, 여자들이 기도하거나 가르치는 특별한 상황에서도 이루어진다. 여자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영광은 쓰는 것으로 주어진 긴 머리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따라서 교회는 그 영광을 마지막 때까지 계속하여 나타낼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남자의 영광을 구별하여 나타내는 그 규례를 무시하거나 버린다면, 주 예수님 그분께서 내리신 중요한 명령 가운데 한 가지를 불순종하는 위험에 있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종교 단체와 신자들이 우리의 믿음의 중요한 신조들을 저버리는 때에 주님을 따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애쓰는 성도들은 자신의 삶과 그들이 속한 교회에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 일에 더욱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전도출판사간-여자의 너울과 하나님의 영광(피터 위 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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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