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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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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엘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영어에 강 한 가운데서 말을 갈아 타는 것은 좋지 않다는 재미있는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강 한복판에서 말을 갈아타게 되면 강물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강 한 가운데서 말을 좀 갈아 타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마태복음부터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처음이지요. 이번 교제의 처음으로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교제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에 따라서 신약성경 맨 마지막으로 가실까요. 요한일서를 계속 교제할 예정이었습니다만 계시록 한 곳을 기쁘게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계시록 5장 전체를 보겠습니다.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성경 가운데는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두 개의 책이 있는데 구약은 에스겔이고 신약은 요한계시록을 무서워합니다. 이 두 책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알고 싶으면 구약의 다니엘과 에스겔을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려운 곳이 많이 나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찬히 읽게 되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에 마지막 부분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창세기로 시작된 하나님의 일이 요한 계시록에서 마무리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같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요한계시록을 읽고 즐길 수가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제 1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어쨌던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보고자 합니다.

 

룻기에서의 고엘

성경에는 매우 재미있는 인물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습니다. 고엘이라는 말로서 친척과 관련되는 일을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고엘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이 고엘이 나오는 가장 유명한 곳은 룻기입니다. 룻기에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나오죠. 다윗이 그 후손입니다. 룻기에 보면 나오미라는 미망인이 나옵니다. 그 며느리 룻과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의 남편이 모압으로 가기 전에 그들의 땅을 팔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50년 만에 원래 팔았던 원 주인에게 땅이 돌아갈 터입니다. 희년이 돌아오기 전에 친척이 그 땅을 물릴 수 있습니다. 그 재산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구속자라고 불리우는 것이죠. 보아스는 나모미의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을 위해서 팔았던 재산을 다시 되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작은 책인 룻기는 구속의 로맨스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젊은 미망인인 룻을 자기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룻의 남편이 되기 위해서 보아스는 팔았던 당을 되돌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작은 책인 룻기는 신랑인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아름답게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것이 몸된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보아스는 미리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구엘 즉 구속자였습니다. 구속자 고엘은 세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 범위에 친척이 아니면 안됩니다. 만약에 나오미에 친척이 아니었으면 팔았던 재산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어떠하든 친척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래서 구속할 수 있습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팔았던 재산을 되물린다는 의미로서의 구속입니다. 땅이라든가 또는 토지를 사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구속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되물릴 수 있으면 되물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렇게 했습니다. 룻기에 의하면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가 더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재산을 되돌릴 수 있는 우선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그 친척은 구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정으로 구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구속을 했습니다.

세번째는 재미있습니다. 이 고엘이라는 구속자는 자기 친척을 위해서 복수할 권한이 있습니다. 만약 친척을 다른 사람이 죽인다면 이 고엘이라는 권력자는 복수할 권리가 있습니다. 친척을 죽인 살인자를 구속자가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경찰이나 재판관 같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살인한 사람을 복수할 책임이 구속자에게 있었습니다.

 

열왕기에서의 고엘

또한 가지 예가 구약 성경에 있습니다. 다윗이 전쟁할 때였습니다. 사울의 충실한 부하가운데 아브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브넬이 전쟁할 때에 다윗의 부하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브넬이 다윗을 방문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방문했습니다. 다윗의 부하인 두 사람은 자기 동생이 아브넬에게 죽임 당한 것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압이라는 가장 높은 다윗의 부하가 아브넬을 문에서 불렀습니다. 아브넬은 아무 의심도 없었습니다. 평화의 이야기를 하러 와서 다윗과는 평화를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그 동생의 형인 요압으로부터 불림을 받았습니다. 마을 문 앞에서 조용히 이야기 하자고 요압이 아브넬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칼을 가지고 아브넬을 찔러 죽였습니다. 역시 복수였습니다. 전시이기 때문에 요압이 복수 해야 되는지 어떤지는 의문스럽습니다만 어쨌던 요압은 고엘 즉 구속자로서 동생을 대신하여 복수를 해서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친척이며, 재산을 되물리는 구속자입니다. 죄를 복수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자, 성경 전체에서는 고엘이라는 것이 아주 크게 보입니다.

 

신약성경에서의 고엘

예를 들면 신약성경 전체를 생각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사복음서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친척이 되신 것을 기록하고 있죠. 사복음서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되심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이시죠. 그분은 우리의 친척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형제 자매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남녀의 구별이 없이 말이죠. 형제자매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 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형제라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님을 향해서 형님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찬송가라든가 어떤 사람들의 말에는 주 예수님이 형님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절대로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형님이 아니고 우리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친척이 되십니다. 사복음서에서 이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사도들의 편지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의 편지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자인 것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복음서를 근거로 한 사도들의 편지 속에 있는 구속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편지 속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 즉 구속자인 것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계시록으로 들어오면 어떻습니까? 최종부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복수하는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에서는 심판자로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 전체는 고엘 즉 구속자의 모습 전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의 고엘

요한계시록 안에는 동일한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가지 부분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인자라고도 불리웁니다. 13절에 의하면 인자로서 일곱교회 사이를 다니십니다. 물론 지금은 살아계십니다만 그분은 죽음을 맛보신 분이십니다. 계시록에서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영광 가운데에 있는 인생으로서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1장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역시 우리들의 친척이죠. 우리들도 사람의 아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그렇게 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지만 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일곱교회를 다니시는데 그 교회를 조사하며 살펴보시며 다니십니다. 각 모임을 잘 살펴보시는 주님이십니다. 2장과 3장에서는 각 모임의 상태를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인자로서 일곱교회를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는 우리들의 친척되시는 그리스도이시죠. 그러나 5장은 다릅니다. 여기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보입니다. 물론 구속의 관계로서 말이죠.

여기서 계시록 전체를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이 계시록의 개략을 보시면 앞으로 계시록을 볼 때 분명해질 것입니다. 계시록의 전체적인 개략은 1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19절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본 것과 이제 있는 것, 장차 될 일이라는 세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1장은 요한이 본 것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요한이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2 3장은 이제 있는 것에 해당합니다. 요한시대에는 실제로 소아시아에 이 일곱교회가 있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금의 터키 지역에 이 일곱교회가 있었습니다. 2,3장의 일곱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사도시대부터 주님의 재림 때까지의 모든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사도시대 마지막 즈음에 해당하는 교회모습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에서 떨어진 교회입니다. 두번째 서머나 교회인데 서머나 교회는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도시대 직후에 박해가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버가모입니다. 버가모라는 말은 두 번 결혼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죠. 그런데 세상과 타협해서 세상과도 결혼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종교로 인지한 그러한 시기였습니다. 이제 세상이 교회를 박해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유괴해 버렸습니다. 타협이 많아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부이면서도 세상과 결혼한 것과 같습니다. 두아디라는 중세를 나타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두드러집니다. 이때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커진 것을 나타내겠죠. 두아디라 다음에는 사데라는 교회가 나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이후를 나타냅니다. 그 종교개혁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데의 상태는 실제로 어떤 상태입니까?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제로는 죽은 자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신교라는 것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빌라델비아 입니다 빌라델비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느 정도까지 모임을 가리키겠지요. 전 세계에서 모임은 힘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모임이 가능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된 것이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교만하는 것은 안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다른 형제자매들이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섬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능력이 적다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능한 한 주님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는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리나 마지막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갑지도 더웁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전 세계에 미지근한 모임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빌라델비아에 교회와 같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이것을 계속 지키고자 하면 성령을 가지고 지키지 않으면 라오디게아 상태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충분히 주의해야 합니다.

어쨌던 2,3장은 1 19절에 있는 이제 있는 것에 해당합니다.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는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교회상태입니다. 6~19장까지는 장차 될 일입니다. 6~19장까지는 주님의 공중재림 이후에 일입니다. 그 사이에 4,5장이 있죠. 6~19장까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록입니다. 일곱 인이 있습니다. 일곱나팔이 있습니다. 일곱대접이 있습니다. 이것은 짧은 기간에 교회가 휴거 된 이후에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입니다. 6~19장까지의 심판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심판입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천년왕국 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하는 이 세상에 대하여 내리는 심판인 것입니다. 6~19장까지가 그렇습니다. 천국에서 그러한 심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6~19장까지 심판은 무서운 심판이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심판을 내릴 자격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5장에서의 고엘

4,5장이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잘 해주고 있습니다. 4,5장에 의하면 하늘에는 보좌가 있습니다. 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이 작은 두루마리의 책은 이 우주의 소유를 증명하는 서류이겠지요. 이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손에 등기부 등본 같은 증명서류가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아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심판을 내릴 자격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그 도전이 전 우주에 퍼졌습니다. 이 일곱 인을 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전 우주에서 이 인을 뗄 수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듣고 놀라서 울었습니다. 요한은 그 의미를 잘 알았습니다. 5장에서 책을 받아서 인을 뗄 수 없다면 하나님의 소유가 없어지는 것이겠죠. 하나님이 하나님의 물건을 빼앗은 사람들을 심판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것이 인간에게 빼앗겨 있는 채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지는 것이죠. 역시 자격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분이 누구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유대지파 다윗의 뿌리가 이겼기 때문에 이 분이 책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요한이 돌아보아서 누구인지를 살펴보고 놀랬습니다. 보았더니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었습니다. 물론 이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주님이 유다 지파의 사자라는 것은 주권과 왕 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치 사자가 모든 동물의 왕이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왕이십니다. 그에게는 왕좌에서 나오는 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입니다. 인간으로서 다윗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분이 이겼기 때문에 일곱 인을 뗄 수 있다고 장로가 말했습니다.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있는 바로 그분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나 요한계시록에서나 어린양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은 특별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다른 어린양과는 다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어린양의 모습인데 이런 것입니다. 작은 어린양이 태어났습니다. 그 어미가 죽어버렸습니다. 집에 그 어린양을 데려와서 아이가 그 어린양에게 우유를 먹입니다. 이 어린양을 집에서 아주 귀여워합니다. 너무 귀여워해서 아이들의 애완동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그 어린양이 아이들이 자는 침대에서도 잘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양을 키워보지 않아서 상상하기 힘들겠죠? 이 작은 어린양은 매우 귀엽습니다. 응석을 부립니다. 아이들이 놀면서도 껴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응석부리고 있는 어린양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했습니다. 무자비한 자가 칼을 가지고 어린양을 죽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얼마나 이상한 광경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그랬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 받는 어린양이 인간의 무자비한 손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희생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홍형제가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죽은 지 얼마 안되는 어린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임을 당한지 얼마 안되는. 마틴 루터가 이 말에 대해서 해석을 했습니다. 루터의 해석에 의하면 어제 죽임을 당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루터 시대는 1500년이나 지났죠. 우리들 시대는 200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죽임을 당한 것처럼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음의 능력은 언제나 신선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의 능력은 결코 낡아지지 않습니다. 집에는 낡은 것들이 많이 있죠. 낡았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시대에 걸쳐서 갓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서 주님은 보이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새롭다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물건이 새롭고 낡은 상대적인 의미가 하나 있고, 금방 산 것은 새롭다고 하죠. 이것은 낡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새로운 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방금 읽은 이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죽은 지 얼마 안되는의 의미), 신선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야채나 생선 등에 신선하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것이 오래되면 우리가 사용할 수 없죠.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언제나 신선합니다. 전혀 낡아지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되어서 재미있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에 새 노래를 노래하여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같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노래는 결코 낡아지지 않습니다. 이 노래는 언제나 신선합니다. 여러분들이 데파트 등에서 음악을 듣죠. 서울에서 인기있는 노래들이 불리어지겠죠. 그런데 다음 달에는 어떻습니까? 오늘은 인기가 있지만 다음 달에는 아무도 그 노래를 안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현대 노래는 잠시 인기 있다가 인기가 없어지는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속의 노래는 결코 낡아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노래의 목표가 죽은 지 얼마 안되는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5장 안에는 천국의 보좌가 있습니다. 우주의 권리증서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세상에 있은 사람들은 심판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하나님을 위해서 정리하고 심판할 자격이 있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전 우주를 한번 조사해 보십시오.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이분이 누구십니까? 일찍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구속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4,5장의 의미입니다. 그분은 그 보혈을 지불해서 우리들을 사셨습니다. 9절에 의하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실제적인 의미는 제사장 나라를 삼았다는 것이 원 뜻입니다. 이 나라의 국민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는데 나중에는 모든 백성을 대신해서 레위 족속을 택했습니다. 레위 족속 가운데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택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아론과 같이 특별하게 택함을 받은 제사장이 없습니다. 목사들이 자기가 제사장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성경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구속의 주로서 나타나 있습니다. 1장에서는 우리들의 친척이었습니다. 5장에서는 우리들의 구속주이십니다. 구속의 대가는 그 자신의 보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어디입니까? 계시록 19장입니다. 거기는 주님께서 흰말을 타시고 하늘에서 오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온 자들은 하늘의 군대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왕의 왕, 주의 주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칼이 나옵니다. 이것은 날카로운 말씀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입니다. 내 말이 그들을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구속해서 되돌리시고 그리고 복수하시는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19장은 천년왕국이 바로 시작되기 직전의 일입니다. 20장에서는 천년왕국이 조금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장은 참으로 짧습니다. 창세기부터 찬년왕국에 대해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천년왕국의 자세한 것도 에스겔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영광은 영원한 영광이 아닙니다. 천년왕국에 나타난 지상에서의 영광을 말합니다. 계시록 20장은 같은 천년왕국을 나타냅니다.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힙니다. 이 세가지는 마치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사탄, 그리스도에 대한 적그리스도, 성령에 반대해서 거짓 선지자, 이 세 존재는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히게 됩니다.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천년 동안 바깥에서 죄를 범할 유혹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천년 동안 사탄의 힘이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 마지막 즈음에 큰 전쟁이 일어납니다. 사탄이 무저갱에서 잠시 놓이면서 반역전쟁이 일어납니다. 반역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께 대적을 합니다. 이 전쟁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마지막 전쟁이 끝나버립니다. 그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옵니다. 이것이 계시록 21,22장입니다. 20장 마지막에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믿지 않는 자들 특히 죽은 자들의 심판입니다. 최후로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영원한 불못으로 던집니다. 구약시대 성도들과 신약시대 성도들 그리고 천년왕국 때 믿는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새로운 땅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나라로서 계속 진행됩니다. 그들 가운데는 왕도 있고 또한 왕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들이 다스립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다스리시는 분은 흰말을 타고서 오셨던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들의 미래는 영광에 빛나는 미래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에서 어디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 현재 하나님께 어떻게 충성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자리가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그리스도의 행정에 관여합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의 행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지금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더욱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2002 2 3 봉천동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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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