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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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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행하는 생명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2주 동안 한국 여기저기를 다녀왔습니다.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면서 말씀을 교제했습니다. 아주 복된 2주간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이 이번이 처음 방문이 아닙니다. 아마 이번이 열 번이나 열 한번째 방문이 될 것입니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40년 전이었습니다. 40년 동안 한국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사이에 모임 숫자도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복된 변화입니다. 이번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씀으로 돕고자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봉천동모임에서도 영적으로 덕세움을 입는다면 좋겠습니다. 조금 전에 찬송한 찬송가사가 잘못된 것을 혹시 아십니까? 일본이나 캐나다에서도 잘못된 찬송가사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샤론의 수선화라든가 골짜기의 백합화라고 노래 하잖습니까? 샤론의 수선화라는 꽃은 아주 보잘것없는 꽃입니다. 또한 골짜기의 백합화도 그렇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가서 2 1절에서 취한 것입니다. 샤론의 수선화나 골짜기의 백합화는 누구이겠습니까? 이 아가서를 쓴 솔로몬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사랑하는 여자가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사랑하는 여자가 말하기를 자기 자신이 보잘것없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저 위대한 솔로몬 왕에게 사랑받는 나는 보잘것없는 꽃과 같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께 그렇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자신이 정말 보잘것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우리의 주님은 왕이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보잘것없는 저희들이 주님께 사랑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가서에 나오는 이 사랑받는 여인은 솔로몬의 사랑에 대해서 여러가지 불안을 느꼈습니다. 우선 여기 사랑받는 여인은 외국인 여자 같습니다. 게달이라는 동네에 있는 여자 같습니다. 사해 건너편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여자가 아니고 암몬 족속의 여자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솔로몬에게는 이스라엘의 많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생각하기를 솔로몬 왕이 정말로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실까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 같고 골짜기의 백합화에 지나지 않는데. 그러나 아가서 2 2절에는 솔로몬의 말이 나와있습니다. 그 여자에 대한 솔로몬의 말은 이러합니다. 만약 나의 사랑하는 자가 골짜기의 백합화 같다면 다른 사람들은 가시나무와 같다.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고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물론 가시나무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비교해보면 골짜기의 백합화가 가치가 있죠. 이와 같이 솔로몬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높게 평가를 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잘 보아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솔로몬의 말을 가지고 즉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고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조금 전 부른 찬송을 앞으로 부르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새 예배 찬송가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도 제가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 찬송 안에는 아주 좋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쳐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가서 2 1,2절을 읽으시면서 실제의 의미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날에 제가 동경에 있는 후츄모임에서 8번 정도 아가서 말씀을 교제했습니다. 여기서 아가서를 교제하면 좋겠지만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두 세 번 말씀시간으로 아가서를 다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요한일서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1 1~2 2절까지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한국에 와서 말씀을 교제하면서 대체적으로 바울서신을 가지고 교제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지역교회에 대해서 많이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이 쓴 13통의 편지 가운데는 지역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자로서 지역교회로 모이기 때문에 각각 바울서신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성경 전체가 중요합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 각자에게 직접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읽고 기뻐합니다. 그 안에는 각가지 여러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대체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을 위함인 것을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도 그 약속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우리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은 다릅니다. 특히 바울의 지역교회에 대한 말씀은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편지는 다릅니다. 우리들을 수신자로 기록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인사가 전혀 없습니다. 누구를 향해서 썼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모임을 위해서 썼는지 어떤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2 19절에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이들은 18절에 의하면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무리 가운데서 나갔습니다. 이것들을 보면 요한이 어떤 지역모임이나 지역모임들에게 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요한일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맨 마지막에 기록된 것이며 그 내용도 맨 마지막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 계시록보다 나중에 기록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요한일서 5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맨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조금전에 말씀드린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최후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하는 것은 요한일서를 조사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이 서신을 쓸 때는 제 1세기 마지막 즈음이었습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가르침을 가진 사람들이 모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전부 하늘나라로 불려갔습니다. 바울을 포함한 12명의 사도 가운데 요한은 나이 들었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에베소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밧모섬에 갇혔다가 놓인 이후에 에베소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때 모임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세가지 각각 다른 잘못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까지 그 잘못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위 기독교계에서도 주 예수님은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저 사람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이라고 믿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 시대에 이 생각들이 유행했습니다. 또 한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인 인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 같은 몸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령 같은 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요한이 이 이유를 생각하고 편지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번째 잘못된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침례를 받을 때까지 단순한 인간이었고 출생부터 침례까지는 단순한 인간이었다. 침례를 받을 때 무슨 방법으로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되었다. 3년 동안에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십자가에까지 갔다. 3년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능력으로 여러 기적을 행했다. 겟세마네서 그리스도는 예수를 떠나 천국으로 가버렸다. 십자가에 죽은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저 예수다. 이런 잘못이 그 당시에 매우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세가지 잘못을 다루었지만 그 중에 세번째 잘못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하나님인 것과 그리고 실제 인간인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 믿음의 토대입니다. 지금 하나님 아버지 앞에 우리를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완전한 사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 죄를 담당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요한일서 안에서는 이 두 가지가 아주 강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들이 영지가라는 말들을 사용했습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보다도 영적인 뜻을 받았다는 그런 뜻으로 말이죠. 이들의 말에 의하면 영지를 받은 사람들은 선악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의 세계에는 이런 자그마한 도덕적인 범죄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영지에 의해서 자기들이 높은 경지에 올라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동안에 도덕적인 것은 조금도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영적인 것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서신서에서 요한은 이 사실에 대해서도 잘 다루었습니다. 요한은 이 서신서에서 세가지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1,2장에서는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잘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어두움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두번째는 3장부터 5 5절까지인데 이 편지 한가운데 되는 부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귀는 자들은 믿는 형제자매들을 미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세번째는 5 6절부터 마지막까지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면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겠죠. 이 세가지를 다른 관점에서 다룹니다. 말하자면 빛, 사랑, 생명. 우리는 이 세가지를 어떠하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시는대로 요한일서를 쓴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요한과 동일 인물입니다. 대상을 놓고 보면 요한일서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썼습니다. 요한복음 20 31절을 보면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썼다고 기록했습니다. 나중에 30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다고 했습니다. 만약 주님이 행하신 것을 다 기록한다면 책이 많아진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한 것이 많지만은 이것을 기록함은 믿고 생명을 얻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의 경우는 5 13절이 그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믿는 자들을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일곱가지 표적이 주어졌습니다. 일곱가지 기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기적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것을 기적 또는 표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는 말이 쓰여졌습니다. 결국 표시이죠. 이분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인 것입니다. 이것을 본 자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들어와보면 표적이 표시가 아닙니다. 이미 이 편지를 읽는 독자들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빛, 사랑, 생명에 대한 이 세가지 테스터를 보고자 합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이 있다면 빛과 사랑과 생명이라는 이 테스터를 통해서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들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는 아비들과, 청년들과 아이들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의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에 의하면 아이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어린아이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죠. 두번째는 청년들입니다. 이것은 젊은 남자 청년을 말하는 것이죠. 또한 아비라고 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의 길에서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아이와 청년들은 따로따로 특징이 있습니다. 요한의 생각에 의하면 아이들은 비판해야 될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이들은 믿은지 얼마 안된 상태를 말하겠죠. 아이들이지만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청년이라는 말은 강한 것을 드러냅니다. 아비들은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2 12절에 아이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는 말이죠. 13절에 아비들에게 쓰는 것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했습니다. 청년들에게는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해서 그들의 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바꾸어 말하면 지역교회나 지역교회들을 수신자로 해서 쓴 편지가 아닙니다. 물론 지역교회가 요한으로부터 이 편지를 받았겠죠. 이 지역교회는 그 특징으로서 가족이라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입장에서 이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임들도 다른 모임들과 함께 관계를 즐기고 있습니다.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를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1 1절부터 2 2절 사이에 오늘 읽은 부분에서는 단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라는 단언입니다. 그 결과는 이것이죠. 하나님과 사귀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을 수가 없다. 이 집회가 끝나기 전에 1 1절부터 2 2절 사이를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2 2절부터 5 5절까지는 세가지의 현실적인 테스터가 있습니다. 세가지 현실적인 시험은 이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이 세가지 시험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입장이 시험 받는 것입니다. 5 6~20절까지의 구분도 있습니다. 현실에 대한 세가지 증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의 증인은 성령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을 나타내는 것에 틀림없습니다. 피라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일 모레 5장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물과 피가 증거한다는 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당황합니다. 그러나 의미는 매우 분명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를 의미합니다. 사람으로서의 봉사를 시작하는 곳입니다. 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일,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봉사한 마지막입니다. 이 두가지와 성령이 세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더 구체적으로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5 21절입니다. 우상에서 멀리하라 이 서신 전체에 대한 강렬한 결론입니다.

1 1절부터 2 2절까지를 자세히 살펴보실까요. 1 1절에는 태초부터라는 말이 나옵니다. 태초부터 있는 우리들은 이것을 들었습니다.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난바 된지라 했습니다. 창세기 1 1절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 1절에서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가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세 곳에 태초에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을 각각 나타냅니다. 창세기 1 1절은 분명하게 창조를 나타냅니다. 모든 물질의 시작입니다. 요한복음 1 1절에 태초에는 창세기보다 훨씬 더 옛날 일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 1절에 태초에는 이런 것입니다. 물질이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골로새서 가르침과 같습니다. 골로새서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물질이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으로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 1절에 태초에는 언제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섬김의 봉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이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요단강에서 나타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야고보와 요한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복음이 시작될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들이죠. 요한일서에는 8번 정도 태초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요한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은 처음에 있는 그대로이며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태초에 들었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본 것을 우리 동역자들과 함께 여러분들에게 발표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생명입니다. 생명이라고 말하면 누구를 말합니까?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이죠.

2절을 보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들은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태초에 라는 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못 가르쳤습니다. 이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침례 때에 그리스도가 예수에게 내려왔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를 떠나 하늘로 갔다. 요한은 우리가 너희에게 나타낸 것 발표한 것은 무엇이냐?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타난 바로 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고 3절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증거한 목적은 무엇이냐? 너희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들의 사귐은 어떠한 것이냐?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요한은 주장했습니다. 요한의 흐름을 아시겠습니까? 지금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기 위해서 토대를 쌓고 있습니다. 이 속에 이 편지를 쓰는 원인이 몇가지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과 너희에게 전한 것은 무엇이냐?

5절 그대로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운데 누군가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 들어온 그자들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빛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말이죠. 요한은 그들에 관해서 썼습니다. 만약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어두움 가운데 전혀 거할 수 없다. 만약 빛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믿는 형제들끼리의 교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기 때문에 교제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준 것입니다. 영지의 태도가 있던 없던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특별한 영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전혀 모르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를 범하면 즉시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물론 즉시 고백하는 것은 옳습니다. 2 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나중에 생각을 해봅시다. 즉시 죄를 자백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적용이 되어서 깨끗하게 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죄를 범하고 자백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 나타나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7절의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을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월절의 피는 몇번 칠하여 발랐습니까? 한번뿐이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깨끗케 되는 날에 귓불과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몇번 발랐습니까? 한번만 발랐습니다. 유월절의 피를 그 문에 여러 번 바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둥병이 낫는 그 사람도 오늘 바르고 내일 바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번만 발랐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유월절과 닮았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리 모형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한번 헌신되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 제사장들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광야에서 그들이 섬길 때 성막 앞에 있는 대야에서 손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 대야에 피가 아니라 물이 있었습니다. 이 물은 무슨 의미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시편 110편에 있는 것처럼 젊은이가 무엇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7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7절은 존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존귀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본질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것이 모든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은 보혈로 이미 깨끗해졌다. 빛 가운데 드러나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존되는 것은 무엇에 의한 것이냐? 모든 죄를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들을 보존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종종 죄를 범하죠. 이것을 깨끗하게 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사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보존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들은 빛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믿는 자들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있는 것처럼 믿는 자들도 빛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 같은 사람들을 보존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는 그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보존되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8절에 의하면 그런 자들은 진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가족 된 자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함께 빛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로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귈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이 존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그것을 자백하게 되면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했습니다. 마치 잘못을 용서하는 지상의 아버지처럼 말이죠.

2 1절을 보면 이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빛 가운데 있으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보존되고 있죠. 그래서 하나님과 사귀죠. 우리들은 죄를 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쓰는 목적은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늘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잘 봐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앞에 우리의 중보자가 있습니다. 물론 이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은 연약한 자입니다. 복되게도 놀라운 자리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절에는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들의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도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를 확인합시다. 좀 설명 드리겠습니다. 한국어로는 화목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진정시키는 제물 이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안절부절하기 때문에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무언가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슈퍼마켓으로 갑니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여 아주 시끄러워집니다. 그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사탕을 사줍니다. 그 아이에게 진정시키는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그런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들을 위해서 희생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3자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서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그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빛 가운데 있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빛 가운데 있도록 보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족하여 넘어진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 즉 변호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말한대로 보고 듣고 또 손으로 만진 것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내일 모레도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행하는지를 한번 살펴보십시다. 고맙습니다.

2002 2 1 봉천동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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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