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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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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만찬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산 북부 모임은 처음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경을 보는 것은 복됩니다. 이번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덕이 된다면 참으로 복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며칠동안 고린도전서와 지역교회에 대해서 생각을 해왔습니다. 오늘밤도 이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밤은 고린도전서 11 17~34절까지입니다.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다른 모임에서 바울 서신은 세가지 구분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바울이 쓴 편지 모두는 13통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제외한다면 말이죠. 대체적으로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했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가진 가르침은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받은 가르침은 다른 사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도직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복음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2장에 의하면 그 저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히브리서 2장 앞 부분을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바울의 펜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 의하면 히브리서는 특별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바울이든 다른 사람이든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쨌던 바울의 편지를 13통이라고 합시다. 이 편지가 바울의 선이 세가지로 구분됩니다. 어떤 부분들은 교리적(가르침)입니다. 역시 사도들의 가르침인 것이죠. 믿는 사람들이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믿는 자들에게 전해진 말씀인 것이죠. 이것이 교리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교정적 즉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리라는 것은 잘못된 것들을 고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번째 다른 서신들은 헌신적인 것을 말하는 서신입니다.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에 대한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섬겨 나가겠죠. 자기 전부를 주님께 맡겨버리라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두번째 부분인 바로잡는 교정 부분에 고린도전서가 들어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보다도 고린도전서가 잘못된 것을 고치는 그러한 서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가르치고 바로잡기 위한 서신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잘못은 특별한 교리적인 가르침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것들은 행동에 관한 것, 행위에 관한 잘못들이었습니다. 이 서신 15장에 보면 부활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성도들 모두가 믿고 있는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들어와서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고린도 성도들의 행동 즉 행위의 잘못된 것들이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는 아주 심한 도덕적인 죄를 범했습니다. 그 외에도 다른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그들이 모일 때 혼란이 있었습니다. 오늘밤 읽은 것은 모임으로 모일 때 일어난 혼란과 관계된 것입니다. 주의 만찬 떡을 떼러 모이는 것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전서를 다 보면 이러이러한 데가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모임 내에 있은 분열에 관한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분열과 나누어짐은 완전히 나쁩니다. 몸된교회는 분열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교회는 완전한 것입니다. 오순절부터 공중재림까지 몸된교회는 언제나 완전합니다. 그 교회는 점과 흠과 어떠한 잘못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된교회의 건축가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과 에베소서 1장에서 3장까지가 이 가르침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란 관점에서 또 한가지 관점밖에 없습니다. 몸된교회에 대하여 지역교회란 것입니다. 또한 여러 모임들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교회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느 지역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다는 의미이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교회라고 불립니다. 각처에 있기 때문에 모임들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모임들이라는 말이 복수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몸된교회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거의 대부분이 지역교회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몸된교회에 대해서는 세군데 정도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지역교회(모임)들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에 쓰여졌습니다. 고린도전서 전체는 지역교회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 지역교회 내에 분열이 있으면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나쁜 짓도 저질러버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의 순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 외에 어려운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소송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끼리 믿지 않는 재판관 앞에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끼리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나면 모임 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실제로 영적인 지식이 있는 장로들이 있다면 이런 문제를 모임 내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쪽이 올바른 마음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빨리 해결해야 하겠죠. 바울은 고린도 교회 사람들의 행동을 이와 같이 다루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1장은 형제자매들이 모일 때에 문제였습니다. 다시 한번 17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했습니다. 이것은 2절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2절에 의하면 바울은 너희를 칭찬하노라 했습니다. 이것은 자매들의 너울과 모임 안의 질서에 대해서 말이죠. 이들이 이 가르침을 잘 지킨 것 같습니다. 그러나 17절부터는 그 질서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처음으로 너희가 모일 때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11 17절부터 14장 마지막까지 모일 때에라는 말이 7번 나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형제자매들이 모임으로 모일 때에 일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떡을 떼기 위해서 모이는 만찬 모임입니다.

두번째는 모임으로 모일 때에 영적인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12,13,14장에는 지역교회에 관련되어서 영적인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내일 저녁에 주님의 뜻이면 12,14장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매운 복잡한 곳이기 때문에 다 볼 수는 없습니다. 말씀집회의 결과로 12,14장을 충분하게 안다면 이것으로 족하겠습니다. 오늘밤은 주의 만찬, 떡 떼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과 어떤 사람들의 생각에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두 사람이 여행을 가서 여행지에 모임이 없으면 두 사람이 떡을 떼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찬은 개인개인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떡 떼는 것은 믿는 자들의 증거 즉 간증의 일부입니다. 이것도 잘 아신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떤 사람이 모임에 전연 출석할 수 없을 정도의 병이 들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 교회의 목회자는 어떻게 합니까? 그 목사는 빵 한 조각과 컵에 포도주를 조금 가지고 그 환자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만찬에 참여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생각은 이러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만찬에 참여하면 영적인 축복을 받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찬의 떡과 잔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찬의 떡과 잔은 어디까지나 떡과 잔인 것입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그 떡과 잔이 실제로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어디까지나 떡과 포도주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 어떤 믿는 사람과 그 모임에서는 이 떡과 잔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떡을 주고 받을 때---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같은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이 빵에는 얼마나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가? 이 포도주에도 무언가 능력이 있겠지! 내가 이것을 받기에는 가치가 없지만 축복이 되겠다고 받는 것입니다. 떡 떼는 만찬집회는 어떤 집회입니까? 전체적으로 봐서 간단한 식사입니다. 그래서 떡 뗌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1세기에는 큰 빵을 가지고 떼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지중해 여러 나라들은 오늘날까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떡을 뗍니다. 함께 먹습니다. 간단한 식사입니다. 어떤 데는 떡하고 포도주만이 나오는 간단한 식사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떡과 포도주 밖에 먹지 못합니다. 옛날 영국에서는 떡과 치즈를 자주 먹었습니다. 물론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저는 이전에 한국사람들이 밥하고 김치만 먹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간단한 식사로 이렇게 먹었죠. 떡 떼는 것, 만찬은 결국 그런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 의하면 주님은 유월절에 떡과 잔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주님을 기억하게 하는 것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말이죠.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이 11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떡 뗌에 관해서 신약성경에는 네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복음서 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의 증인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것을 드시면서 이것을 성립시키셨습니다. 저는 11명의 제자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도 떡에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도 떡 떼기를 원한다면 참여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사복음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식사 도중에 가룟유다는 나가버렸습니다. 복음서를 천천히 잘 살펴보면 만찬이 성립되기 전에 가룟유다가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에 참여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만찬이 성립된 그것에 배반한 자가 참여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죽이는 사람들 편에 서 있는 것이죠. 그 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완전히 모순됩니다.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역시 믿지 않는 자가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이 떡은 그냥 떡이죠. 포도주는 그냥 포도주입니다. 믿지 않는 자가 만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영적인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떡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죽음을 나타내는 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집단적인 모임의 행동의 하나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집단적이 아닌 개인적으로 떡을 떼는 것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 드로아에서 조금 기다렸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그는 떡을 떼기 위해서 6일 동안에 기다렸습니다. 그때에 바울은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믿는 자들과 함께 떡을 떼려고 6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떡을 뗄 수 있다면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왜 배 안에서 떡을 떼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떡을 떼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하는 행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역사적으로 성립이라는 기록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만찬에 관한 것이 여러 번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어서 행해진 기록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더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더해진 사람들은 떡에도 함께 참예했습니다. 다른 특권과 다른 책임에 참여하면서 떡에도 함께 참예했습니다. 사도행전 내에서는 바울은 여러 번 지역교회의 만찬에 참예했습니다. 계속해서 행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도 만찬에 관한 가르침이 조금 나와있습니다. 10장은 가르침적인(교리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만찬에 참예한 자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실제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잔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같은 생명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같은 10장에서 떡이 나옵니다.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매일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에 참예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떡, 여기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가 거기에 참여되어 있습니다. 지역교회에 속하지 않은 형제자매들도 여기에 동참되어 있습니다. 어느 섬에 구원 받은 사람이 혼자 있다 해도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주님의 만찬에 매일 참여할지라도 그 사람은 참된 믿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떡을 뗄 때에 이 사실을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떡과 잔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가 하나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에서는 가능하면 떡 하나와 잔도 하나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곳은 잔이 두 개, 세 개, 혹은 네 개가 있는 데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이것을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마 잔이 몇 개인 것은 인원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이 정도 모임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아마 떡과 잔을 전원이 다 돌아가는데 15분이 안 걸릴 것입니다. 주일날 아침에 우리들이 모이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기도를 듣기 위해서 모입니까? 형제들이 읽어주는 성경을 듣기 위해서 모입니까? 또한 자기 마음 속에 좋은 기분을 갖기 위해서 찬송을 부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떡과 잔에 참예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한 떡을 돌리고 감사한 다음에 한 잔을 조용히 돌리면 주님의 죽으심을 조용히 기억하는데 좋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우리들의 만찬 집회가 너무 시끄럽습니다. 좀 더 조용히 주님을 기억하면서 떡과 잔에 참예하는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형제님들이 성경을 읽지 말라든지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좀 더 천천히 조용히 기억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떡과 잔을 돌리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인원이 늘어나면 플리트우드에서도 잔을 두세개 사용하는데 한 병에서 따르는 것이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 인원이 늘어난다면 개척전도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에 개척전도를 해서 거기서 사람들이 구원받음으로 모임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큰 교회당을 지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모임의 인원이 몇 명 정도가 이상적인지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5천명을 먹이실 때 50명씩 100명씩 앉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모임의 이상적인 인원은 50~100명 정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렇게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50~100명 정도라면 한 떡과 한 잔을 돌리는데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에서는 그렇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네번째는 고린도전서 11장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실행입니다. 1세기 믿는 자들이 어떻게 떡과 잔을 나누었는가를 기록한 모습입니다. 이들이 한 것에는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행하는 자체는 잘못이 아닌데 매 주일마다 모여서 떡을 뗀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계속 행해서 온 것에 대하여 합당하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매주일 하라고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아시는대로 대부분의 교회들이 매주일 떡을 떼지 않습니다. 매주일 떡을 떼는 것은 우리들 모임의 특징입니다. 아마 모임 외에는 매주일 떡을 데는 교회들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목사가 설교한 다음에 서둘러 잠깐 하는 이 정도일 것입니다. 대부분 한 달에 한번 한다든가 몇 개월에 한번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있습니다. 매주 떡을 떼면 그만 그것이 익숙해져서 가치를 모르지 않겠는가? 저는 60년 가량 매 주마다 떡을 떼 왔습니다. 떡을 떼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매주일 떡을 떼는 것을 아주 즐겁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떡을 통해서 교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복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러 방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과 교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첫날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떡에 참예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습니다. 해가 지난다고 해서 그 기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매 주일마다 새로운 생각이 마음 속에 떠오릅니다.

1세기 믿는 자들이 매 주일 떡을 뗐다고 해서 그것을 흉내 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죠.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1장을 상대적으로 생각해보면 1세기 믿는 자들은 매 주일 떡을 뗐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말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주의 만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시록 1장에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여기는 주의 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작은 의미에서 주의 만찬과 주의 날은 같은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주의 무엇 무엇 하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의 날에 주의 만찬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되겠죠. 1세기 믿는 자들이 행했던 대로 말이죠. 고린도 도시의 고린도모임의 잘못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주의 만찬을 사람의 잔치처럼 해버렸습니다. 음식을 많이 준비해 와서 잔치처럼 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믿는 자들은 가난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종들로서 사랑의 잔치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많이 가지고 온 형제 자매들은 이 종의 상태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무시했습니다. 있는 형제자매들이 남은 것을 종으로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주는 것은 나쁘지 않겠죠.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주님의 몸을 떼지 않았습니다. 모두 믿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몸된교회에 모두 속해 있습니다. 또한 같은 지역교회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많이 가져온 사람들은 그들을 구별해버렸습니다. 동류가 아니라는 태도를 취해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주의 만찬을 아주 가볍게 여겨버렸습니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만찬의 목적은 식사가 아니며 교제입니다. 또한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떡을 먼저 가져와서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잔치하려면 집에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집에서 하게 되면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경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말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의 만찬을 가르침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직접 주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바울에게 계시해 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믿고 나서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가량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주님과 가깝게 교제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그릇으로서 쓰임 받는 일에 3년 동안 준비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러가지를 주님께로부터 직접 계시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 중에 하나입니다. 만찬이 성립된 것을 주님께로부터 직접 계시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이 직접 계시해준 대로가 너희들이 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역시 3가지입니다. 기념, 발표, 그리고 기대. 우리는 아주 간단한 식사를 통해서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인간 역사 가운데 최대의 사건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역사상의 사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창조자 자신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죠. 애기로서 주님이 모태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탄생 그 자체가 자연상태였습니다. 태에 들어가신 것도 성령에 의한 기적임에 틀림없습니다. 태에서 자란 것은 여러분과 저의 경험과 똑같은 것입니다. 창조자 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놀라운 일이죠. 우리는 이것을 복음 전할 때 주장하죠. 인간 역사상에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사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33년 동안의 인생의 기간도 생각해 보십시오.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지요. 주 예수님은 죄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죄를 범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완전하게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물론 그 이유로 해서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육체를 취하지 않은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은 영이지요. 죽는 자들은 육체를 가진 자들 뿐입니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면서도 육체를 입으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일이죠. 죽음이라는 피조물은 그 창조자를 늘 속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3일만에 그 죽음의 속박을 풀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셨죠. 하나님 앞에서 육체를 가진 실제적인 인물이 하나 드러나 있습니다. 인성이라는 인성이 하나님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놀라운 일이며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우리들의 복음은 이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이분이 다시 오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머지않아 오시면 인간의 심판자로 오십니다. 좋습니까? 여러분.

만찬은 우리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넓고 넓은 주제입니까? 매 주일마다 새로운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말이죠. 만약 우리가 매 주일마다 똑같은 기도를 한다면 그 원인은 이것입니다. 집에서 조용히 성경을 일고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떡 뗄 때에 조용히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발표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발표하는 가운데 만찬보다 적절한 집회는 없습니다. 매주일 만찬으로 모여서 전 우주를 향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고 발표하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기쁘게 보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주변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해 버립니다. 지하에 있는 사탄과 그 사자들은 이것을 보고 두려워 떱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을 떼러 모일 때에 전 우주에 발표하는 것입니다. 이제 휴가 때에 두 세 사람이 여행가서 거기서 떡을 떼면 안되는 이유를 아셨죠? 이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믿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또한 모임의 책임입니다. 어떤 믿는 자는 처음으로 이 떡을 떼는 자리에 오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제들은 잘 오셨습니다 라고 말하겠지요. 믿는 사람입니까? 예 믿는 사람입니다. 침례 받았습니까? 예 받았습니다. 어느 지역교회에 속해 있습니까? 지역교회에 속해 있다니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저 뒤에 앉아서 우리가 떡 떼는 것을 좀 봐 주시겠습니까? 나중에 모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때는 그 믿는 사람이 아주 화를 냅니다. 이것은 주님의 상이 아닙니까? 나는 주님께 속한 자입니다. 주의 상에 참예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나이가 많고 성경을 많이 알더라도 만찬에 참여할 권리가 없습니다. 거기에 참예할 특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예하는 조건이 들어갑니다. 첫째는 모임에 더해져서 모임의 징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런 것들을 설명을 드렸습니다. 만약 부산 북부모임에 대통령이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겠지요? 주변에 있는 가장 좋은 의자를 가져와서 자리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그 대통령은 떡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그가 믿는 자인지 나는 모릅니다. 실제로 침례를 받았겠습니까? 아마 받지 않았겠죠. 모임의 징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더해진 자가 아닙니다. 그가 대통령이지만 떡에 참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거기에 참예할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지역교회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아시겠죠. 하나님을 대적하는 여러 나라들에서 지역교회가 모여서 주님의 죽으심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이 특권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이 특권에 걸맞게 매일매일 생활이 합당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이런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의 상에 참여한다면 이 세상의 일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쪽 발은 죄많은 세상에 걸쳐놓고 한쪽 발은 주님의 일에 걸쳐놓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건 붙이지 말고 주님의 죽으심을 따라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다. 고맙습니다.

2002 1 28 부산북부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