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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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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주간 동안 제가 한국 모임은 다니는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10 몇 년 만에 한국에 왔습니다만 기쁨으로 한국모임들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40여 년 전이었습니다. 그때는 창원모임이 시작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대는 한국에 모임이 없었습니다. 그대부터 여기저기에서 단순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모임이 생겼기 때문에 좋습니다. 한국에 열 몇번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도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밤과 내일 창원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오늘밤 말씀을 위해서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읽겠습니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라고 하는 큰 도시는 동쪽으로 진출하는 큰 거리 옆에 건설된 도시였습니다. 로마로부터 동쪽으로 가려면 이 거리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에서도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여기는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전도하러 갔던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에서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5~17장 안에 그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17장 근처에 보면 빌립보에서 박해를 받아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되어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이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세 안식일 동안 유대인과 쟁론했다고 했습니다. 3주간 정도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안식일이라는 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회당에 세번 들어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3주간 이상 데살로니가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래 머물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길다 해도 2,3개월 정도였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금방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만큼 큰 소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젊은 믿는 사람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빨리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박해가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젊은 믿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빨리 떠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을 전한 자기 자신이 박해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자신이 내가 빨리 데살로니가를 떠나면 박해가 멈추지 않을까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죠. 박해가 심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난 이후에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돌볼 사람이 없다고 바울은 생각을 했습니다.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지 그들의 믿음생활이 계속되고 있는지 염려되어서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었습니다. 3 1절 근처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갔습니다.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 있다고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 있고 바울이 말한 말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고 이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아무것도 그들에게 강요할 것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서와 갈라디아서와는 다릅니다. 고린도모임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여러 지역교회들은 율법과 은혜를 섞어서 이상한 행동들을 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는 그러한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잘못된 행동도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기에는 사도로서의 인사도 없습니다. 1 1절에 바울과 실루아노로부터의 인사였습니다.

예전에 편지에서는 사도인 바울은 하면서 사도의 권위를 내세웠지만 데살로니가에서는 그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쓰지 않은 편지가 4개 있습니다. 4개의 편지에서 바울이 사도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빌립보서가 그 하나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답장으로 쓴 편지였습니다. 선물을 받고 감사의 답장을 쓰면서 사도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도 자신이 사도라는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분명하지요. 빌레몬서라는 작은 편지는 중재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 친구 빌레몬에게 작은 편지를 썼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골로새서 후편 같은 편지입니다. 그러나 친구인 빌레몬이라는 수신자로 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가지 바램이 있었습니다.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믿음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사는 빌레몬의 종으로서 그 집에서 도망을 친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이제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뭘 훔치고 도망을 갔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도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를 위해서 바울은 중재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바램이었습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에도 사도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편지가 데살로니가 전후서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도 분명합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박해 가운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잘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바울은 사도로서 아무것도 명령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격려의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서를 쓸 때 특히 바울은 천년왕국에 대해서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인들이 더 불평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송사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의 시이저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해서는 이러한 발상은 심한 죄였습니다. 가이사라고 하는 로마 황제는 혼자였습니다. 바울의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왕으로 종종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그와 같이 송사해서 데살로니가에서 쫓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주 말이 되어졌던 것처럼 보입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읽을 때마다 주님의 재림을 자주 말하는구나 하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다섯 장이 있습니다. 후서에는 세 개의 장이 있습니다. 이 여덟 개의 장 속에는 주님의 재림이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 두 서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자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실제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쓴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가르친 가르침에 야무지게 서 있는 것, 거기에 대하여 바울이 기뻐하는 것을 써 보내고 싶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순결한 생활을 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순결한 생활을 사는 격려는 주님의 재림을 통해서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가장 순결한 삶을 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재림에 관한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고치기 위해서 재림에 관한 것을 썼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오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성도들은 재림에 참여할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어떤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믿은 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 중에 일부가 이미 죽은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장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말이라는 것은 신기한 말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는 한번 나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한 자를 가리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던 그 짧은 기간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는 자들이 죽었습니다. 슬퍼하고 있는 믿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살아 있는 우리들은 주님께로 끌려 올라갑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그기에 참여할 수 없겠구나 하고 슬퍼했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제4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과 내일까지 아마 4장까지 못나갈 것 같습니다. 전체를 생각해 보면 4장의 중요함을 여러분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과 내일 밤 두 시간을 통해서 하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자들의 분명한 믿음. 그들과 저희들의 순결한 삶을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1,2장을 오늘과 내일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몇 가지 관점에서 생각을 해봅시다. 틀림없이 전서 다섯 개 장 안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각각 나오고 있습니다.

1장의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어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하늘로서 오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심판으로부터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매일매일 순종한다면 죄의 힘으로부터 매일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공중에 오실 때 우리를 끌어올리셔서 우리의 구원은 완성이 됩니다. 이것이 제 1장의 관계입니다.

2장의 재림은 우리들의 봉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봉사와 관련되어서 재림이 2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하나님을 섬긴 종들은 그들의 섬김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큰 기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3장에는 믿는 자들의 성별과 관련되어 주님의 재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성별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 자신의 완전한 목적을 위해서 성별해 주십니다.

4장에서의 재림과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슬픔의 위로라는 관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죽은 성도들을 인해서 슬퍼했습니다. 역시 그리스도인들도 친척이나 친구들이 죽게 되면 슬퍼합니다. 제가 믿고 나서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들이 죽게 되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믿는 자로서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눈물이 더욱 있는 것입니다. 4장에 의할 것 같으면 믿지 않는 자와 같은 그러한 슬픔은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친구가 죽으면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물론 다시 만난다는 소망이 없는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우리들도 머지않아 그들이 있는 데로 간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공중에 오시게 되면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올라가게 됩니다. 살아있는 자도 몸이 변해서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맞으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의 슬픔은 소망이 없는 슬픔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했습니다. 그것이 4장인 것입니다.

5장에 주님의 재림은 믿는 자들의 안정과 관련된 것입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영과 혼과 몸이 잘 보존 되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들도 동일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은 보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님의 재림과의 관계가 분명해졌습니다.

또 한가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1장에는 데살로니가 믿는 자들이 누구를 믿었느냐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죠.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2,3장에서는 그들이 무엇을 믿었느냐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또한 3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4,5장에는 그들이 어떻게 믿었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단순하게 믿었다. 단순하게 믿었다는 말을 사용하면 어떤 뜻이 됩니까?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믿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순전한 아이가 자기 어머니 아버지의 말을 믿는 것과 같이 말이죠. 어린 아이들은 약속을 하게 되면 그대로 믿습니다. 아무리 불가능한 약속이라도 말이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약속해야 할 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아이들이 큰 실망을 하지 않도록 말이죠. 이것은 아이들의 믿음의 책임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한 잘못인 것이죠. 아이들은 순전하게 믿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믿는 자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누구를 믿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어떻게 믿었습니까? 순전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 제 1장의 내용을 조금 생각을 해 봅시다. 1 1~4절까지는 바울이 과거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4절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언제 택함은 받았습니까? 물론 창세전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죠. 5~8절까지는 현재의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의 믿는 사람들의 전도에 관한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이들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말씀을 모두 전했다. 그들의 현재의 일이었습니다. 9,10절에서는 미래에 관해서 기록했습니다. 미래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봅시다.

1절에 나오는 데살로니가의 모임의 타이틀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이 모임은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라고 성경에서 불립니다. 어떤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말합니다. 모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서는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경고의 말을 쓰곤 했습니다. 장로들이 무리를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 무리가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리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사도행전 20장에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라고 권면했습니다. 목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 피를 가지고 그 교회를 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말을 쓸 때는 어떤 의미가 됩니까? 모임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임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독재자로서 절대자로서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민주주의가 절대로 역사할 수 없습니다. 민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중요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가장 나이 많으신 분부터 가장 어린 자까지 모두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시에는 이러한 본질을 가진 한 단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모였는지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모이는 곳에서 멀리 가지 않아 우상숭배하는 곳이 있었겠지요. 때때로 축제 할 때에 사람들이 우상숭배하는 곳으로 모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거짓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것이 크던 작던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바라며 모인다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복을 바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임을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2,3절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성도들의 이름을 많이 모릅니다만 제가 기도할 때마다 한국과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북한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십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러시아와 헝가리, 불가리아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10년 전만 해도 그들이 공산치하의 압박에서 풀려난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죠. 러시아에 일어난 그 일이 극동에 있는 나라들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국과 북한이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북한에 있는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적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0년 전에 평양을 갔다 왔습니다. 저는 그 평양에서 믿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야기에 의하면 북조선이 만든 교회에는 만명 정도가 모인다고 합니다. 북조선교회가 참된 복음을 전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참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겠죠. 아마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전도를 위해서 문을 열수가 있으십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한국정부의 고관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있는 것처럼 영적으로 안정된 삶을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한국에서 전도가 계속 되도록 고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들의 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2절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복음의 수고도 기억했습니다. 여기는 세가지 말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믿은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수고는 현재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을 말하겠죠. 소망의 인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말하겠죠. 바울은 쉬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이 세가지를 가지고 그들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었다는 증거는 이 3절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고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님 안에서 택함은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믿는 자라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택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마치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해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는 자가 구원받기 위해서 택함 받았다면 그 반대편에 어떤 사람들은 멸망 받기 위해서 택함 받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들의 복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럼 멸망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는 모든 인류가 멸망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죄인된 아담과 관계되어 있는 우리들은 모두 멸망 받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죄의 성질, 그 행동에 합당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들은 모두 멸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 한국에서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한국 전역에 그렇게 많은 교회가 있는데 TV프로그램이 있고 라디오 방송이 계속 되고 있는데도 한국에서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이것은 그들이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3절 첫번째 조건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역사. 역시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구원받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증명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멸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로 말미암아 믿은 사람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너무너무 간단한 실 예가 하나 있습니다. 구원은 큰 문과 같습니다. 그 문 위에 이러한 것이 적혀 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어와도 좋다. 물론 이것은 우리들의 복음이며 누구나 들어와도 좋은 것입니다. 그들이 그 문을 들어와서 되돌아보니까 무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같은 문 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함을 받았노라. 하나님의 택함은 믿는 자들의 관계뿐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은 멸망 받는 사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것을 잘 증거했습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 바로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4절까지 바울은 과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5~8절까지는 그들의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들어간 종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말은 능력의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죠. 들은 사람들은 듣는 즉시로 큰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전한 그 말을 틀림없다고 확신하며 믿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확신을 가졌습니까? 바울과 실라의 삶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에 사는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은 달랐습니다. 그 당시 철학자들, 선생들, 학자들은 논()을 가지고 서로 논쟁을 했습니다. 자기의 제자들을 만들고 싶다. 제자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기뻐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삶은 진지했습니다. 거짓된 목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바로 이 사람들이다라고 알았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기독교계 안에 있는 목사나 전도자들이 바로 그러합니까?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까?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한국사정을 그렇게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일본에서는 이주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기독교 방송이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는 다릅니다. 제가 캐나다나 미국에 돌아가게 되면 종종 운전하면서 기독교계 방송을 듣습니다. 여러 곳에 기독교 전문 방송이 있습니다. 24시간 방송합니다. 30, 1시간 단위로 변경합니다. 대부분입니다만 방송과 TV에서 그들이 돈을 모금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만약 여러분들이 원조 하지 않으면 이 방송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내보냅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한 원칙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한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반드시 돕는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들이 방송에서 말한 그대로 돈이 안들어 오면 방송을 그만 두어야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본어로 돌아가면 라디오를 때때로 듣습니다. 제가 일본인인 것처럼 캐나다에 간다면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아 기독교라는 것은 모금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겠죠.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거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산은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만 의지 한다면 부족할 때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하는 생각이 소위 말하는 교회에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때로 모임에서도 그러한 방식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때때로 모임에서도 돈을 모으기 위해서 편지를 보내는 데가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편지를 받으면 제가 놀랍게 처리하는 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쓰레기통입니다. 물론 제가 아무런 답장도 보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종은 그 성질과 삶의 순결함을 복음을 통해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도자는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자기의 순결한 삶을 통해서 장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실라는 그들이 전한 복음을 그들의 삶을 통해서 장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5절에 나온 것입니다.

2장에서는 바울은 이것을 좀 구체적으로 썼습니다만 6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의 삶을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본을 받았습니다. 6절에 보면 그들이 바울과 실라의 제자처럼 됐습니다. 본을 받는다는 의미는 이런 의미입니다. 흉내를 내는 사람이 됐다. 그들이 바울을 보고 바울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됐다. 이것은 좋습니다. 우리들의 모임에서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흉내를 내 준다면 복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을 흉내 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임의 천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여기 서서 복음을 잘 전해도 말씀을 잘 전하는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본을 그 삶 속에서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그들의 본을 따를 수가 있겠죠. 6절에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많은 환난가운데서 이 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7절에 가니까 마게도냐,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본이라는 말도 재미있습니다. ()이라는 말이죠. 플라스틱이 녹아 있을 때 틀에다가 부으면 모양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바로 그러한 모형의 틀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다른 지역의 성도들에게 본이 된 것을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어쨌던 데살로니가의 믿는 사람들은 모본이 되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들로부터 말씀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치 나팔을 부는 자와 같이 말이죠. 넓은 방면으로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그들이 연극 같은 것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기저기에 복음찬송을 하고 다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사자로서 말이죠. 이미 이긴 적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적군을 향해 쳐들어간 것처럼 말이죠. 2000년 전에 말이죠. 그 적군의 힘을 십자가의 힘으로 부숴버렸습니다. 이번에는 평화조약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평화조약의 조건을 전하는 하나님의 대리 대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연극이나 노래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평양에서 평화대사로 서울로 온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평양에서 연극을 가지고 서울에서 하지 않겠죠. 목소리가 좋은 사람을 데려와서 평화의 조건으로 노래를 부르게 합니까? 엄숙한 복장을 하고 남한의 높은 사람에게 그 조약의 조건을 제시하겠죠?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어쨌던 그들은 모든 믿는 자의 모본이 되었습니다. 모든 곳에서 이 복음을 크게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현재의 일이었습니다.

9,10절은 그들의 미래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그들은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었을 때에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결과입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우상의 점 같은 것을 했습니까? 우상을 열심히 믿거나 또는 두려워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은 뒤에 얼마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졌습니까?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죠. 그들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상 섬기는데 전혀 가지 않습니다. 매일 생활에서 우상에 대한 두려움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들의 믿음의 결과를 보는 것이죠. 물론 그 믿음에는 소망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죠. 믿는 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가장 기쁜 것이기도 하죠. 우리들은 미래에 대한 살아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은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그분은 우리들의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이 데살로니가전서에 의하면 우리들의 구원의 주님은 머지않아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우리들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뒤를 따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수록 더욱 그렇게 하십시다. 고맙습니다.

2002130 창원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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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