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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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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은사들

짐 커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산 방문이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부산 성도들로부터 많은 친절을 받아서 감사를 드립니다. 복된 교제도 주어졌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저의 특권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덕스러움을 입는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앞으로 한국에 계신 분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부산에 와서 저희들이 고린도전서를 보아 왔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서 12장을 보겠습니다. 좀 길지만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읽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13,14장까지 읽는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요. 오늘밤은 12장에만 한정되겠습니다. 11~14장은 고린도전서의 한 구분입니다. 처음으로 12장을 읽겠습니다.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처음 네 장에서는 바울은 하나님의 종인 것을 말했습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종을 가지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 종들은 사역자들입니다. 그들의 일은 여러가지이겠지요.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하나입니다. 한 종이 다른 종보다 특별히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5,6장에서는 도적적인 것을 말했습니다. 7장에서는 결혼문제에 관해서도 말했습니다. 9장은 조금 다르겠지만 8~10장에는 고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1~15장까지는 믿는 자들의 모임 즉 집회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집회에 대해서 종들의 봉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6장에서는 마지막 인사가 있습니다만 바울은 거기서 헌금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미 교제해드린 말씀을 통해서 고린도전서는 아주 실행적인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12~14장까지는 교회가 받은 일 즉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분은 고린도교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7 1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해여 라고 했습니다. 8 1절에도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그들이 바울에게 질문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12 1절에도 동일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신령한 것, 즉 영적인 은사에 대해서 질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여러분 성경에는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영어 킹제임스 번역보다도 한국 개역번역이 올바른 것 같습니다.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만 여기는 은사 자체보다도 신령한 것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임에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일과 봉사를 나타냅니다. 12장에는 은사라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장에는 그 은사의 힘, 능력이 나와 있습니다. 14장에서는 그 은사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12장에서는 기계가 설치되었습니다. 어떤 기계가 있겠습니까? 12장에서는 이것이 확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장에서는 기계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13장은 움직이는 기계에 친 기름입니다. 13장에 의하면 사랑이 없으면 그러한 은사들은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다른 한가지를 생각해 봐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4장에는 은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네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교사와 목자. 여기는 사도와 선지자가 은사로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또한 교사와 복음전하는 자도 주어졌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기초 토대와 관련되는 은사입니다. 지금은 사도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도의 실제적인 조건 중에 하나는 육안으로 예수님을 실제로 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9장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시도직이 올바르다고 말하면서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선지자도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반드시 감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정을 그 당시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되어졌습니다. 먼 미래에 올 그러한 내용이 아니고 말이죠.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그 사정을 인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주어진 말씀을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할 리가 없습니다. 유다서에 의하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에 추가될 계시를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은사는 사도가 교회에 주어진 은사였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사람을 교회 은사로 주었지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은사를 주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예언을 가지고 말씀을 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은사였습니다. 또한 방언을 통역하면서, 병고치는 은사, 이러한 은사들이 사람을 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주어진 은사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두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12 3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자들에게 이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두번째 목적은 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은사는 받은 사람 자신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믿는 자 가운데서 높임을 받으시고 믿는 자들이 덕세움을 입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능력들은 이러한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성적으로 태어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교회에 덕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성적인 것을 가지고 태어난 이러한 것들은 교회에 덕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장에 보면 각가지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여기는 한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은사는 여러가지죠. 그러나 일치되어서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일치 속에는 은사의 역할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믿기 전에 그들 속에 어떠한 영이 역사했는가를 지적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넘어갔던 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3절에 의하면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양한 은사가 같은 성령으로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6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6절에 의하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성령이 이런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이 이것을 또한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가지지만 한 목적을 가지고 역사하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8~11절까지 이 은사의 목록이 있습니다. 다음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8~11절까지 기록된 은사는 전부다 기적적인 은사들입니다. 이 은사들은 전부다 일시적인 은사들입니다. 8절에 보면 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럼 오늘날에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없습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의한 것이죠. 다른 말로 말하면 그것은 성경으로 주어진 것이지 은사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없는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주어진 말씀이 적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정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지식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에 따르는데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지혜의 말씀도 필요했습니다. 특별한 사정 때문에 지혜의 말씀이 주어지고 지식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같은 성령으로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병고치는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기적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마치 병고치는 은사와 같이 말이죠. 병고치는 은사에 대해서 카리스마적인 사람들과 카리스마적인 사람들에게 속기 쉬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병자들이 나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나았다면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그런 기적적인 나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4,5장에서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된 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데서 행해졌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병고치는 은사가 활용이 된다면 동일하게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방언의 은사가 있다면 홍형제의 통역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아마 긴 이야기는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한국어를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어도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죠.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사람들은 시골 출신인데 외국어로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태어난 나라의 방언으로 들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습니다. 마치 런던에서 한국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여러분이 런던에 왔을 때 그 사람이 한국어로 말씀을 전하는 것과 똑 같은 현상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을 향해 당신은 어디서 한국어를 배웠습니까하고 묻겠지요?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국어를 전혀 모릅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사도행전 2장은 마치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말이 다른 외국인을 통해 너희들에게 말할 것이지만 너희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스라엘을 선민으로서 버리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그들에게 결국 표적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그러했습니다. 고린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날 본 것 같이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있는 시민들은 이와 같이 세가지로 나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말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외국인들을 통해서 거기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 특히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기적적인 은사였습니다. 13장에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카리스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늘 인간이 사용하는 외국어로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천사의 말도 합니다. 이 자리에서 누가 천사의 말을 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표적이 되겠습니까? 아무도 천사의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3 1절의 말은 뜻은 무엇입니까? 만약에 사람의 방언을 말할지라도 더구나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의 소리에 불과하다. 이것은 가정을 말하는 것이지 천사의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나라의 외국어(방언)를 말한다면 훌륭하겠지요. 천사의 말을 만약 한다면 그것은 더욱 훌륭하겠죠.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이것이 바울이 실제 말하고자 하는 의미였습니다. 고린도 모임에는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할 희망의 기대가 없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말할 때는 늘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의 말이 따로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들은 그것을 성취할 것입니다. 다니엘 그리고 마리아 요셉에게 보인 천사들은 그들이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분명히 사람의 말로 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그것도 기적적으로 주어진 그 당시 여러 나라의 말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외국어로 말한다면 여러분들이 들어도 모르죠. 모임에 있는 수명의 사람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들어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임 안에서는 덕 세울 수 없는 것들을 해서는 안됩니다. 모임이 받은 활동들은 모임의 덕을 위해서 쓰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도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통역자였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외국어가 어떤 것인지 그 자신이 잘 몰랐습니다. 어쩌면 방언 말하는 그 말을 전혀 몰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서 이것을 올바르게 설명을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오늘날 카리스마 교회에서 이러한 것들이 행해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과 부산에서 방언을 말한다면 이것은 천사의 말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을 합니다. 이것이 무슨 덕이 됩니까? 아무도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덕이 안되는 것입니다. 통역자가 없고 아무도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그것을 시험해 볼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전혀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12장의 원칙에 반대인 것입니다.

12장의 전체의 근본적인 원칙은 모임의 덕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성령으로 이 기적적인 은사가 주어졌다. 그리고 12절에 의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전날 말씀드렸습니다만 12장의 말하는 몸은 육체의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몸은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한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더해지기 위해서 침례를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13절에 의하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물로 받는 침례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순절 날에 일어났던 세례입니다. 승천하신 주님께서 보내셔서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때까지는 믿는 사람들이 각각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에 그리스도의 몸된교회가 출생했습니다. 교회의 생일인 것입니다. 그때부터 믿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된교회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에 한번만 행해졌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그 순간에 오순절 날에 주어진 것이 바로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단체적인 복이 믿는 그 순간에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믿고 단체 된 몸에 더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카리스마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믿고 나서 성령세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이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갈보리 그 사건으로 다시 한번 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일의 완성의 결과로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마치 주님의 십자가가 한번 행하여 이루어졌던 것처럼 성령의 세례도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 받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믿는 순간에 성령의 역사로 몸된교회에 바로 더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몸된교회의 모든 복들은 믿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았고 한 성령을 마시게 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는 개인개인이 믿을 때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14절부터 27절까지 바울은 지금까지의 원칙을 실 예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27절까지의 긴 구분은 실 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실 예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몸에는 지체가 하나뿐이 아닙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지체는 많습니다. 몸에서 손이 발보고 너는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말하면 이상하지요? 만약 귀가 눈보고 나는 눈의 기능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 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만약 몸에 눈이라는 한 지체만 있다면 어떻게 듣습니까? 지체 하나가 몸 전체라면 다른 지체는 어떻게 되며 무슨 일을 합니까? 유감스럽지만 어떤 교회들에서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목사는 그 교회 선생처럼 보이기도 하고 교회의 귀 같아 보이기도 하고 눈도 되고, 교회의 손과 발 같기도 합니다. 교회의 여러 일들을 그 목사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하나님의 교회는 한 지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동일한 원칙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그래서 눈은 손보고 너는 필요 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머리가 발보고 너는 전연 필요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체가 있을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지체가 보이는 지체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여기 서서 말씀을 잘 전하는 지체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하지요. 그러나 집에서 모임을 위해서 늘 조용히 기도하는 자매님을 향해 당신 필요 없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기 서는 사람이 눈에 잘 띄기에 참으로 머리 같습니다. 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자매님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손이 머리처럼 보이는 사람보다 안 보이는 그 사람이 중요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어떤 지체는 아주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더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몸의 지체입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중요한 지체라는 것이 있겠지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지체도 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아주 아름답게 보입니다. 어떤 것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하나입니다. 이 지체 모두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임에서 아주 연약한 지체도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있다면 아주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하게 순종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환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어떤 사람들을 모임의 지체로 환영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면, 잘못된 활동을 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지체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25절은 또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몸 가운데서는 분쟁이 없고. 여러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모임에 관한 것입니다. 지역교회를 말하는데 몸을 가지고 실 예로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왼손이 만약에 기능을 못한다면 가능하면 오른손이 기능을 담당하겠지요. 몸의 지체들은 이와 같이 서로서로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그것을 느낍니다. 몸이 편해지면 전 지체가 편해지는 것입니다. 26절까지 말이죠.

27절은 그 실 예를 적용시킨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물론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몸된교회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교회에서 서로서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여러가지 사람들을 교회의 덕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사도입니다. 두번째는 선지자입니다. 세번째는 교사입니다. 여기는 복음 전하는 전도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 활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입니다. 예를 들어서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당시에는 실제로 기적적인 것이었습니다만 오늘날에는 정말로 돕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스리는 것도 있습니다. 또한 각종 방언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도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선지자이겠습니까? 다 교사이겠습니까?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습니까?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습니까?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사람입니까? 다 통역을 하는 자이겠습니까? 물론 이 전체의 당연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그러나 카리스마 활동하는 교회의 요구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면 반드시 방언으로 말해야 됩니다. 다른 은사보다 이것이 아주 소중히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실제로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아는 것은 방언을 말하는 것을 가지고 테스터 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모든 믿는 자가 방언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 은사를 가질 리가 없습니다. 마치 몸은 하나인데 지체가 많은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인데 은사는 여러가지입니다.

12, 13장은 그 당시의 주어진 은사에 관한 것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은사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동일한 원칙을 오늘날 하나님의 지역교회에서도 이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여기서 은사가 기능하고 있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며 그리고 지역모임 전체가 덕세움을 입기 위해서 말이죠. 형제님들이여! 충고를 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형제님들의 교제가 성도들에게 덕이 안되면 그 교제를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덕이 되는 말씀이 나올 때가지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저의 말씀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자기의 가르침과 자기의 봉사를 스스로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입니다만 예언하는 사람이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우리가 전하는 말씀과 복음을 듣는 형제자매들이 분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봉사에 참여한다면 모임의 덕을 위해서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각가지 은사가 있지만은 목적은 그것입니다. 그럼 31절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더욱 더 모임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큰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이 은사로 말미암아 형제자매들이 덕 세움을 입겠지요. 다시 형제 자매들께 말씀드리는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임에 덕세움을 위해서 고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랫동안 인내를 가지고 성경을 잘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잘 조사해 본 다음에 먼저 자기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고서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제일 좋은 길은 무엇입니까? 물론 13장 내용입니다. 어떤 은사든지 간에 사랑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그 은사는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천사의 말처럼 그렇게 말을 잘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입니다. 소리뿐인 것입니다. 모든 지식을 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0인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해서 내어주고 자기 몸을 순교자로서 불태운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울은 13장 속에서 사랑의 속성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13절에 기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큰 것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2장에는 은사라고 하는 기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4장에서는 그 은사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없으면 안되는 13장은 그 기계의 기름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각가지 은사가 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공적으로 쓰임 받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공적으로 쓰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간에 돌보기 위해서 서로간에 덕을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다. 여러분 열심히 들어주신 것을 인해 제가 즐겁습니다. 고맙습니다.

2002 1 29 부산북부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