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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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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종들의 섬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경남 창원에 있는 모임의 방문이 짧은 기간에 끝나버렸습니다. 어제와 오늘 창원에 있는 성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저에게 성취되었습니다. 제가 나그네인데 여러분들이 저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사랑의 수고를 잊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머지않아 오는 그 날에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종에 관해서 지금부터 드리는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덕을 세운다면 좋겠습니다. 어제 말씀에 이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생각해 보실까요? 이번에는 제 2장입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오늘밤 말씀은 1 5절에 의합니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의거해서 우리가 2장을 보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전심 사역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목적이기도 하고 주제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주님의 재림에 관련된다고 생각하는 편지입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아신바와 같이 그렇습니다. 이 편지에는 주님의 재림을 자주 다룹니다. 바울은 세가지 이유를 가지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 세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주님의 재림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이 믿는 사람들이 핍박이 있었지만 분명하게 믿었기 때문에 바울이 기뻐했습니다. 이 기쁨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편지를 섰습니다. 믿는 자들은 더욱 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쳤습니다. 그 분명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바울은 권면하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세번째는 그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서 썼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기에 재림에 관해서 잘못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고의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바울이 재림에 관해 말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생각대로 잘못 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 주님의 재림과 관계되어서 성도들이 소망의 힘을 갖도록 말했습니다. 늘 주님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힘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라가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특히 주님의 종들에게 힘을 북돋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 된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더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게 되면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 상급을 위해서도 주님을 섬기게 되겠지요.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되어서 더 순결한 삶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생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소망이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4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로 갔고 그리고 가족들을 이 땅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소망이 없기 때문에 슬퍼합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살아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믿는 자들의 죽음을 잠잔다고 때때로 표현합니다. 믿는 자가 죽게 되면 주님 안에서 몸만 죽는 것이죠. 몸은 무덤 속에서 자고 있습니다. 물론 영혼은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지상에 있는 것보다도 훨씬 좋은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은 늘 몸과 관련된 것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혼은 부활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부활을 황천에서 돌아온다고 말하는데 그런 말인지 모르겠지만 황천에서 돌아오는 것보다도 잠자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은 몸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몸이 황천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황천을 무덤을 가리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은 반드시 부활합니다. 살아있는 성도들과 만나서 주님을 맞으러 갑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 매우 복된 날입니다. 우리들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5장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규모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데살로니가 믿는 자들에게 이러한 생각들이 유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돌아오시겠죠. 주님이 곧 오신다면 사업 같은 것으로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곧 오시니까 일을 하지 맙시다. 아무 장사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열심히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생각은 좋은 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때때로 여러 나라에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다음 달에 주님이 재림을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다음달 20일에 주님이 재림하신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오늘 산으로 갑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재산을 싸게 팔아버린 적도 있습니다. 주님이 금방 오시면 집도 자동차도 필요 없겠지요. 한국과 미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데살로니가 이 도시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일하지 않죠. 임금도 받지 않죠. 안 먹으면 안되죠. 성도 집에 가서 먹을 맘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엄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전혀 일하지 않고 성도 집을 전전하는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전도를 위해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천거된 사람들은 다릅니다. 형제자매들로부터 모임에서 천거를 받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신용할 수 없으면 절대로 천거서를 쓰지 않습니다. 신용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사람들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저에게 커리형제 이렇게 하십시오 이렇게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내일 커리씨 당신 뭐하실 것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형제님들이 저 같은 자를 신용해 주시는 것이죠. 형제님들이 커리형제는 시간과 힘이 있으면 말씀과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다고 믿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용입니다. 이 신용을 두고 내가 죄를 범해버리면 큰일입니다. 오늘밤 말씀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어던 사람이었는가를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종이 말씀 전하러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규모없이 행하며 폐를 끼치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천거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에 정한대로 나아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천거를 받았느냐고 물으면 천거받은 모임이 없습니다. 아마 모임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자기 가정에서 몇 명이 모이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디모데는 더베와 루스드라 두 곳에서 천거를 받았습니다. 천거를 할 때 두 세 모임이 천거를 하면 어떤 일을 미리 예비하기 위해서 좋은 듯 합니다. 이번에 일본에 전도하러 온 형제가 있는데 그 형제와 이야기할 때 좀 놀립니다. 그 형제 이름은 페어필트라는 형제인데 최근에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선생이라 불리어도 좋습니다. 아주 평판이 좋은 대학에서 경제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몇 년 동안 부인과 자녀가 있는데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일본으로 왔습니다. 제가 그를 놀리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여섯 모임이 그를 천거했습니다. 그 부인의 일로 몇 모임과 관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러 모임이 그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합당하다고 분별을 했고 천거를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놀리기를 당신은 천거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디모데는 두 모임에서 천거를 받았는데 당신은 여섯 모임에서 천거를 받았네. 아마 그가 좋은 종이 되지 않으면 이상하겠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복음과 말씀을 전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모임과 다른 모임에 천거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신용이 필요한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천거된 일군에게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어느 어느 형제네 집을 방문했습니다라고 어쩌면 대답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상 무엇을 했습니까? 밥을 먹었지요라고 대답할 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떠한 사람인지 잘 기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는 그러한 것들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말씀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한번 조사해 보십시다. 2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전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근본이라는 것을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복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여러분 형제님들 복음을 전할 때 그처럼 강하게 확신하면서 전하고 있습니까?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입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것은 마치 평화조약을 맺으러 가는 대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정할 때 하나님의 대사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절에 복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과 바울을 천거한 사람들에게 복음전할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보면 우리가 전할 말과 발표할 내용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의 뜻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소문인 것이죠. 제가 어릴 적에 2차대전이 끝난 직후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신문들이 호외지를 배포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라는 큰 호외지였습니다. 전국에서 아주 큰 기쁨이 넘쳤겠지요. 사람들은 길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기쁜 나머지 악수를 하며 껴안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복음은 동일한 결과를 일으켜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악을 부쉈다. 실제 승리하셔서 하늘에 승천하셨다. 우리는 모두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복음입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메시지인 복음이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와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권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듣는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명령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는 믿는 말과 순종한다는 말이 동의어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전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밤에 참석하신 여러분이 이것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의 말씀도 옳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정말로 복음을 믿는 다면 행위로 이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나타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의 행함으로 나에게 믿음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내 행위로 너희에게 믿음을 보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죄가운데 거하는 그 사람은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의 행위로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3 2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복음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 1장에도 동일한 것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형제님들이여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오래 전에 영어로 출판된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책 제목은 66권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책이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66권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전체에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의 주제는 실제로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의 경험이 복음이 아닙니다. 또한 어제 읽은 재미있는 신문기사가 복음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 경험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실 예로서 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것들이 실 예로서 사용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실 예라는 것은 건물에 바로 앞에 있는 문입니다. 이것은 문이 아니고 창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건물안에 빛을 비추는 창문과 같은 실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복음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시는 분들은 그리스도를 잘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잘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1 5절에서는 바울은 우리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서 자기 복음으로 만들었습니까? 물론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것으로, 이것에 순종하여 걸어갔습니다. 복음을 전부 자기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데 이것을 나에게 적용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도한 큰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가 분명해졌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것들이 분명해졌습니까? 어제도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 대사되는 즉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을 통해서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만큼 말씀을 전하는 자의 생활의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나 여기 서서 복음을 전할 권리가 없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평상시에 복음으로 장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2 10절에 이것은 종에게 쓴 말씀입니다만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을 시켜야 합니다. 또한 특히 하나님의 종에게 적용을 시켜야 합니다. 10절 후반입니다.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adorn, 장식함이라)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행동을 통해서 그 복음을 빛나게(장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까? 물론 바울의 교훈을 받고 그것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바울의 교훈의 목적이었습니다. 결국 성령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큰 짐의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말씀을 가지고도 그랬고 자기들의 생활 행위에서도 그랬던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그들 자신을 장식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와 같습니다. 종이 말씀을 전하는 것만큼 평상시의 생활이 중요합니다. 매일 생활에서 복음으로 장식되지 않는다면 여기 서서 말씀을 전할 힘과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2장에서 종들은 실제로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 1,2절에 의하면 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로 오기 전에 빌립보에서 그들은 아주 무례한 일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6장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고난을 당했는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채찍으로 등을 맞았습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여기저기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등은 매우 아팠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빌립보에서 받은 그러한 어려움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있어도 담대하게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고난은 분명했습니다. 3~5절까지 그들의 성질이 또한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아무런 거짓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부탁을 받은 자로서 부탁 받은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질투라든가 자기의 위선을 가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5절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도로서 믿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을 터이지만 그러나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짐을 지우지 않기로 애썼습니다. 종들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마음이 없으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의 예를 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만 제가 일본으로 전도 왔을 때 처음에 6개월 동안 회사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외국에서 오는 원조로는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형제들이나 외국형제들도 제가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모릅니다. 만약에 종이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그 종을 천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지 않기 위해서 형제자매들로부터 천거를 받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닮아야 합니다. 그는 분명하게 정직한 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내가 너희들의 가진 것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너희들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물건을 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원했습니다.

4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부탁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책임을 부탁 받은 것이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부탁의 조건에 충성스러웠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탁한 조건을 그대로 성취시켜야 합니다. 부탁의 조건을 변경시키자, 바꾸자 이런 생각은 좋지 않습니다. 복음전할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부탁한 분의 조건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7절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사심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자기의 귀여운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말이죠.

8절에 보면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만 전해 줄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의 것을 맡겼습니다. 수고, 고통, 이러한 고난들이 그들을 위해 있었습니다. 복음을 그거 말하는 선생처럼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는대로 대학 선생들은 강연을 자주합니다. 그러나 대학 선생들은 학생들의 상태에 대해서 별로 염려하거나 고통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쳐서 성적이 좋건 나쁘건 학생책임이라고 합니다. 어떤 선생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강연이라는 말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문서적을 조사해와서 하는 강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부탁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자기 혼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그들의 매일의 생활은 거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책망할 수 없었습니다. 17절까지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를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가 적어지게 하려고 바울이 이 도시를 빨리 떠났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도망간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서 빨리 이 성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해서 또한 그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바울은 슬퍼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헤어지면 동일한 마음을 가지게 되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외국으로 가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슬픈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형제 사랑에 의한 것이죠.

그러나 19절에는 머지 않아 주님이 오시겠죠. 그때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랑의 면류관이 되겠죠. 이로 말미암아 바울은 미래를 생각해서 마음이 만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종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힘있는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가르침이 거짓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기가 전하고 있는 말씀에 모본처럼 행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권면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자기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어떠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투명이라는 말을 씁니다만 바울과 실라는 감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말씀대로 행동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천거받는 사람이 될 수는 없겠죠. 우리 모두는 공적으로 섬기는 종이 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바울과 실라를 본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렇게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2002 1 31 창원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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