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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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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26. 22:10 말씀 안으로

그리스도의 속죄(2)

복음서와 히브리서에서

존 스텁스

복음서를 주의깊게 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기록 가운데 그리스도의 죽음이 강조되어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각기 우리 주님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일주일의 사건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동일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건들은 한 복음서에서는 발견되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엄숙한 일주일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서는 네 복음서들이 한결같이 삼분의 일 가량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복음서 기자들의 마음에 크게 부각되었고, 그들 각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구속의 희생의 사실과 의미를 증거하기 위해 붓을 들도록 했다는 사실을 보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이 극히 중요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친히 계시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 사실들에 우리의 설명을 국한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호소할 그보다 더 높은 권위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복음서 가운데서 친히 말씀하신, 그분의 죽음에 관한 몇몇 분명한 예언적인 언급들을 선정하여 그 중요한 순서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그 행위에 있어 대리적인 것이 될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에서 우리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면 그분이 오신 목적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시편 49:7에서,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임을 알게 되는데, 실로 아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대리적인 죽음을 통해서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리적인 성격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분께서 인간의 위치에 서셨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담당하신 형벌은 그분 자신의 생애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모든 죄와 실패에 관련되어 서셨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전치사 위하여는 원어상 안티로서 이것은 모든 건전한 성경 학도들이 한가지로 대리”(substitution)의 개념으로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구속”(“루트론”)이란 단어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지불된 속전으로서, 죽음으로 포기된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해줍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속은 무엇에 의존할까요? 그것은 구주께서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에 의존합니다.

우리 주님은 만찬 예식의 제정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그분의 피가 죄를 없이하기 위해 흘려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6:28). 오직 누가만 주님께서 그분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 될 것을 암시하시는 대목을 기록했습니다( 22:19,20). 이 모든 사실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연한 것이거나 하나의 순교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필수적인 요소였음을 입증해 줍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그 성취에 있어 필연적일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가오는 주님의 죽음의 순간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대목마다 ····되어야 하리라”(must)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절대 필연성에 대해서 강조하신 말씀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16:21, 13:33, 22:37, 24:7, 3:14). 이것은 어떤 일도 주 예수님에게 불시에 닥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분은 자신에게는 완수할 사명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생존 경쟁을 위해서 태어나지만 주 예수님은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3:14에서 구주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분의 출생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분의 광야 시험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분의 놀라운 기적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분의 겟세마네에서의 고민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는 뱀이 높이 들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멸망으로 가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갈보리에 가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하신 또 한 구절로 누가복음 22:37을 들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여기서 주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셨는데 이것은 복음서 기록 가운데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유일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 놀라운 장에 나오는 다른 모든 말씀들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장 전체가 고난 받는 메시아 종을 가리킨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 53장이 성취되고 주님께서 그렇게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 때문입니다. 일단 인간이 죄의 모든 심각성을 깨닫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연성이란 문제는 자연 이해가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그 드림에 있어 자원적일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8에서 주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에 관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자원함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1:14). 그리고 그분은 자원함으로 세상을 떠나가셨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내보내셨다(delivered up)”( 19:30-J.N.D.) 우리의 복스런 주님은 죽음에 대해 어떤 강요 아래도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무죄한 사람이 죄인의 자리에 의무적으로 서는 것은 모든 도덕성에 배치된다고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원함으로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은 가능한 최대의 사랑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체포와 재판과 죽음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진리가 드러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대하는 독자들은 주도권이 항상 그리스도의 손에 있었음을 쉽게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복스런 주님의 죽음은 그분 편에서의 결단 내려진(determined) 행동이었지 단순한 육체적인 소진(消盡)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만이 구주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18:11). 그분은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종이십니다. 이어서 우리는 이에 군대와····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라는 기록을 대하게 됩니다(12). 그분은 기꺼이 자신을 결박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그 과정에 있어 고통스런 것이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 8:31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실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장면을 대하게 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9:31 10:32~34의 말씀도 살펴보십시오 이 구절들에는 아무 교리도 가르쳐져 있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부분이 가득합니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이 장면들에는 모든 분노와 수치, 그리고 고통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고백 직후에 자신의 고난을 처음으로 선언하셨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점에 주님에 의해 그 사건이 밝혀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메시아이신 그분께서 영광으로 인도하는, 고난의 길을 걸으셔야 했으며, 그분과 동일시된 자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제자들, 즉 거절당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당하는 제자들을 가지셔야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반복해서 그 사실을 그들에 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깨닫고 있는지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속죄제에 대한 주제를 상고해 볼 때 9장의 놀라운 구절(14)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방법은 없습니다.

(1) 그것은 그 가치에 있어 뛰어났다 -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2) 그것은 그 성격에 있어 영원했다 -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3) 그것은 그 성취에 있어 인격적이었다 - “자기를····드린····

(4) 그것은 그 제시에 있어 완전했다 - “흠없는····하나님께·····

(5) 그것은 그 결과에 있어 실제적이었다 -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의 이 모든 복스런 측면들은 속죄일에 행해진 일들과 극히 대조됩니다( 16).

주님의 한 종에게 어떤 이가 죽은 행실이란 무엇을 말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즉시로 죽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행실을 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죽은 행실은 유대교의 의식과 예식을 요약한 표현방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처리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주관적인 측면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한편,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인 규율과 의식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분께서 죽으셨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객관적인 측면은 쉬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피라는 말에 주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신약, 특히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유효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대목마다 이 단어가 사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피는 다른 어떤 서신보다도 많게도, 여기 히브리서에 6번 언급되어 있는데 이 사실만으로도 히브리서의 독특한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3배 가량,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5배 가량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하되 그 강포한 측면만이 아니라 그 희생적인 측면 또한 드러내 줍니다.

최근에 어떤 교단에서 발간한 새 찬송가를 보고 한 신도가 왜 윌리암 코우퍼의 아름다운 찬송 피로 가득한 샘이 있네를 빠트리셨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한 찬송가 선정 위원이 한 대답은 오늘날 현대주의의 경향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 속에 피에 대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 뺐는데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피에 대한 내용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속죄일에 대한 개념은 히브리서 9장의 문맥에서 한결 상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24,26,28절에 언급된 구주의 세 차례 나타남은 모두 이런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우리는 성소에 계신 대제사장을 대합니다. 26절에서 우리는 제단 위에 계신 대제사장을 대합니다. 28절에서 우리는 속죄일에 나타나시는 대제사장을 대합니다.

26절에서 우리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라는 엄청난 말씀을 대합니다. 이 구절로부터, “그 사건에 앞서는 모든 과거의 시대들은 그것을 내다 보았으며, 그 사건에 뒤이은 모든 미래의 시대들은 그것을 돌아다 볼 것이다라는 적절한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은 하나님의 인간 섭리의 중심을 이룹니다.

이 구절의 문맥 상의 의미는, 만일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아담의 타락 때부터 일련의 성육신과 속죄사역을 시작하여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그 일을 계속하셔야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념은 불합리한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영단번의 행위였다는 것이 히브리서 9장의 위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도덕적인 가치와 유효성은 그러했습니다. 28절로 넘어 오면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에는 죄를 위한 더 이상의 희생이 필요 없음을 보게 됩니다. 첫번째 오셨을 때는 죄를 담당하셨으며, 두번째 오실 때에는 그 단번의 위대한 제사의 결과를 거둬들이고, 그분을 바라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해서 죄와 상관없이 오실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