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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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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13. 15:14 교회진리/예배

예식이 무슨 뜻이냐

 

출애굽기 12:1-28; 고전 5:7-8; 11:23-34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출애굽기 12:26-27까지에 있는 말씀을 먼저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상의 인용된 말씀에는 주님께서 그의 옛 선민(選民)인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에 대해서 얼마나 깊으신 관심을 가지고 계셨느냐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월절은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사 그들을 건져 내신 날을 일년에 한번씩 지키던 기념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념제는 해마다 그들에게 피로 인한 구속의 대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가 앞으로 유월절 예식이 장로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수행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이상히 여기며 때로는 경탄할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는 질문이 어린 사람들의 입술에서 자연히 튀어 나오게 되면 부모들은 그럴 때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대답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행하신 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날밤에 지금까지 상징적으로 행하여지던 유월절은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에 주님께서는 교회의 대중심적인 규례인 성찬 즉 주님의 크신 사랑과 무한하신 희생을 기념하는 예식을 세우셨습니다.

이 예식을 준행하는데 관한 가르침은 신약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도()에 장성한 신자들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이 성찬에 관하여 성서적으로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구약시대와 같이 어린 세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라고 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될 수 있는대로 알기 쉽게 (잘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서 미숙한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고자 원하는 성도들에게) 몇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제일 먼저 일어나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왜 이 예식을 대부분의 다른 교파에서는 대체로 일년에 한번 내지 두번 지키는 정도인데 당신들은 어떻게 그리 자주 행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유월절의 경우와 같이 이 예식을 언제 지키라고 하는 명확한 말씀이 없습니다.

유월절은 일년에 한번씩 경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찬(聖饌)을 세우실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행하여 자주 나를 기념하라 [영어 성경이나 희랍어 성경에 보면 osakis eav(as often as)로 되어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그렇게 되지 못함] 고 하심으로 할 수 있는대로 자주 행하여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이 이와같은 방법으로 자기들을 위한 그의 사랑과 희생을 「자주」 나타내 줄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처음에는 매일 모여 떡을 떼다가 (2:46) 후에는 주일에 모여 떡을 뗀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20:7)

사도들이 살던 당시에는 성찬 예식은 공인된 예식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계명이라기 보다 주님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14:23)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이것을 가끔씩 행한다 할찌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얼마나 자주 행하여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 중에 초대 교회는 어떻게 행했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안식후 첫날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기념하러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교파에서처럼 이 예식을 주관하여 집행하는 목사가 없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와 같은 예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이나 서신서들 아무데에도 초대 교회에 그와 같은 특수한 집행인이 따로 있었다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당시의 신자들은 다 같은 형제로 함께 모였을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분은 이 말씀을 따라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심을 쉽게 믿을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초대 교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그의 말씀을 참되이 지키십니다.

두 세 사람이 성경 말씀대로 모인 곳에는 어느 곳이나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계셔서 성령으로 주관하시며 또 그의 성도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자신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맨 처음으로 떡을 떼시며 잔을 돌리실 때 주님께서 친히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현재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은 세상에 있습니다. 주님은 그 몸의 머리되시고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만찬에 대해서 사례하시고 나누어 주실 때 그 몸의 한 지체인 입술과 손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꼭 그와 같이 오늘날도 그의 신비한 몸의 지체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든 만찬상으로 가서 사례하고 떡을 떼고 잔을 돌리면 그 형제는 잠시동안 주님의 손과 입술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찬 집행을 위한 특수한 인간적인 교회내의 계급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 사모하는 분은 주님 외에 없습니다.

만찬상에 나가 떡과 잔을 사례하고 나누는 자도 주님을 대행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예를 들어 안수받은 목사나 그와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말씀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3:8)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왜 예식이 시작될 때 떡 한 덩이를 갖다 놓고 나중에야 그것을 떼는가?

왜냐하면 떡 한 덩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몸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떡을 뗌은 주님의 죽으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 함이라 (고전 10:17)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떡을 미리 여러 조각으로 떼어 놓는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은 놀라운 상징을 온전히 상실하는 것입니다.

떡에 대해서 사례한 후 그것이 한 성도로부터 다른 성도로 돌려질 때 각기 자기의 몫을 떼어 먹음으로 그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잔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으며 또 왜 모두가 그 잔을 마시는가? 그 잔 안에는 포도주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속의 값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고전 10:16)

마치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즙틀에 들어가 어그러져서 소위 성경에 이른바 포도의 피가 흘러 나오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사 죽음으로 어그러지셨을 때 주님의 구속의 보혈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러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용히 묵상 가운데서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감격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구속의 대가(大價)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고귀하고 거룩한 예식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지 않는가?

왜 구원의 체험이 있고 주님의 진리를 고백한 사람들만이 그의 만찬상에 참예하도록 하는가?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나오는 자들 중에서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예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은 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5 9-11절까지에 있는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는 악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멀리 하라는 것과 어떤 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분명한 금령(禁令)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만찬을 포함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만찬을 받는 자들에 대하여 세심한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중요성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전장을 읽으십시오)과 고린도후서 6:11-18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될 경우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중요성을 우리 마음가운데 되새기게 됩니다.

성도 각자가 주님을 경외하여 떡을 떼고 잔을 마시기 위하여 자리에 앉기 전에 자신을 검토할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지만 성도의 모든 교회들도 역시 그와같은 자들만이 거룩하고 순전한 이 예식에 참여하도록 하는 준엄한 책임이 주워져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예식을 위한 미리 준비된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같은 일정한 예배 순서가 없는가?

설교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침묵으로 낭비되지 않는가?

예배하는 자가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기도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또는 단순히 찬송을 부르고 서로의 교제를 즐기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인 유일한 이유는 주님을 만나 뵙고 그 분께 사로잡혀 그 분께 우리 마음의 예배를 드리고 또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겪으신 고난을 기억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경우를 이렇게 말해 보십시다.

만약 우리 주님께서 어느 주일 아침 어느 예배처에 친히 오실터이니 11부터 12 30 까지 거기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주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영광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 그러한 때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성도들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에 젖은 마음으로 그곳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이는 사람들에게서 경솔한 언동이나 육적인 희열의 빛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하기 위하여 나오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단 하나의 사모심이 있다해도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경배에 어린 눈으로 한없이 쳐다보고 싶어하는 것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이야기 하는 것과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고초를 생각해 보는 것과 또 주님의 빛나는 형상을 뵈올 때 우리의 마음에 넘쳐나는 감사와 경배를 표현을 하는 말뿐일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주님의 놀라우신 인격, 그의 받으신 고난과 현재의 영광을 찬미하는 찬송을 한 목소리로 합하여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육에서 나오는 형식 따위는 전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만일 어느 형제가 말씀을 보아도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거나 주님의 인격과 공로를 더 잘 이해하고 감지하도록 성도들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지 그러한 때에 주님의 직접적인 지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자의 자세를 취하므로 주님을 한쪽에 제쳐놓는 실수를 범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주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모일 때 우리의 육안이 주님을 뵈었을 때와 다름없이 주님께서 오셔서 계신다는 사실을 유의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목적대로 우리는 우리 앞에 계신 주님을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찬송이나 말씀을 택하여 부르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 설교나 주님을 기억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윤리 해설을 하는 형제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합당치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경외감은 육을 제어할 것이며 또 찬송을 택하거나 공중감사를 하거나 말씀을 택하여 봉독할 분은 반드시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임을 확신한 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얼마 동안 침묵이 흐른다해도 그것이 전혀 시간의 낭비가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사모하여 모인 주님을 황홀한 눈으로 경모(敬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러 모인 예배시간 동안만은 죄인의 구원이나 개인의 축복이나 이와같은 일들에 대한 기도는 (물론 기도시간에는 합당한 것이지만)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떡과 잔에 참예함이 끝난 후에는 집회가 일반적인 성격을 띄어도 상관없지만 그 전에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복하여 주님을 기억하러 모였다고 하는 이 단일한 생각을 모인 모든 성도들이 깊히 유의한다면 그 밖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자연히 해소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와같이 주님을 예배하러 모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예배 시간에 늦지 않게 오시므로 예배를 산만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시면 좋지요.

이에 대한 조그마한 노력이 예배를 귀하고 즐겁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늦게 나오시므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시키는 분들은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에 지장이 되는 바 큰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 내내 직장이나 학교 출석에 대해서는 한번도 늦지 않으시면서도 주일 예배시간이 그들의 직장이나 학교의 출근시간 보다도 훨씬 늦게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지각한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옳게 시정하는데 필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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